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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신하를 갈취하다

  • 유승익은 표정이 확 바뀌었다. 곤장을 맞으면 죽을 수도 있었기에 그를 포함한, 무릎을 꿇고 있던 신하들이 안중원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안중원은 난감한 기색을 지었다. 그는 서숙의를 징벌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무열이 이렇게 대노하며 곤장으로 십여 명의 신하들을 다스리려 할 줄 몰랐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불똥이 튈 것이고 나서지 않는다면 인심을 잃을 것이었다.
  • “전하, 아니 되옵니다! 유대감의 상소가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조정을 위해서 한 일이옵니다. 이렇게 십여 명에 달하는 신하에게 중벌을 내리신다면 다른 신하들의 신임을 얻을 수 없을 듯하옵니다.”
  • 안중원이 입을 열자 말을 거드는 사람이 많아졌다. 영의정 임종서, 군방 안명이 앞장서 유승익 등을 위해 간청했다. 하지만 진무열은 예전과 달리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손을 저으며 금위군에게 호통쳤다.
  • “뭘 기다리는 것이냐? 과인이 친히 잡아가길 기다린 것이더냐?”
  • 금위군 두목 도총관 장홍이 멈칫하다가 곧 사람들을 잡아갔다. 한순간 태극전은 아우성과 애원으로 차 넘쳤다.
  • 서문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진무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을 보고 멍하니 있었다. 그는 곧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 그는 손을 휘두르더니 인사를 올리고 나서 말했다.
  • “전하, 아니 되옵니다.”
  • 서문이 진지하게 하는 말에 안중원 등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졌다. 그 누가 나와서 말을 거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서문은 달랐다. 진무열은 계속 화가 난 척하며 말했다.
  • “서문, 그대는 물러가라, 감히 서숙의를 모함하다니, 누가 나서도 소용이 없다. 곤장은 반드시 칠 것이다.”
  • “아니 되옵니다. 전하, 저희는 조정의 기강을 위해 상소를 올린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이렇게 저희를 대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저희 모두 이미 잘못을 뉘우치고 있사옵니다.”
  • 유승익은 곧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는 수염이 희게 샌, 50이 다 된 사람이었기에 곤장 30대면 무덤으로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곤장 30대는 너무 과중하옵니다. 먼저 기억해뒀다가 유대감 그들이 공으로 죄를 대신하게 하는 건 어떠시온지요?”
  • 곽자운은 눈썹을 찌푸리고 나서서 사정했다. 그는 강직하게 마음속에 있는 말을 했고 임종서도 따라서 한마디 거들었다.
  • “맞사옵니다. 전하, 유대감 등 대신들이 공으로 죄를 대신할 기회를 주시옵소서. 조정에 이들이 없으면 안 되옵니다.”
  • 진무열은 일부러 머뭇거리며 유승익 등을 바라보더니 여전히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 “안대감과 임대감이 사정하지만 않았더라면 오늘 그대들의 엉덩이가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 유승익 등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꼈다.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저마다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곧 진무열이 말을 계속했다.
  • “곤장은 면할 수 있으나 너희들의 성의를 봐야겠다. 정말 성심성의로 뉘우치고 있는지 말이다.”
  • 성의라니?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진무열의 시선을 따라 사람들은 땅에 널린 땅문서와 은자를 보았다. 안중원과 다른 사람들도 곧 알아차렸다. 전하가 이렇게 한 것은 결국 은자 때문이었다.
  • 안중원과 임종서는 서로 마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그 전하가 어디에 간 거지? 오늘 왜 갑자기 전술까지 쓰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관직을 오늘날까지 이어온 유승익은 바보가 아니라서 진무열의 뜻을 알아차렸다.
  • “전하, 소신 은자 100냥을 이재민 구제에 내놓으려 하옵니다!”
  • 진무열은 입가를 씰룩이며 겨우 은자 100냥으로 거지 취급하냐고 생각했다. 그때 유승익이 말했다.
  • “전하, 은자 천 냥과 양식 오 석을 이재민 구제에 사용하겠사옵니다.”
  • 고성국의 양식 일 석은 120근 좌우에 달했고 5석이라 함은 600근 좌우였다. 거기다가 은전 천 냥은 종정 소경에게 너무 큰 금액이었다.
  • 하지만 진무열은 이 사람들이 기름이 흐를 정도로 잘살고 있으니 이 정도는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의심을 살까 너무 큰 금액을 말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금액을 말하고 난 뒤 진무열을 바라보았고 진무열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 “너무 적어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 “안대감, 임대감, 그리고 다른 경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하냐? 너무 적지 않느냐? 관중의 재해는 한두 푼이나 조금의 양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 진무열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그렇게 서서 지원을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고 서문은 집안이 장사꾼이었기에 맨 처음으로 나서서 의사를 밝혔다.
  • “전하, 소신은 서씨 가문의 명의로 은자 10만 냥에 양식 100석을 관중에 지원하도록 하겠사옵니다.”
  • 이 숫자를 들은 유승익 등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가를 올리는 것도 아니고 기준수치가 이렇게 높으니 자신들이 부른 천 냥, 백 냥이 우스운 꼴이 된 것이다.
  • 안중원은 무거운 눈빛으로 진무열과 서문을 바라보았다. 왕과 신하가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이 기회를 잡아 그들을 갈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은자에 대해 별 상관이 없었지만 진무열이 왜 이렇게 변한 건지가 무척 신경 쓰였다. 왕은 권신을 두려워하지만 권신 역시 똑똑한 왕을 두려워했다.
  • “전하, 소신도 집 세 채와 여러 땅문서를 팔면 수만 냥 정도 나올 것이옵니다. 거기다가 양식 백석을 보태 관중을 지원하도록 하겠사옵니다.”
  • 안중원은 억지웃음을 짓고 나서 유승익 등에게 눈빛을 보냈다. 유승익 등은 배가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가 곤장을 면하려거든 은자를 내놓으라는 뜻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전하, 소신도 집을 팔아 수천 냥 은자를 얻을 수 있사옵니다. 거기다가 양식 20석을 보태겠사옵니다.”
  • “소신도 밭과 땅문서를 팔아 관중을 지원할 것이옵니다.”
  • “…”
  • 조정에 있던 백 명 남짓한 신하들이 저마다 지원을 하겠다고 나섰고 관중 이재민들에 관한 관심이 지극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유승익 등 십여 명을 구원하기 위함이었고 이 정도 은자는 그들에겐 새 발의 피였다. 오랫동안의 탐오와 갈취, 그리고 조정에서 빨아먹은 피까지 합하면 그들은 저마다 부자였다.
  • 깨끗한 신하는 얼마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곽자운은 겨우 20냥을 지원하고 사람들의 조롱을 한껏 받았다. 그가 짠돌이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는 정말 은자가 없었다. 조정에서 매달 주는 봉록이 별로 많지 않았으므로 아껴 쓰고 모은 은자가 겨우 이 정도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 반 갈취를 통해 모금한 진무열도 조정에 있는 많은 신하를 다시 한번 알아보게 됐다. 깨끗한 관원은 별로 없지만 탐관오리가 참 많았다. 다들 잘 알고 있으면서 얘기를 하지 않을 뿐이었다.
  • 곧 시내관은 방금 사람들이 제시한 모금 수치를 현지에 적고 진무열에게 건네주었다. 결론만 보면 꽤 괜찮았다. 거의 30만 냥이라는 은자가 모였고 양식도 거의 2천 석이 모였으니 이는 천문학적 숫자였다. 이재민 구제에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았고 조정은 심지어 얼마되지 않는 50만 냥 은자를 건드리지 않아도 됐다.
  • “그래. 곽자운, 과인은 이틀이라는 시간을 주겠다. 모든 금액을 끌어모아 정확히 관중에 지원하도록 하라.”
  • 곽자운은 무릎을 꿇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 “네, 전하, 소신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소신은 관중 백성들을 대신해 전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사옵니다!”
  • 진무열은 손을 내젓더니 서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 “서문, 좌태파는 언제 출발하여 도창산을 무찌를 것이냐?”
  • 서문은 인사를 올리고 무사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 “이틀 내에 좌태파는 만 오천 명의 군사가 움직일 것이옵니다.”
  • “검남을 건너 도창산에 도착하려면 5일 정도가 걸릴 것이고 초비를 마치려면 3일이라는 시일이 걸릴 것이옵니다. 보름 안에 낙정에서 소식을 받을 수 있도록 소신이 약속드리겠사옵니다.”
  • 진무열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안중원 등을 둘러보았다. 서문이 초비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은 것에 대해 안중원은 나서서 제지하지 않았고 안명도 억울함에 그에게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