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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궁의 대규모 암살 사건

  • 두 날 후, 경자년 7월 1일이었다.
  • 서문은 1만 5천여 명의 부대를 거느리고 마적을 잡으러 낙정에서 도창산으로 향했다.
  • 백성들은 그들에게 길을 내어주면서 환호했다.
  • 백성들은 마적과 산림 강도를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드디어 그들을 잡으러 병사들이 나섰으니 경사가 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 진무열은 서문을 위한 출정식을 마치고 미리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좌태파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빌었다.
  • 문무 백관들도 서문을 배웅하러 왔다.
  • 맨 앞에 군장 차림으로 서 있는 진무열을 향해 서문은 위엄 있게 말했다.
  • “전하, 소신은 이만 떠나겠사옵니다, 하나밖에 없는 제 누이를 잘 돌봐주시길 간청드리옵니다. 혹시라도...”
  • 서문은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무과 시험의 일로 자기와 누이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 혹시라도 자기가 없을 때 누가 누이를 괴롭힐까 봐 두려웠다.
  • 진무열은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진지하게 말했다.
  • “서숙의는 과인의 아내다. 누가 감히 그녀를 건드리겠는가. 걱정하지 말고 갔다 오거라. 서 장군의 승리를 기다리고 있겠느니라.”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진무열의 말을 듣고 서문은 좀 마음이 놓였다. 그는 다시 인사를 올리고 말에 올라탔다. 그의 출발 명령에 따라 병사들도 출동하기 시작했다.
  • 말이 달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장엄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 서문은 용맹하기로 소문이 났다. 좌태파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는데 그가 좌태파의 장군으로 될 수 있다는 건 절대적인 실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 병사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멀리 가자 진무열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궁으로 돌아갔다. 조정의 신하들도 돌아갔다.
  • 화양전.
  • 서숙의는 눈물이 마를 틈이 없었다. 직접 서문을 배웅해주려고 했는데 괜히 신하들의 미움을 더 살까 봐 화양전에 남아있기로 했다.
  • 아무래도 남매인지라 그녀는 서문과 사이가 아주 좋았다. 오라버니가 전쟁터를 나서는데 아무리 상대가 마적이라도 그녀는 근심되었다.
  • 그녀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진무열도 썩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여 어디도 가지 않고 그녀를 품 안에 꼭 끌어안고는 다독여줬다.
  • 요 며칠, 안시향과 다른 첩들도 진무열을 찾아왔었다. 하지만 진무열은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으니 서숙의를 향한 애정이 남달랐다.
  • 후궁에는 왕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서숙의의 소문이 자자했다.
  • 무과 시험의 일도 도창산에 출정한 일로 덮어져 잠잠해졌다.
  • 하지만 고요해 보이는 낙정에는 곧 폭풍우가 닥칠 예정이었다.
  • 이날 밤, 낙정에는 비가 쏟아지는 듯이 내렸다. 
  • 7월의 무더운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큰 비가 내렸다.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가며 쳤다.
  • 낙정 중앙 거리에 있는 한 자택에는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 “우르르...”
  • 천둥이 울렸다.
  • 검은 복면을 쓴 몇십 명의 사람들이 질서 있게 줄을 맞춰 섰다. 치가 떨릴 정도로 분위기가 스산했다.
  • 7척이 되는 한 남자가 손에 긴 검을 쥐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마치 나무토막처럼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 복면을 쓴 사람들은 비가 쏟아지는데도 피하지 않았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듯이 적막이 흘렀다.
  •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나자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오늘 밤 축시, 화양전, 서숙의를 죽인다!”
  • “네!”
  • 그들의 눈에는 차가움이 섞여져 있었다.
  • 궁에 있는 후궁을 죽이는 게 아주 쉬운 일인 마냥 그들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 천둥이 울리는 소리는 여기의 소리를 덮어주었다. 분위기는 점점 으슥해졌다.
  • 이때, 안 씨 저택에는 안 씨 일가의 사람들이 모여져 있었다. 이미 깊은 밤이었지만 안중원은 전혀 잠 들 수가 없었다.
  • “아버지, 정말 수를 잘 둔 것 같아요. 그 계집을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총관 장홍 그 자도 이참에 괴롭히면 좋겠네요. 여기저기 눈치만 보면서 저희 편에 서지 않았었잖아요. 서숙의가 암살을 당한다면 전하께서도 많이 놀라시겠죠? 궁의 안전을 책임지는 도총관이 무사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아무리 가벼운 형벌이라도 유배는 되겠죠?”
  • 안명은 간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 안중원은 차를 한 잔 마시고 신중하고도 또 여유롭게 말했다. 
  • “명이야, 명심하거라. 오늘 밤은 아주 중요하단다. 나중에 전하께서 아주 샅샅이 밝히려고 할 거다. 그때 절대 티를 내서는 안 된다. 원래 계획대로 파로 돌아가거라. 천수대군 쪽에서 움직이면 넌 바로 금오위의 병사들을 데리고 전하를 호위하러 가거라.”
  • 안명은 씨익 웃고는 말했다.
  • “네, 알겠습니다.”
  • 그러고는 저택을 나섰다. 말에 올라탄 그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 안중원은 번개가 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전하, 소신을 탓하지 마소서, 전하가 이렇게 만든 것이옵니다. 서숙의와 서문, 그 두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말았어야지요.”
  • 그러고는 하찮은 표정을 지었다.
  • ‘겨우 왕 따위가 실권을 잡으려 해? 그러면서도 한문 출신인 서 씨 남매에게 희망을 둔 거야? 결국 모두 부질없는 짓이지.’
  • “신하, 사대부는 물론이고 사의대부까지 모두 전하의 무과 제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시더군요. 이제 암살 사건이 일어나면 또 당황해하겠지요? 결국 전하에게 제일 필요한 건 소신이옵니다, 하하하.”
  • 안중원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 ...
  • 비는 그치지 않았다. 천둥과 번개에 바람까지 더해져 궁 안의 분위기는 더 으스스했다.
  • 축시가 되었다.
  • 천둥소리와 함께 거의 30명이 되는 복면을 쓴 자객들은 손에 검을 들고 물구덩이를 밟으면서 화양전 주위에 도착했다.
  • 금위군의 시체는 점점 늘어져만 갔다. 빨간 피는 내리는 비와 함께 어우러져 더 섬뜩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 그들이 어떻게 궁으로 들어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철통 수비를 한 금위군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 그들이 거의 진무열이 자는 곳까지 다 이르렀을 때가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 “자객이다!”
  • “전하를 보호하거라!”
  • 제일 먼저 자객을 알아차린 건 은위대였다. 그들은 귀신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초월의 고함소리에 그들은 미친 듯이 침전으로 달려들어 갔다.
  • 하지만 자객은 그들의 길을 막았다.
  • 칼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비명도 들렸다. 그 소리는 조용하고 잠잠했던 후궁을 깨워버렸다. 금위군은 비상사태가 일어난 것을 알아채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자객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 화양전은 아비규환으로 되었다.
  • 이때, 복면을 쓴 7명의 자객은 진작 뒷길로 화양전의 안쪽으로 빠져나왔다.
  • 진무열은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에는 사람들이 싸우고 있었다.
  • 서숙의도 그 소리에 바로 깼다. 그녀는 너무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전하, 빨리 도망가시옵소서!”
  •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진무열을 먼저 챙겼다.
  • “슉!”
  • 7명의 자객은 침전 안으로 활을 쏘기 시작했다.
  • 진무열은 깜짝 놀랐다.
  • “조심하오!”
  • 그는 서숙의를 보호하려고 바닥에 덮쳤다. 간신히 그 화살은 피했다.
  • 그 화살은 바닥에 꽂혔다. 원목 바닥이 쩍쩍 갈라진 걸 보니 화살에 맞았으면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 진무열은 사람을 부르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서숙의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발견했다. 그녀의 고운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 한 자객이 검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 “전하, 조심하옵소서!”
  • 그녀는 본능적으로 진무열을 밀쳐내고는 다시 자기 밑으로 보호했다.
  • 그녀가 이렇게 힘이 셀 줄은 몰랐다.
  • 긴 검은 서숙의의 등을 향해 찔렀다. 그러고는 빨간 피가 튀어 나왔다.
  • “우욱...”
  • 그녀는 진무열의 얼굴에 피를 토했다. 진무열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전하.”
  • 서숙의는 눈썹을 찌푸리면서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녀는 자기 몸으로 자객을 막으려고 온 힘을 다해 진무열을 짓눌렀다.
  • “서숙의!”
  • 진무열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그녀를 지켜주려고 했으나 새빨간 피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몸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 그녀의 등은 칼에 찔려 거의 손바닥만 한 길이의 상처가 났다.
  • “아악!”
  • 진무열은 분한 마음에 소리만 크게 질렀다.
  • 자객이 더 찌르려고 다가오자 진무열은 겨우 빠져나와 서숙의를 보호했다.
  • 그 모습을 본 자객은 좀 주춤했다. 이번 암살의 목표는 서숙의지 진무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숙의가 죽지 않았을까 봐 또 두려웠다.
  • 이때,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 그리고 곧 한 늙은이가 나타났다.
  • “전하를 보호하거라!”
  • 풍천도였다. 아수라장이 된 침전을 보고는 화가 나 바로 한 자객의 목을 비틀렸다.
  • 나머지 6명의 자객은 목숨을 잃는 게 두렵지 않은지 모두 서숙의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 금위군도 침전으로 달려왔다. 스무 명이 넘은 사람이 진무열을 둘러싸고는 방패를 들어 그를 보호했다. 말 그대로 철통 보안이었다.
  • 진무열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그의 얼굴은 이미 굳어졌다.
  • 서숙의의 낯에는 전혀 혈색이 없었다. 입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왔고 온 힘을 다해 진무열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말을 할 힘이 전혀 나지 않았다.
  • “말하지 마오, 당장 어의를 부를 테니 걱정하지 마오.”
  • 진무열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했다.
  • 하지만 서숙의는 그를 꼭 붙잡기만 했다. 피가 묻은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 “전하... 전하, 밖은 위험하오니 나가지 마시옵소서.”
  • 진무열은 그녀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안고서는 밖으로 나가 어의를 찾으려 했다.
  • 서숙의는 눈물을 흘리면서 거의 비는 말투로 말했다.
  • “전하, 나가지 마시옵소서, 제발 부탁드리옵니다. 아직 자객이 금위군에 잡히지 않았는데...”
  • “더는... 더는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러옵니다.”
  • 그녀는 피를 머금고 창백한 손으로 진무열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러고는 겨우 말을 이어갔다.
  • “신첩은 너무 기쁘옵니다, 전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게. 궁에 들어오고 나서 드디어 전하에게, 낙정에 도움을 드린 것 같아 신첩은 너무 기쁘옵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켁켁, 전하의 대를 못 이어준 것이옵니다... 전하, 절대 신첩을 잊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신첩은 어두운 걸, 그리고 혼자 있는 걸 싫어하옵니다.”
  • 그녀는 아쉬움이 남아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너무 고통에 시달려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 “아니 되오!”
  • 진무열은 입술을 꽉 물었다. 눈물은 끊기지 않았고 가슴은 칼에 베인 것처럼 아파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