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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보기 드문 부드러움

  • 서숙의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진무열이 이토록 부드러웠던 적은 없었다. 호색한 모습으로 자신을 대한 적은 더더욱 없었으며 그녀를 건드리는 것조차 싫어하여 입궁한 지 1년이 넘도록 처녀로 살아가고 있었다.
  • ‘설마 전하께서 마음이 바뀌신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전하께선 안귀인만을 예뻐하셨어. 오랫동안 그 요부와 함께 나를 괴롭히고 서씨 가문을 유령 취급하였는데 어찌 일순간 바뀐단 말인가?’
  • 이런 생각을 하니 서숙의는 마음이 처량해졌다. 이 다정함도 전하께서 베푸는 동정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 그때, 진무열은 서숙의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마음이 간지러워졌다.
  • 타임 슬립하기 전, 그는 보잘것없는 경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사귀어본 여자친구는 그를 만나기 전 수많은 남자를 거쳐왔었다. 로또 맞을 행운으로 왕이 되었는데 먼저 즐겨야 하지 않을까?
  • “전하!”
  • 서숙의는 자신의 겉옷이 스르륵 벗겨지는 것을 느끼자 안색이 급변하며 외쳤다.
  • “전하! 의관이 전하께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셨사옵니다. 부디 옥체를 아껴주시옵소서!”
  • 진무열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 “의관은 내 정신이 피폐해졌다고도 했소. 그러니 이렇게 자극을 주어야 하오. 서숙의, 이리 오시오!”
  • “쿵!”
  • 진무열이 서숙의를 안아 들고 예스러운 옥좌에 그녀를 던졌다.
  • 입궁한 지 일 년이 넘었으나 왕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는 서숙의는 너무 부끄러워 안절부절못했다.
  • 그녀는 도망가고 싶었으나 또 그럴 수가 없었다.
  • 부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왕이 가장 위대하다는 사상은 그녀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무열이 그녀를 아무리 나쁘게 대한다고 해도 그녀는 오로지 진무열의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진무열은 이미 조급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전하, 조금 전 액상(額像)을 부딪치셨으니 시일이 더 지나면 신첩이 반드시...”
  •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진무열이 그녀의 당의 저고리를 완전히 벗기자 그녀의 얼굴은 곧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숙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전하, 신첩의 몸에 난 상처는 보기 흉하여 전하께서 거슬릴 것...”
  • 진무열이 멈칫하며 마치 정지된 듯 물끄러미 서숙의 몸에 난 상흔을 바라봤다.
  •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가렸으나 여전히 드러난 곳이 있었다.
  • 백옥같은 피부에 상흔과 멍이 가득 널려있었다!그녀의 몸에 새로 생긴 상처도 있고 오래된 자국도 있었기에 진무열은 지켜보면서 남자로서 가슴이 아팠다.
  • “보기 흉하시지요?”
  • 서숙의가 자비심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 “그렇지 않소!”
  • 진무열이 고개를 저으며 자책하듯 말했다.
  • “내 잘못이오. 내가 서숙의를 때리지 말았어야 했소.”
  • 서숙의는 그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에 마음속은 오만가지 감정으로 뒤섞인 것 같았다.
  • 예전의 왕은 그녀를 보는 것조차 싫어했으며 일 년이 넘도록 그녀를 부른 적도 없었으나 오늘의 왕은 그녀를 산 채로 잡아먹을 듯한 모습이었다.
  •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 “아, 전하와 오늘 하룻밤을 함께해도 좋사옵니다. 앞으로 제게 조금만 잘해주시고 매를 들지 않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옵니다.”
  •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진무열이 천천히 그녀의 두 손을 느슨하게 하는 것을 바라봤다.
  • 그녀는 더는 가리지도, 옥체를 생각하여 주시라고 권고하지도 않은 채,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 진무열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붉은 입술을 탐했다.
  • 그 순간, 서숙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을 느끼며 왕에게 몸을 맡겼다.
  • 한참 후, 두 사람은 점입가경에 들어섰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화양전에서 기괴한 비명이 새어나왔는데 어딘가 오싹하기까지 했다.
  • 화양전 밖에 있던 궁녀와 내관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속닥거렸다.
  • “휴, 화양전 마마께서 또 폐하의 심기를 건드려 매를 맞으시나 봅니다.”
  • “이렇게 좋은 마마님께서 왜 전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걸까요?”
  • 그들은 서숙의의 딱한 운명을 가엾어했다. 그녀는 겉보기엔 화려하나 실은 며칠이 멀다시피 왕의 학대를 받았으니까.
  • 이튿날 아침.
  • “전하, 전하. 조회(早朝)에 가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 서숙의가 부드럽게 진무열의 귓가에서 소곤거렸다. 그녀는 왕의 심기를 건드려 매를 맞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 진무열은 단잠에 빠져 있다가 몸을 휙 돌려 그녀를 안았다.
  • “전하, 조회 시간이 곧 다가옵니다.”
  • 서숙의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다시 용기를 내서 진무열에게 전했다.
  • “가지 않을 것이오. 난 어디도 가지 않겠소. 서숙의를 안고 잠을 잘 것이오!”
  • 진무열은 결코 침상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서숙의의 마음이 따듯해졌다. 왕이 드디어 자신을 조금이나마 총애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하지만 곧이어 밀려온 것은 조급함이었다.
  • 그녀는 속으로 안귀인를 증오했다. 왕이 갑자기 이토록 황당하게 바뀐 것은 반드시 그녀의 짓이라 여겨졌다.
  • 전하께서 조정에 가지 않으시겠다니. 한 나라의 왕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 “휴.”
  • 그녀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증오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 안시향은 호조 판서의 귀한 딸이다. 가문의 형제들도 조정의 높은 자리를 꿰찬 신하였고 영의정마저 안씨 가문과 사이가 돈독했다. 안시향은 그야말로 궁에서 안과 밖을 아울러 권력이 가장 높으며 또한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질책할 수 있는 사람은 후궁을 통틀어도 없었다.
  • 그녀의 한숨을 들은 진무열이 천천히 눈을 떴다.
  • 서숙의는 이미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모습은 어제와 확연히 달라 보였다.
  • 피부는 더 투명해졌고 눈빛엔 여인의 요염함이 그윽하여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향긋한 꽃 같은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 “서숙의, 왜 탄식하는 것이오?”
  • 진무열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자 서숙의의 눈가가 불그레 해지더니 자신을 탓하며 말했다.
  • “전하는 천하를 군림하는 왕이시옵니다. 조회에 참여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일이온데 신첩 때문에 나랏일에 차질이 생기면 신첩은 죽음으로도 그 죄를 물을 수 없사옵니다. 부디 신첩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먼저 조회에 가주시옵소서.”
  • “지금 고성국은 내우외환에 처해있사옵니다. 안은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로, 밖은 흉노족과 돌궐족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이대로 두면...”
  • 그녀가 두려운 눈빛으로 진무열을 바라보며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 지난번, 그녀가 진무열에게 미인에 취해 읽지 않은 상소문을 확인하고 지시하여야 한다고 권했으나 진무열이 불같이 화내며 그녀를 죽도록 때렸었다.
  • 그녀의 말을 듣자 진무열의 머릿속에 여러 개의 기억 조각이 떠올랐다.
  • 강대한 고성국은 확실히 이미 속이 비어버린 것 같았다. 얼마 전에도 적지 않은 상소문에서 가뭄으로 인한 피해와 마적과 흉노가 국경을 넘었다는 내용을 올렸었다!
  • ‘안 돼! 내가 왕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이렇게 좋은 삶이 차려졌는데 다시 빼앗길 순 없어. 내가 조정의 기강을 잘 잡아서 고성국이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게 해야 해.’
  • 진무열의 눈이 확신에 찬 듯, 반짝거렸다. 그는 절대 망국노나 나라를 말아먹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 ‘난 가장 멋진 왕이 될 거야!’
  • “서숙의, 그대 말이 맞소. 내 지금 바로 조정에 가겠소. 바로 정무를 처리할 것이오.”
  • 그 말에 서숙의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진무열이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말에 응할 줄 몰랐다. 평소라면 화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 화를 그녀에게 풀었을 것이다.
  • “전하, 참말이옵니까?”
  • “당연히 참말이지.”
  • 진무열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 “과인이 환복을 하겠노라. 조정에 갈 것이다!”
  • 진무열은 마치 인생 최고봉에 오른 것처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서 남자의 자신감이 가득 넘쳤다.
  • 아내가 자신을 칭찬하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것은 없는 것 같았다!
  • 얼마 후.
  • 진무열은 옷을 갈아입고 용모를 단정케 하기까지 완벽하게 궁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그리고 느긋하게 금린대전으로 입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