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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영롱전

  • 영롱전은 아주 넓었다. 날이 어둑해졌음에도 그 휘황찬란함을 감출 수 없었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빛은 촛불이 아니라 야명주였다.
  • 금잔디나무, 옥 공예, 금으로 만들어진 대문, 각종 희귀 재료로 만들어진 조각품들...
  • 귀인 한 명의 침전이 이토록 패기가 넘쳐 궁 절반을 누르는 것 같았다. 태극전과 비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몸 주인은 안시향에게 푹 빠져 있은 듯싶었고 아마 은자가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이 여자를 감싸고 돌았던 듯싶었다. 영롱전은 지나칠정도로 너무 화려했다.
  • 안시향은 마중을 나왔고 미리 준비한 듯 악사나 무희들, 그리고 음식과 술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은 이렇게 술과 여색이 겸비한 남자의 천국이었다. 진무열은 무희의 치마 밑으로 드러난 다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안시향은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웃으면서 물었다.
  • “전하, 마음에 드시옵니까?”
  • 그녀는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빨간 옷에 가슴이 보일 듯 말 듯했으며 가는 허리까지, 요정이 따로 없었다. 진무열은 자리에 앉더니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에게 흠뻑 취한 듯한 표정을 짓고 예전의 그 방탕하기 그지없던 왕의 모습을 재현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 “풍악을 울리거라. 과인에게 풍악을 올리거라.”
  • 곧 영롱전에 풍악 소리가 울려 퍼졌고 무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 “전하, 신첩은 전하께서 또 오지 않으실 줄 알았사옵니다.”
  • 안시향이 웃으면서 말했다.
  • “그럴 리가 있겠소? 과인은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오. 온다고 했으니 왔잖소.”
  • 진무열은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품에 끌어안았다. 안시향은 곧 허리에 힘을 줘 곧게 앉은 뒤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전하, 뭐가 그리 급하시옵니까? 신첩이 춤을 올리겠사온데 어떠하시옵니까?”
  • 진무열은 이 여자가 또 피한다고 생각했다. 이 점으로 볼 때 안시향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안시향을 더 꽉 잡고 그녀가 피하지 못하도록 했다. 힘이 아주 셌고 만약 서숙의였다면 아마 아파서 눈썹을 찌푸렸을 것이다. 하지만 안시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옥같이 하얀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진무열은 갑자기 힘을 쓸 수 없었다.
  • “전하, 조급해하지 마시옵소서. 향이가 오늘 밤 제대로 시중을 들 것이옵니다. 여기엔 궁녀와 내관이 너무 많사옵니다.”
  • 그녀는 웃으면서 가운데 있는 빈자리에 가서 신을 벗고 맨발로 땅을 밟더니 한 마리의 나비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 진무열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안시향을 바라봤다. 방금 시탐해봤는데 안시향이 무공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권신의 딸이고 무공이 있으며 유혹술을 쓸 줄 알며 궁에 들어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그 목적이 무엇일까?
  • 안시향의 하늘하늘거리는 춤결은 순간 무희들을 무색하게 했다. 진무열을 향해 웃음을 날리며 춤사위를 펼친 그녀의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고 그녀의 치마폭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 하지만 그는 이미 의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궁이 그렇게 많은 상황에서 이 여자의 손에 평생을 바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안시향이 다가와 술잔을 손에 들고 춤을 추면서 그에게 술을 따라줬는데 그 모습이 아주 치명적이었다.
  • 진무열은 안씨 가문을 잠시 잡아둬야 했기에 일부러 그녀에게 빠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만지며 미색에 흠뻑 취한 듯 행동했다.
  • 음악과 춤으로 가득 찬 영롱전은 조용한 화양전과 현저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서숙의는 문에 기대어 영롱전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선 이틀 동안 자신을 예뻐해 주시다가 또다시 영롱전으로 갔으니 내일은 또 돌아오실지 모르는 일이었다.
  • “숙의 마마, 들어가시지요. 오늘 밤 전하께선 오시지 않을 듯싶사옵니다.”
  • 최나인이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비록 그녀는 입궁할 때 데리고 온 나인이긴 하지만 서숙의와 함께 자랐기 때문에 친자매나 다름없었다.
  • “그래.”
  • 서숙의는 한숨을 내쉬고 눈을 내리깔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침전으로 돌아갔다. 최나인은 자신의 주인이 이렇게 우울한 것을 보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 “숙의 마마, 전하께선 자극적인 걸 좋아한다 들었사옵니다. 마마께서... 춘화를 보지 않으시렵니까?”
  • 서숙의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마음이 조금 동요됐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는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 “그러자꾸나.”
  •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갔다. 영롱전 밖에선 들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하얀 달빛과 어울려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침전에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전하, 신첩을 잡아보시옵소서.”
  • 안시향은 맨발로 땅을 밟고 연잎처럼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는데 마치 달나라에 있는 선녀처럼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진무열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웃어 보이자 세상을 매혹할 만큼 예뻤다.
  • 진무열은 화양전에 돌아가려했으나 너무 취해 발걸음마저 휘청거렸으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 여자를 정복할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는 취기가 피어올라 온몸의 힘을 다해 안시향의 가느다란 허리를 꼭 껴안고 쓰러뜨린 다음 그대로 덮쳤다. 안시향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하얀 식지를 그의 입술에 대고 웃으면서 말했다.
  • “전하, 봉황포를 입은 신첩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으시옵니까?”
  • “그럼 어서 가서 바꿔입고 나오오.”
  • 진무열이 딸꾹질하며 말했다. 안시향은 손쉽게 그를 밀쳐내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 “전하,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옵소서, 신첩 환복하고 오겠사옵니다.”
  • “그렇게 하오.”
  • 진무열은 취기가 피어올랐다. 향이 반개 정도 타들어 가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진무열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침전안의 모든 불이 다 꺼졌다. 크고 푹신한 침상 위에 아름다운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몸매가 황홀하고 행동거지가 요염했지만 얼굴을 가려볼 수 없었다. 달빛을 빌어 그녀가 빨간 봉황포를 입고 있어 더 예쁜 모습을 하고 있었고 마치 여왕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정복하고 싶은 욕망이 피어올랐다.
  • 봉황포는 왕후의 옷이었는데 예로부터 최고급의 옷이었다. 진무열은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 들었고 머릿속엔 목소리 하나가 맴돌았다.
  • “덮치거라, 마음껏 즐기거라.”
  • 진무열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취기에 어린 발걸음을 옮겨 침상에 기어올랐다. 유일한 유감이 광선이 없다는 것인데 진무열은 앞을 가려볼 수 없었다. 왜 불을 끈 거지? 안시향이 부끄럼을 타는 것일까?
  • 침전의 주렴 밖에서 아름다운 그림자 하나가 침상 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달빛이 쏟아져 그녀의 얼굴을 비췄는데 그녀는 안시향이었다! 안시향은 왕의 시중을 들었던 게 아니었고 진무열은 다른 여자와 사랑을 하고 있었다.
  • ...
  • 하룻밤의 폭풍우가 지나가자 진무열은 온몸이 쑤셔왔다. 그는 눈을 뜬 순간 안시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이불에 아직도 어젯밤 정사를 나눈후의 특유 향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어젯밤 너무 취해서 사랑을 나눴던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았다. 그는 곧 나인을 불러와 옷을 갈아입고 난 뒤 자리를 떴고 안시향과는 더는 마주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