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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팜므파탈

  • 매혹적인 말투에 심지성은 흠칫 놀랐다.
  • 공기 속에는 머스크 향처럼 계속 더 맡고 싶은 은은한 향이 풍겨왔고 미친 듯이 심지성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 아직 얼굴을 못 했지만 심지성은 마치 그를 보며 웃고 있는 여우 같은 얼굴을 이미 본 듯했다.
  • 옆에 있는 덩치 큰 남자들도 그 매혹적인 목소리에 눈이 이글거렸지만 이내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심지성은 천천히 돌아섰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몸을 돌려 타고난 매혹적인 분위기와 달기가 살아 있는 듯한 화려한 비주얼을 본 순간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 만약 평소의 윤희원을 속세를 벗어난 흠모하지만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선녀라고 한다면 눈앞에 이 서문아라는 여자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마녀이다.
  • 심지성의 뜨거운 눈빛을 눈치챘는지 서문아의 붉고 윤기나는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갔고 그녀가 다리를 꼬자 검은 치마 속에 감싸져있던 하얗고 늘씬한 다리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 그 순간 그 공간의 공기마저 더워진 것 같았다. 비록 스치듯 봤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겼고 심지성은 눈이 번쩍 뜨였다.
  • “하, 이 여자 정말 요물이었네.”
  • 심지성은 그제야 서문아의 얘기를 꺼냈을 때 그 기사님이 그토록 흥분하면서 열변을 토한 이유가 이해됐다.
  • 심리와 생리적으로 정상적인 남자라면 서문아와 같은 여자 앞에서 어떤 정상적인 남자도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콜록콜록!”
  • 심지성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황급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심지성의 순간 맑아진 눈동자를 본 서문아의 아름다운 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
  •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서문아가 만나본 남자는 부지기수지만,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 그러나 그녀를 본 후 이렇게 빨리 냉정을 되찾는 남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몇 년 전 국내에서 겸손하고 단정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던 성인군자도 그녀 앞에서 본성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 “문아 누나, 내 세 친구가 무슨 일로 누나의 심기를 건드렸을까요?”
  • 지금은 남의 구역에 와 있고 게다가 보아하니 조우빈 삼인방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벌어진 일인 것 같았다. 하여 심지성은 자세를 낮추어 말했다.
  • “흥, 가난뱅이 세 명이 술에 취해 정신줄을 놓았나, 문아관이 어디인 줄 알고 행패를 부려?”
  • “들어와서 이것저것 만져보는 것도 모자라 우리 문아관의 청화자기가 가짜라고 우기고 말이야.”
  • 이번에 말을 한 것은 서문아가 아닌 안경을 쓴 점잖아 보이지만 긴 두 눈에서는 시시각각 음침한 기운을 뿜어내는 젊은 남자였다.
  • “당신은?”
  • “문아관의 담당자 황석이다.”
  • 안경남은 가슴을 치켜들면서 말했고 스스로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 그럴 만도 한 것이 서문아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짜내면서 그녀의 최측근으로 일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나 그 기회는 쉽사리 얻기 어려운 것이다.
  • “그럼 문아 누나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어요?”
  • “6억, 한 푼도 적어서는 안 돼.”
  • 여전히 황석이라는 사람이 심지성을 향해 육이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서문아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주객을 전도하는 황석의 행동이 언짢은 듯했다.
  • “지성아, 저 사람들 말에 속지 마. 그 도자기는 분명 모조품이야!”
  • “이건 공갈이야! 공갈!”
  • 심지성이 말을 하기도 전에 조우빈의 옆에 있던 두꺼운 검은색 뿔테안경에 버섯 머리를 자른 책벌레 냄새가 물씬 풍기는 풋풋한 외모의 남학생이 두 눈을 부릅뜨고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 애티 나게 생긴 남자는 같은 기숙사의 정종문이다. 얼굴은 앳되게 생겼지만 나이는 심지성보다 몇 살이나 더 많다.
  • 심지성 등 다른 사람들은 정종문의 집안 형편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풍기는 느낌으로 보아 아마 학자 집안 출신일 거라고 짐작했다. 처음에 기숙사를 배정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문학적 수준이 높은 어휘를 구사했지만 심지성 등 사람들을 접하고 나서야 교양 있는 불량배가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 “너 이 자식, 계속 함부로 지껄이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
  • 비록 골동품을 취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조품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로 되었다. 그러나 문아관처럼 어렵게 공신력을 쌓은 골동품 가게에서 모조품이 나온다면 그건 가게의 공신력에 치명타를 입히게 될 것이다.
  • 황석은 버럭 소리를 질렀고 주먹을 움켜쥔 채 바로 정종문을 향해 휘두르려고 했다. 심지성은 황급히 손을 뻗어 황석을 막았다.
  • “황 담당자님, 제 친구가 아직 어려서 철이 없고 말주변이 없으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 “6억은 저희가 물어드리겠습니다.”
  • 심지성은 친한 친구인 정종문의 말은 안 믿는 게 아니었고 심지어 그 순간 심지성은 황석의 눈빛 속에서 도둑이 제 발 저려 하는 낌새를 눈치챘다.
  • 다만 지금은 그들의 구역에 있으니 잠시 잠자코 있는 수밖에 없었다.
  • 심지성이 돈을 물어주겠다는 말에 조우빈 삼인방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더욱 짙어졌다. 특히 이를 악문 정종문의 눈빛 속에는 애당초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의 감정이 가득했다.
  • “문아 누나, 제가 배상하기로 했으니 그 청화자기는 이제 제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청화자기의 파편 조각을 저한테 주실 수 있으세요?”
  •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있던 서문아는 심지성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는 요염한 자태로 깔깔 웃었다. 그러고는 손짓으로 사람을 시켜 청화자기의 파편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성은 서문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지만 곁눈질로 시시각각 한 쪽에 있는 황석의 행동을 지켜봤다.
  • 아니나 다를까 서문아가 사람을 시켜 파편 조각을 가져오라고 할 때, 황석의 눈동자에는 자기도 모르게 당황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 게다가 황석의 입꼬리는 비웃듯이 한쪽으로 올라갔다. 그는 심지성을 포함한 풋내기들 몇 명이 골동품에 대해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서문아가 청화자기의 파편을 심지성에게 넘기라고 손짓을 했고 파편을 받아든 심지성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파편 조각을 유심히 살폈고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 이른바 성세에는 골동품을 수장하고 난세에는 황금을 산다는 말이 있듯 심 씨 가문은 한국에서 1위의 재벌 가문으로서 수천 년을 전해 내려온 각종 진기한 보물들이 많았고 여느 박물관과 비겨봐도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 심지성은 어렸을 때부터 갖가지 진기한 보물을 많이 봐왔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보고 들은 게 많으니 심지성도 진짜와 가짜를 식별할 수 있는 예리한 안목을 갖게 되었다.
  • 대충 보았을 뿐인데도 심지성은 정문종의 말이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이 관요의 청화자기는 모조품이 틀림없었다.
  • 낌새는 알아차렸지만 심지성은 정종문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이 일은 문아관의 간판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 서문아는 자신이 어렵게 쌓아올린 신뢰도를 다른 사람이 망가뜨리게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 그는 서문아를 곁눈질로 힐끔 쳐다봤고 여전히 매혹적인 자태로 앉아 있는 그녀를 보니 심지성은 감을 잡았다.
  • “문아 누나, 이 자기는 모조품이 맞습니다.”
  • 심지성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문아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문아는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살짝 일으켜 곧게 앉았고 교태로운 얼굴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반면 황석은 침착하지 못했고 심지성을 손가락질하며 분노를 퍼부었다.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 함부로 지껄이지 마. 오늘 너희들 다 집에 가기 싫은가 보네.”
  • “황 담당자님, 이 자기는 자갈을 사용해 관요를 모방했습니다. 물론 형태는 완벽하지만 아쉽게도 재료 선정에 신경을 안 썼네요.”
  • “이런 형태의 청화자기에 사용된 물감은 아마 그 시절 외국에서 수입한 것일 텐데 아쉽게도 이 도자기의 물감은 분명히 현대 화학제품입니다.”
  • 서문아는 아름다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기분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심지성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반면 옆에 있던 황석의 이마에는 이미 송골송골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 “문아 누나, 만약 믿지 못하시겠으면 감정기관을 찾아 감정해 보면 되잖아요. 이 도자기를 만든 기간은 십 년도 안 됐을 거라고 제가 장담합니다.”
  • 서문아는 여전히 심지성의 말을 받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돌려 황석을 쳐다봤다.
  • 그 순간 서문아 눈동자의 교태로움은 사라졌고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날카로움만 있을 뿐이었다.
  • 몇 초 후, 황석은 서문아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 이곳 사람들은 서문아가 여우처럼 사람의 마음을 홀릴 줄만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서문아와 함께 일을 해 본 사람만이 그녀의 독사 같은 흉악함을 알고 있다.
  • “문아 누나, 내가 잘못했어요!”
  • “내가 귀신에 홀려서…”
  • “데려가.”
  • 서문아가 배신자 황석을 어떻게 처벌할지는 모르지만 두려움에 울부짖는 그의 목소리에서 심지성은 그가 결코 편안한 최후를 맞지는 못할 거라 걸 짐작했다.
  • “동생이 골동품에 일가견이 있을 줄은 몰랐네?”
  • 서문아는 곧 요염한 자태를 되찾았고 볼륨감 넘치는 몸을 순식간에 심지성의 앞으로 가까이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