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2화 사랑에 빠지는 순간

  • 심지성은 호현용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계약서를 읽어보았다.
  • 확실히 차용증이 맞았다. 증거가 확실했으며 사인과 지장이 누락된 곳 하나 없었다. 담연희의 절망적인 표정까지 미루어 보아 거짓이 아닌 게 분명했다.
  • 채무인 담문식은 XX년 3월 1일 호천우에게 천만 원을 빌렸으며, 3개월 이내에 갚는다.
  • 3월 1일, 이미 반년의 시간이 지났다. 현재는 이미 약속한 시간보다 3개월이 더 흘렀다. 연체가 이렇게 길어졌으니 채권자에게 빚을 독촉할 자격은 충분히 있었다. 만약 그 돈을 담연희 본인이 빌린 것이라면 심지성 역시 이렇게 오지랖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 하지만 그 빚은 담연희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런 일에 연루된 무고한 여자아이를 심지성은 그저 지나칠 수 없었다!
  • “천만 원, 맞지?”
  • 잠시 후, 심지성이 담담하게 물었다.
  • “그래, 아까 뭐라고 했어? 대신 갚아 준다고 했지?”
  • 호현용의 조롱은 멈추지 않았다.
  • 심지성은 잠시 침묵했다.
  • “푸하하하, 왜? 꿀 먹었어?”
  • 호현용은 또 한 번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웃자 그의 패거리들도 숨이 넘어갈 듯 웃기 시작했다. 헬스장에서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던 사람들도 저마다 피식거렸다. 웃지 않는 몇몇 사람들 역시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심지성을 쳐다보았다.
  • 답도 없는… 멍청이.
  • 담연희는 작은 입을 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막 솟하올랐던 일말의 기대도 모두 사라졌다.
  • 하지만 담연희는 심지성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천만 원, 적다면 적을 수도 있는 금액이었지만 대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돈은 아니었다. 심지어 생면부지의 사람을 대신해 그 돈을 갚는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 그녀는 심지성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자신을 위해 나서준 유일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 때문에 비웃음을 당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결국 모두 자신 때문이었다…
  • “안 꺼지고 뭐해?”
  • 충분히 웃은 호현용은 얼굴을 찌푸리고 상갓집 개처럼 축 처져서 자리를 뜨기는커녕 오히려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자신의 백팩을 벗는 심지성을 지켜보다가 다시 원래의 흉악한 표정을 되찾았다.
  • 어느 정도의 장난은 귀엽게 넘길 수 있지만 도가 지나친 건 참을 수 없었다.
  • 그의 말이 떨어졌지만 심지성은 동요가 없었다. 마치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처럼 그는 천천히 지퍼를 열었다.
  • “너…”
  • 감히 자신을 무시하는 심지성 앞에서 호현용의 가슴속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 앞에 다가서며 난동을 부리려던 그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그는 마치 목에 무언가 걸린 듯 한참 동안 소리를 내지 못했다.
  • 그는 심지성의 허줄한 백팩에 들어 있는 여러 뭉치의 수표를 분명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 심지성은 손을 가방 속으로 집어넣어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수표 뭉치를 꺼내 호현용에게 던졌다.
  • 호현용은 무의식적으로 심지성이 던진 수표 뭉치를 받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자신의 손에 떨어진 수표 뭉치를 확인한 그는 하마터면 턱이 떨어질 뻔했다.
  • 호현용 뿐만 아니라 그 장면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제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모두들 호현용의 손에 들린 수표 뭉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성에게서 나온 물건이라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 잠시 말을 잃었던 호현용의 얼굴이 전보다 더욱 흉하게 변했다.
  • 심지성을 신랄하게 비웃던 몇 분 전의 자신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지나간 순간의 자신에게 뺨을 후려 맞는 기분이었다.
  • “충분해?”
  • 심지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 “잠깐만… 아니!”
  • 한참 동안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보던 호현용은 별안간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 “이건 본금일뿐이고, 계약 기한을 어겼으니 이자도 줘야지?”
  • “이천! 일전도 빼먹을 생각 마!”
  • 말을 하는 호현용의 눈동자가 살짝 반짝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심지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 “그건 사기야!”
  • 심지성이 말을 하려던 찰나, 뒤에 있던 조우빈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 “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자가 어디 있어, 삼사 개월 사이에 어떻게 두 배로 뛰어!”
  • 정종문도 화를 참지 않았다.
  • “닥쳐! 너희들한테 물었어?”
  • 패거리들이 그들을 에워싸며 압박을 가했다.
  • “틀린 말 했어?”
  • 조우빈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고, 뒤에 있던 유웅휘도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키가 큰 사람이 그들 쪽으로 다가서자 패거리들은 멈칫했다.
  • “그런 계산법이 여기에는 있어, 못 갚을 거면 꺼져!”
  • 조우빈과 정종문의 행동을 보고 심지성이 갚을 수 없다고 확신한 호현용은 주도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싸한 기운을 감지했다.
  • 심지성은 다시 백팩에 손을 넣고 천만 원을 꺼내 호현용에게 던졌다.
  • “이제 됐지?”
  • 심지성은 담담하게 몇 글자를 뱉었다.
  • “됐으면 이제 그거 들고 꺼져.”
  • 사람들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심지성은 갑자기 백팩을 입구가 아래로 향하게 들었다. 수표 뭉치가 가방 속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 “헉!!!”
  • 모든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서 가방 속에서 쏟아지는 수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 4천만 원!
  • 호현용의 손에 들린 것까지 합치면 4천만 원이었다!!
  •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아마 아무도 이렇게 가난한 루저가 메고 있는 허줄한 가방 안에 이런 거금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법한 거금이 적나라하게 땅에 흩어졌다.
  • 만약 호현용이 앞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참지 못하고 땅의 돈을 주우려 달려드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 “부족하면, 여기에 더 있어.”
  • 충격에 빠진 사람들과 달리 심지성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땅바닥에 던져진 것이 돈이 아니라 휴지조각에 불과한 듯 그의 말투에는 기복이 전혀 없었다.
  • 담연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 그는 자신을 위해…
  • 하지만 그가 왜?
  • 설마 그가 나를 좋아하는 걸까?
  •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굴리던 그녀의 심박수가 갑자기 빨라졌다.
  • “너… 나…”
  •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호현용은 이를 갈며 심지성을 노려보았다. 그는 심지성을 삼켜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 “윤 선생님, 어디 가세요?”
  • “도서관에 가서 찾을 자료가 있어서…”
  • 이때, 복도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이 인사하는 소리에 심지성의 눈이 반짝 빛났다.
  • 그 목소리 중 하나가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 “앞으로 조심해!”
  • 호현용은 오래 머무르면 안 되겠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위협하는 말 한마디를 뱉은 후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그의 패거리들도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 심지성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손에 있는 차용증을 빼앗아 구겨 쥐었다.
  • 호현용은 얼굴색이 변하며 화를 내려고 했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심지성을 한번 노려보고 손에 있는 수표 뭉치를 두 몫으로 나누어 주머니에 넣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심지성은 얼른 쪼그려 앉아 땅에 있는 수표들을 주워 백팩에 넣은 후, 지퍼를 닫고 다시 가방을 멨다.
  • 거의 동시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여자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머리에 웨이브를 넣고 검은 뿔테안경을 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바로 심지성 마음속의 여신, 윤희원이었다.
  • 옆에 있는 여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다급한 발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자신을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호현용 무리였다.
  •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윤희원은 호현용 얼굴의 짙은 살기를 눈치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 무리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 “윤 선생님, 안녕하세요.”
  • 심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윤희원에게 인사를 했다.
  • “심지성?”
  • “무슨 일 있었지?”
  • 윤희원은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은 채 엄숙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 “너희들 싸운 거야?”
  • “윤 선생님, 저희는 정의로운 일을 한 것뿐입니다.”
  •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심지성의 눈은 시종일관 윤희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의미심장한 말이 튀어나왔다.
  • 겨우 오후 동안 못 본 것뿐인데 윤희원은 또 예뻐졌다.
  • “정의로운 일?”
  • 윤희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 “네!”
  • 심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 “윤 선생님, 맞아요, 방금… 방금 이들이 저를 호현용에게서 구해줬습니다.”
  • 마침내 정신을 차린 담연희가 그들에게 달려와 설명했다.
  • 담연희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윤희원은 이번에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우빈, 정종문과 유웅휘를 쳐다보았다. 세 사람은 쌀을 쪼아먹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알겠어.”
  • “사람을 돕는 일에 과감히 나서는 건 확실히 정의로운 일이야. 하지만 학교에서는 싸움을 엄하게 금지하고 있어. 설마 손을 댄 건 아니겠지?”
  • 윤희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여전히 선생님의 엄숙함을 지키려 애썼다.
  • 그녀도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호현용의 만행은 선생님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여 심지성을 더욱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주의는 줘야 했다.
  • “당연하죠! 제가 쉽게 손을 대는 나쁜 학생 같습니까?”
  • “윤 선생님 저를 너무 못 믿으시는 거 아니에요?”
  • 심지성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 “알았어, 일단 믿을게.”
  • 윤희원은 심지성의 억울한 표정을 보며 그를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 “헤헤, 감사합니다, 윤 선생님.”
  • 심지성은 귀엽게 웃었다.
  • “역시 착한 선생님께서 용서해 줄 줄 알았어요.”
  • “선생님이 네 친구야?!”
  • 엄격함을 유지하고 있던 윤희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주변 공기마저 싱그럽게 만드는 그녀의 웃음에 보고 있던 남학생들은 모두 넋이 나가고 말았다.
  • 역시 학교 전체가 공인하는 여신 교사였다! 그녀의 수업은 항상 서버를 마비시킬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학생들은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했다.
  • 수강신청이 하늘의 별 따기라 그녀를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 그런데 오늘 그들은 그 여신 선생님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미소까지 직접 목격했다!
  • 이건 그야말로…
  •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