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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난 돈이 많아

  • 그 시각, 윤희원은 홀로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문틈 사이로는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몇몇 남자들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결국 그녀의 예쁜 얼굴에도 절망스러운 표정이 그려졌다.
  • 학자 가문 출신인 윤희원은 비록 부잣집 아가씨는 아니지만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자랐다. 일 년 전, 윤희원의 아버지가 도박 중독에 빠지기 전까지는.
  • 화기애애했던 가정은 곤경에 처했고 집안의 재산은커녕 그녀의 아버지는 몇 천만 원의 사채 빚까지 졌다.
  • 빚을 갚기 위해 윤희원은 해외 유학을 포기했고 석사를 졸업하고는 바로 학교에 남아 강사가 되었다.
  •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윤희원의 적은 월급으로 아버지가 빚진 채무를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윤희원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타고 남은 재처럼 전혀 생기가 없었고 절망만이 서려있었다.
  • 윤희원이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서자 순간 건달기 가득한 세 남자가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욕망 가득한 눈빛으로 윤희원의 몸을 이리저리 훑었다.
  • “윤 선생님, 이건 차용증입니다. 이제 돈을 갚아주시죠?”
  •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입술을 핥으며 손에 들고 있던 차용증을 책상 위에 놓았다.
  • 빌렸던 원금에 이자가 붙어 차용증에는 1억을 훌쩍 넘어선 금액이 적혀 있었다. 윤희원은 가녀린 몸을 부르르 떨었고 외로움과 무력감이 밀려왔다.
  • “며칠만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돈은 어떻게든 구해볼게요.”
  • 정말 몸서리치게 싫었지만 윤희원은 이를 악물고 애원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빚을 받으러 온 세 남자는 윤희원이 이 말을 하기만을 기다린 것 같았다.
  • “윤 선생님,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 “다만 윤 선생님이 보스의 여자가 된다면 이 돈은 갚을 필요가 없다고 우리 보스가 그러더군요.”
  • 남자의 노골적인 모욕에 윤희원은 주먹을 움켜쥐었고 예쁜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 만약 그녀가 몸을 바친다면 1억이 넘는 사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의 몇 배가 되더라도 윤희원을 가지기 위해 지갑을 열 도련님들은 수없이 많다.
  • “윤 선생님, 우리가 시간이 별로 없어요. 아직까지도 결정을 못 하면 우리는 이 일을 학교에 통보하는 수밖에 없어요.”
  • 세 남자는 윤희원이 집에서 사채를 썼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약점을 쥐고 윤희원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 윤희원은 절망 가득한 얼굴로 눈을 감았고 이때, 사무실 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 부랴부랴 달려온 심지성은 저 멀리서부터 사무실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던 그는 바로 문을 열고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 갑자기 튀어나온 심지성으로 인해 사무실 분위기는 굳어졌고 빚을 받으러 온 세 남자는 고개를 들어 못마땅한 눈빛으로 심지성을 쳐다봤다.
  • 고개를 돌려 심지성을 본 순간 윤희원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도 놀라움이 스쳤다.
  • “너 이 자식, 눈치껏 빨리 꺼져.”
  • 일을 키우고 싶지 않은 듯 우두머리 남자는 심지성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
  • “너 빨리 가.”
  • 윤희원도 초조해하며 심지성에게 자리를 피하라고 재촉했다.
  • “윤 선생님, 제가 있으니까 무서워하지 마세요.”
  • 윤희원의 재촉에도 심지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려 윤희원의 앞에 나섰다.
  • “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 “쓸데없는 말이 왜 이렇게 많아, 돈 안 받아 갈 거야?”
  • 심지성은 싸늘하게 웃었고 거침없는 그의 한마디에 남자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 사무실에는 두 번째 정적이 찾아왔고 세 남자는 초라한 심지성의 옷차림을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 비록 심지성이 앞에 나서던 그 순간 윤희원의 가슴은 조금 떨렸지만 등록금조차 내지 못하는 심지성이 그녀를 도와 난관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윤희원조차 믿지 않았다.
  • “난 또, 대학생들은 얼마나 대단한 줄 알았더니만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건 똑같구나!”
  • “그만 지껄이고, 윤 선생님이 진 빚이 얼만데?”
  • “원금에 이자까지, 총 1억 6천만!”
  • 세 남자도 꾀죄죄한 차림의 심지성이 어떻게 미인을 구하는 히어로의 역할을 계속 연기해 나갈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 윤희원의 놀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심지성은 메고 있던 허름한 책가방 안에서 스무 다발의 새 지폐를 꺼낸 뒤 가방을 집어던졌다.
  • 가방은 세 남자의 앞에 떨어졌고 가방 안에 있던 지폐 뭉치는 흩어져 밖으로 흘러내렸다. 책상 한가득 펼쳐진 신사임당의 초상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 빚을 받으러 온 세 남자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달려들어 그 지폐들을 줍기 시작했다.
  • “자식, 네가 잘났다!”
  • “차용증!”
  • 심지성이 바보일 리가 있겠는가, 그는 손을 뻗어 우두머리 남자를 가로막았다.
  • 심지성이 차용증을 윤희원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그제야 이 충격적인 장면에서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 그러나 정신을 차린 후 윤희원의 기분은 오히려 복잡해졌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특히 좀 전에 사무실에서 자신이 제멋대로 심지성을 대신해 학비를 내준 일이 생각났다.
  • 윤희원은 속았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 “윤 선생님, 차용증 잘 챙기세요.”
  • 심지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희원은 그제야 차용증을 받아 들었고 머리를 숙인 채 모기처럼 가는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 “윤 선생님도 아까 날 도와주셨으니까 우리 이제 서로 빚진 거 없는 거예요!”
  • 윤희원의 비할 바 없이 예쁜 얼굴에 심지성도 마음이 떨리는 건 사실이지만 이번에 윤희원을 도운 건 그가 그녀에 대한 고마운 마음 때문인 건 분명했다.
  • “아니야, 이 돈은 내가 최대한 빨리 돌려줄게.”
  • 만약 원칙과 선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면 윤희원은 이제 채무에서 해방됐을 것인데 말이다.
  • 윤희원의 진지함 가득한 얼굴 표정에 심지성도 윤희원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크디큰 사무실에 윤희원과 심지성만 남게 되자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졌다.
  • 다행히 결정적인 순간에 심지성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 “우빈 형, 무슨 일이야?”
  • “지성아, 웅휘랑 애들이 오늘 임페리얼에 가서 네 돈을 탕진할 거라니까 각오해.”
  • 전화기 너머로 조우빈 삼인방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임페리얼은 경영대 주변에 있는 최고급 레스토랑이고 대충 먹은 한 끼 식사에도 몇 십만 원이 든다.
  • 비록 세 사람이 입으로는 심지성의 돈을 탕진할 거라고 말했지만 설령 오늘 밤 그가 계산을 할 돈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와 함께 남아 설거지를 함께해 줄 사람이라는 걸 심지성은 알고 있다.
  • “콜, 형들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어. 나도 곧 갈게.”
  • 전화를 끊은 뒤 심지성은 그제야 윤희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고 뜻밖에도 윤희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마침 나도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었어. 내가 데려다줄게.”
  • 경영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짜고 심지어 거액의 돈을 들여서라도 윤희원의 차를 타고 싶어 한단 말인가.
  • 이 절호의 기회를 바보가 아닌 이상 심지성이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 경영대에서 임페리얼까지의 거리는 차로 십 분 남짓 거리로 멀지 않았고 윤희원은 오로지 운전에만 열중했다.
  • 반면 심지성은 계속 윤희원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몰래 훔쳐보았고 네 눈동자가 우연히 마주치자 차 안의 분위기도 갑자기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 임페리얼 입구에 막 도착하고 아직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심지성은 멀리서 조우빈 삼인방이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문밖에 가로막혀 있는 것을 보았다.
  • 시끌벅적 싸우는 소리도 덩달아 들려왔다. 사람들 속에는 사악하게 웃고 있는 진기석의 모습이 보였고 심지성의 눈빛도 싸늘해졌다.
  • “진기석, 넌 너무 안하무인이야!”
  • 조우빈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왜 소란을 피워, 돈도 없는 주제에 여자랑 어떻게 놀려고?”
  • 사실 조우빈 삼인방은 심지성 몰래 논의를 했다. 기숙사에서 이성관계가 가장 좋은 조우빈이 앞장서서 같은 과의 다른 여자 기숙사에 있는 여자를 몇 명 불러와 이 기회에 심지성이 일찌감치 실연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도우려는 계획이었다.
  • 임페리얼에 밥 먹으러 간다는 말에 그 여학생들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허락했다.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임페리얼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진기석과 마주쳤다. 오늘이 마침 전여울의 생일이었고 진기석은 전여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어중이떠중이 친구들도 적잖게 초대했으며 임페리얼을 통째로 빌리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 그는 심지성을 망신 주려는 게 뻔했다. 진기석은 오늘 밤 임페리얼은 그가 통째로 빌렸으니 여자들은 공짜로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진기석이 학교에서 유명한 재벌 2세들을 적지 않게 초대한 탓에 조우빈이 어렵게 데리고 나온 여자 네 명의 눈에서는 빛이 반짝거렸다. 그녀들은 오늘 밤 전여울처럼 부자 남자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에 불을 켰다.
  • 윤희원 차 안,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 파악이 된 심지성은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었다.
  • 차에서 내린 심지성은 조우빈 삼인방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심지성이 등장하자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됐지만 조우빈 삼인방을 제외하고는 전부 심지성이 진기석에게 모욕을 당하는 걸 지켜보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