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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라이브 PK

  • “나 여신 보러 가야 하니까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 심지성의 얼굴에는 바로 행복이 들어찼다. 그는 침대에서 이어폰을 찾아 연결한 뒤 그대로 이불 위에 엎드려 지체 없이 라이브 방송을 클릭했다. 조우빈을 비롯한 친구들은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났다.
  • “…”
  • 그 광경에 조우빈, 정종문, 유웅휘는 할 말을 잃었다.
  • 수명이 거의 다하기 직전인 핸드폰은 앱을 실행하기까지의 속도가 눈물 겨울 정도였다. 심지성은 핸드폰 화면에 띄워진 앱의 실행 페이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10여 초나 지나서야 페이지가 넘겨지고 한참의 로딩을 거친 후 겨우 동영상 하나가 그의 앞에 재생될 수 있었다.
  • 심지성은 얼굴이 다 굳어졌다. 얼른 윤여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이리도 오래 기다리게 하다니.
  • 심지성은 손에 들린 이 고물이나 다름없는 벽돌 같은 기계를 당장이라도 바꿔버리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 일렁였다.
  • 다행히도 바로 다음 부드럽고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심지성의 귓가에 들려왔다. 조급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진정이 되었다.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은은한 웃음이 지어졌다.
  • “아!”
  • 바로 이때, 노랫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이윽고 윤희원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심도령 왔네. 어서 와!”
  • 말이 끝나자마자 채팅 창도 함께 들끓기 시작했다.
  • “심도령 떴어!!”
  • “어서 와, 우리의 큰손 심도령!”
  • “환영! 환영!”
  • 채팅 창 가득 자신을 환영하는 사람들을 보며 심지성은 콧등을 매만졌다. 오늘 점심 임소한과 한바탕 다툼을 한 것이 자신을 윤희원의 라이브 방송의 유명인으로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 심지성은 몰랐다. 오늘 점심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특별히 그를 보러 온 사람이 윤희원을 보러 온 사람들보다 이 라이브 방송에 더 많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은 심지성은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바쁘게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두드리자 이내 채팅 창 상단에 후원 메시지 창 하나가 떴다.
  • “희원 크리에이터 님께: 심도령 별풍선 30000개 선물!”
  • “별풍선 고마워, 심도령!”
  • 임희원의 달달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 심지성은 미소를 띤 채 메시지를 작성해 전송 버튼을 눌렀다.
  • “응원해요, 여신 파이팅!”
  • “응응.”
  • 윤희원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배경 음악이 흐르고 청아한 목소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한 곡이 끝나자 채팅 창은 다시 달아올랐다.
  • “다들 응원 고마워. 마음에 들었다면 잊지 말고 희원이한테 후원 부탁해!”
  • 윤희원이 애교스럽게 말했다.
  • “또 듣고 싶어. 한 곡 더 불러줘!”
  • “여신 한 곡 더.”
  • 이때 아직 흥이 다하지 않은 많은 시청자들이 채팅 창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 “알겠어, 알겠어!”
  • 윤희원은 그런 반응에 당연히 그들의 요구를 져버리지 않고 기꺼이 응했다.
  • “근데 나 갑자기 뭘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 다들 듣고 싶은 곡 있어?”
  • “인연!”
  • “너를 만나.”
  • “10cm의 그라데이션”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노래들을 채팅 창에 전송하기 시작했다.
  • “음…”
  • 저마다 듣고 싶은 노래가 다른 듯한 채팅 창에 윤희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 “맞다, 아니면 이렇게 하자!”
  • 윤희원은 갑자기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입을 열었다.
  • “심도령한테 한 곡 고르라고 하는 거야.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때?”
  • “그래도 되지.”
  • “좋아, 심도령한테 고르라고 하자.”
  • “상관없어.”
  • “난 찬성.”
  • ……
  • “오케이, 다들 의견 없으면… 그럼 심도령은 뭐가 듣고 싶어?”
  • “저요?”
  • 윤여신의 질문에 심지성은 관심을 받아 좋으면서도 조금 얼떨떨하여 얼른 곡을 생각해냈다.
  • “그럼 윤하의 불러주세요.”
  • 금방, 심지성은 메시지 하나를 작성하여 전송했다.
  • “알겠어!”
  • 윤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브 방송에는 부드러운 기타 선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서 윤희원의 청아하면서도 조금은 슬픔이 묻어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 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 심지성은 천천히 눈을 감고 윤희원이 자신을 위해 부르는 곡을 조용히 감상했다.
  • 윤희원은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음악적 재능마저 뛰어났다. 그저 단순히 커버 곡을 잘 부르는 게 아니라 부르는 동시에 그 곡의 감정, 분위기까지 전부 전달해 주었기에 듣는 이로 하여금 완전히 그 곡에 몰입하여 그 곡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 “하나 둘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가사가 흘러나오고 배경 음악도 서서히 멈췄다. 곡이 끝났다.
  • “여신 목소리에 고막 녹을 뻔.”
  • “윤여신 최고야!”
  • “심도령, 우리 희원 여신이 신청 곡을 불러 줬는데 무슨 표시 같은 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 “맞아, 맞아. 심도령 얼른 성의를 보여.”
  • “별풍선 한번 쏘자.”
  • 사람들의 아우성에 심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별풍선을 보냈다.
  • “심도령 별풍선 14000개 선물!”
  • “심도령 별풍선 9000개 선물!”
  • “대박, 역시 큰손.”
  • “완전 쩔어.”
  • “고작 노래 한 곡에 별풍선 2만 몇 개라니, 저 사람 부자야?”
  • 금방 라이브 방송에 참여한 사람이 채팅으로 물었다.
  • “이건 아무것도 아님. 오늘 점심을 못 봐서 그래. 몇 천만을 그냥 장난인 것처럼 선물함.”
  • “뭐? 미쳤다! 그렇게 대단하다고?”
  • ……
  • 연달아 두 곡을 부르며 분위기를 띄운 덕에 라이브 방송 분위기도 점차 좋아졌다. 윤희원은 바로 이어 노래를 계속하는 대신 시청자들과 있는 말,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 바로 이때 윤희원은 갑자기 낯선 알림 하나를 받았다.
  • 합방 요청?
  • 합방은 크리에이터 사이에서 자주 쓰는 인기를 끄는 수단으로 각종 라이브 방송 플랫폼에서 성행하고 있었다.
  • 그러나 윤희원의 방송의 인기는 줄곧 너무 핫하지도 너무 미지근하지도 않은 상태에 처해있었다. 필경 이런 플랫폼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방송을 하는 크리에이터는 아주 드물었고 잘 먹히지도 않았기에 그녀를 주목하는 크리에이터들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합방 요청은 더욱 말할 바 없었다.
  • 그러나 오늘 심지성은 이 방송에 몇 천만 원을 후원했고 덕분에 윤희원의 방송은 일간 순위 1위를 기록했다. 막 물이 차오르는 시기였기에 이 신비로운 신인을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건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 그러나 윤희원을 놀라게 한 건 이 합방을 요청한 크리에이터가 천우연이란 사실이었다.
  • 그녀는 플랫폼 인기 방송 톱10권 안에 항상 상주해 있는 톱 크리에이터였다!
  • 무의식 적으로 수락 버튼을 누르자 방송 화면이 둘로 나누어졌다. 왼쪽엔 윤희원, 오른쪽에는 완전히 다른 화면이 나타났다.
  • “천우연이다!!”
  • “와 씨, 천우연이 오다니!”
  • “천우연!”
  • “천우연!!”
  • “우연이 왜 이 방송에 나타나?”
  • 분주해진 채팅 창 뒤로 화면에는 화면 로딩이 완료되었다는 안내 문구가 나타났다. 이윽고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오프숄더 니트를 입은 인스타 여신 같은 얼굴이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 카메라를 향한 그녀의 인사 한 번에 채팅 창은 또 한 번 “천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도배됐다. 마치 톱 연예인이라도 등장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 “천우연?”
  • 심지성이 중얼거렸다. 이 크리에이터가 몰고 온 인기에 놀라 살짝 멈칫했다.
  • 이 여자는 누구지? 인기가 이렇게나 많다고?”
  • “천우연? 지성아, 너 방금 이 이름 말한 거 맞아?”
  • 이때 옆 침대에서 게임을 하던 정종문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 “응. 종문아, 너 이 사람 알아?”
  • 심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 “당연히 알지! 톱 크리에이터잖아. 인기 정말 많아. 왜? 지성이 너도 그 방송 보는 거야? 어때, 엄청 이쁘지?”
  • 정종문이 눈을 접어 보이며 음흉하게 웃었다.
  • “…”
  • 뭐 그저 그렇네.
  • 심지성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화면에 비친 SNS에 널린 듯한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비방했다.
  • 희원이보다 한참 아래네.
  • 윤희원이 얼굴을 내놓고 방송하기를 꺼려 하지만 않았다면 이 천우연은 아마 지금 이 인기를 누릴 수 없을 것이었다.
  • “아! 오늘 별풍선 랭킹 1위의 희원 크리에이터 맞으시죠? 정말 연결됐네요. 안녕하세요!”
  • 바로 이때 이어폰을 통해 천우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천우연 님 안녕하세요!”
  • 윤희원도 사랑스럽게 대꾸했다.
  • “음… 갑자기 별풍선 랭킹 1위로 오르신 희원 크리에이터 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왜 사람들에게 얼굴을 안 보여주시는 거예요? 여러분도 희원 크리에이터 님 어떻게 생겼는지 다들 궁금하시죠?”
  • 천우연의 궁금하다는 듯 웃음을 띤 채 한마디 물었다.
  • 순식간에 채팅 창에는 그에 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대부분은 얼굴 공개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 핸드폰 앞의 심지성은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는 천우연을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 이 여자 겉으로는 웃으면서 사람 좋은 척해도 방금 그 말은 의심의 여지없이 윤희원을 난처하게 하기 위해 한 말이 분명했다.
  • 고의적인 것인지 의도치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네? 저는 줄곧 이렇게 방송을 해왔는걸요. 시청자분들도 제 목소리가 좋아서 제 방송에 들어오신 거니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 윤희원이 답했다.
  • “뭐예요! 희원 크리에이터 님도 참 너무하시다. 시청자분들에게 얼굴 한 번 비추기 그리 어려워요?”
  • 천우연이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뾰로통한 척 굴었다.
  • “…”
  • 할 말이 없어진 윤희원은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 방금 찌푸려진 심지성의 미간은 더욱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냈다. 처음에 한 말은 그저 의도치 않고 한 말이라 넘길 수 있었지만 방금 그 말은 일부러 윤희원을 난처하게 하려 하는 게 분명했다.
  • 보아하니 오늘 자신이 윤희원을 일간 랭킹 1등으로 만든 게 누군가의 질투를 부른 모양이다.
  • “됐어요, 됐어요. 그럼 이렇게 하죠? 희원 크리에이터 님께 PK를 요청합니다. 만약 제가 이기면 희원 크리에이터 님이 얼굴을 공개하시고 만약 제가 지면 크리에이터 님이 하라는 대로 따를게요. 어때요? 전 그저 희원 크리에이터 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서 청하는 건데 이런 기회마저 안 주실 건 아니죠?”
  • 천우연이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 여전히 웃음을 생글생글 띠고 있었지만 뱉는 말에는 이미 강요 아닌 강요가 담겨있어 윤희원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했다.
  • “그게…”
  • 윤희원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응하기도 거절하기도 애매한 진퇴양난의 기로에 놓였다.
  • 크리에이터 PK란 일정한 시간 내에 양측이 각종 방식으로 경쟁을 진행하여 그 시간 안에 누가 팬들로부터 더 많은 별풍선을 받으면 누가 이기는 콘텐츠를 가리켰다. 진 쪽은 이긴 쪽의 벌칙 하나를 수행해야 했다.
  • 보통 이런 PK를 진행하는 건 플랫폼 내에서 인기가 비슷한 크리에이터끼리였다. 그러나 천우연은 일 년 내내 인기 톱 10을 지키는 잘나가는 크리에이터였고 윤희원은 이렇다 할 뭐가 없는 어디 가서 말하기도 뭣한 그런 수준이었기에 양측의 역량은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다.
  • 만약 그저 선의의 배틀이라면 윤희원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필경 이렇게 유명하고 인기 많은 크리에이터와 PK를 진행하는 건 자심 채널의 인기를 올리는 데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 그러나 하필 상대가 제시한 조건이 윤희원을 하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 “받아들여!”
  • “희원아, 배틀해!”
  • “희원아, 겁내지 마. 우리에겐 심도령이 있어.”
  • “받아들여, 받아들여!”
  • 채팅 창에게는 미친 듯이 채팅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윤희원으로 하여금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만약 자신이 거절하기라도 한다면 반드시 팬들의 불만을 살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팬들이 대거 떨어져 나갈지도 몰랐다.
  • 어떡하면 좋지!
  • 윤희원이 한창 갈등으로 손에 땀이 다 찰 때 다이렉트 메시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심도령에게서 온 것이었다.
  • [희원 님, 받아들이세요.]
  • [괜찮아요, 제가 절대 지게 하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