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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경영대 여신

  • 억지 미소를 쥐어 짜내며 심지성은 옆에 대기하고 있던 은행 지배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 “2억 현금 인출해 주시고 이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전부 얼마나 되는지 대신 확인해 주세요!”
  • 곧 은행의 추산 결과가 나왔고 심지성의 금고에 들어있던 물건들의 가치는 이미 200억을 넘어섰다.
  • 심사 규칙에 따라 심지성은 반드시 이 돈으로 일 년 안에 2,000억의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
  • 말도 안 되는 심사 규칙에 심지성은 마음속으로 몇 마디 욕설을 퍼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 “심지성 씨, 인출하라고 하신 2억 원 현금입니다!”
  • 눈앞에 작은 산더미를 이룬 현금을 본 조우빈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행여라도 손을 놓으면 부자 친구를 잃기라도 하는 듯 시종일관 심지성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 “제 가방에 넣어주시겠어요?”
  • 십분 뒤, 허름한 책가방에 2억 현금을 담고 나서야 심지성과 조우빈은 시티은행을 나왔다.
  • 돌아가는 길에 심지성은 오히려 덤덤해 보였지만 조우빈은 마치 보디가드처럼 굳은 얼굴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심지성의 뒤를 따랐다.
  • “우빈 형, 왜 이렇게 경계 상태야?”
  • “여긴 도둑이 많아!”
  • 조우빈의 진지한 표정에 심지성은 못 말린다는 듯 웃었지만 마음속은 따뜻해졌다.
  • “가자, 등록금부터 내자!”
  • “저녁에 우리 브라더들이랑 술 한잔해야지!”
  • 심지성은 손을 뻗어 조우빈에게 어깨동무를 하고는 앞머리를 휘날리며 2억 원을 등에 메고 성큼성큼 학교로 걸어갔다.
  • 기숙사 입구에 도착한 심지성과 조우빈이 막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직한 외모에 까무잡잡한 남학생이 초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지성아, 우빈이 형, 왜 이제야 왔어!”
  • “좀 전에 마왕한테서 너한테 빨리 등록금을 내라는 재촉 전화가 왔어. 더 지체하면 제적 처리를 할 거라면서 말이야.”
  • 다급하게 말을 전하는 이 남학생의 이름은 유웅휘이다. 지방 출신에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으며 의리 빼면 시체인 사내이다. 평소 기숙사 친구들이 다툼에 휘말리면 대부분 맨 앞에 앞장서서 주먹을 막아주는 사람이 바로 유웅휘이다.
  • “마왕은 돈독이 오른 게 분명해. 십중팔구 진기석 그 자식이 뒤통수를 친 걸 거야.”
  • 조우빈은 주먹을 불끈 쥐고 울분을 토하며 한마디 내뱉었다.
  • 두 사람의 입에서 거론된 마왕은 바로 심지성 등 사람들의 튜터인 허윤철이다. 비록 선생이기는 하지만 학교에서는 명실상부한 속물로 소문이 자자하다.
  • 반에 가정 형편이 우월한 학생이 있으면 허윤철은 어떻게 해서든 온갖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 진기석이 반장으로 뽑힐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 “지성아, 나한테 20만 원 정도 생활비가 남았는데 많지는 않지만 가져가서 먼저 급한 불부터 꺼. 나머지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마련해 볼게.”
  • 유웅휘의 말에 심지성은 코끝이 찡해졌다.
  • “웅휘야, 지성이는 이제 재산이 몇백억도 넘는 부자야, 돈 걱정 안 해도 돼!”
  • 심지성이 입을 열기도 전에 조우빈은 근질근질한 입을 참지 못하고 흥분하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침을 튀기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는 일말의 질투도 없었고 오로지 심지성을 대신해 기뻐하는 마음만이 엿보였다.
  • “됐어, 난 먼저 마왕한테 다녀올 테니까 우리는 저녁에 술이나 마시러 가자.”
  • 등록금이 자주 밀렸던 탓에 허윤철은 일 년 내내 심지성을 골탕 먹였다. 그 장면들이 떠오르니 심지성의 안색도 음산해졌다.
  • 삼십 분 후, 튜터 사무실.
  • 심지성은 여전히 그 허름한 가방을 멘 채로 허윤철의 책상 앞에 섰다.
  • “허 선생님, 절 찾으셨다고요?”
  • 얼굴에 살이 오른 허윤철은 의자에서 몸을 바로 앉았고 고개를 들어 심지성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 “심지성, 너 등록금 안 내고 대체 언제까지 버틸 작정이야? 이젠 낼 때도 되지 않았어?”
  • “선생님도 학교에 설명하기 난처해 죽겠어. 우리 학교는 자선단체가 아니야.”
  • 매몰찬 말은 아니었지만 허윤철은 한 마디 한 마디 속사포처럼 몰아붙였고 거침이 없었다.
  • 그 시각 사무실에는 허윤철 외에도 젊은 여강사가 앉아 있었다.
  • 여강사는 스물대여섯 정도로 보였고 물결 웨이브를 한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늘어뜨렸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세련된 이목구비까지 매치하니 요즘 국내에서 제일 핫한 미녀 스타 못지않은 미모를 자랑했다.
  • 특히 여강사가 착용한 검은색 뿔테안경은 그녀의 지적인 이미지를 남김없이 드러냈다.
  • 허윤철의 윽박지르는 태도는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강사는 초라한 옷차림의 심지성을 곁눈질로 바라보았고 얼굴에는 안쓰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 반면 허윤철은 심지성이 말이 없자 무의식적으로 그가 위축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 허윤철의 눈동자에는 사악함이 스쳐 지나갔고 심지성의 체면을 제대로 구기게 하려고 몰아붙이려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여강사가 입을 열었다.
  • “허 선생님, 고작 등록금 때문에 학생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는 건 좀 지나친 것 같네요.”
  • 그녀의 가벼운 목소리는 유난히 듣기 좋았다. 심지성은 기숙사의 몇몇 좋은 친구들을 제외하고 이 학교에서 또 누군가가 자신의 편에 서주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고개를 들어 여강사의 얼굴을 본 심지성은 눈이 번쩍 뜨였다.
  • 경영대에는 강사, 튜터, 교수가 수천 명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단연 윤희원이다.
  • “윤 선생님, 이건 저희 반 일입니다. 선생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 윤희원이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던 지라 허윤철도 말을 심하게 하지는 못했다.
  • “감사합니다, 윤 선생님!”
  • 한 번 초라해지지 않으면 어쩌면 곁에 있는 사람 중 누가 좋은 사람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 그녀는 심지성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윤희원은 심지성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허윤철과 꾀죄죄한 옷차림을 한 심지성을 번갈아 보고는 몸을 일으켜 심지성 옆으로 다가갔다.
  • 늘씬한 비율의 윤희원은 심지성의 옆에 서도 머리 하나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 옆에 있는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미모의 여강사에게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건 뻔한 거짓말일 것이다.
  • 윤희원의 몸에서 풍기는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향기에 심지성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허 선생님, 이 학생 등록금 얼마나 밀렸죠?”
  • 윤희원의 덤덤한 말에 놀란 건 허윤철뿐이 아니었고 심지성도 어리둥절했다.
  • 윤희원이 끼어들자 허윤철의 안색도 몹시 어두워졌고 심지성을 사납게 노려보고 나서야 이를 갈며 한마디 내뱉었다.
  • “기숙사 비용 포함 총 삼백만 원이에요!”
  • “마침 그 돈이 저한테 있네요.”
  • 심지성의 당황스러워하는 눈빛을 뒤로하고 윤희원은 가방에서 돈뭉치를 꺼내 허윤철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 곧 심지성을 퇴학 시킬 수 있었던 악랄한 계략이 윤희원에 의해 파괴되자 허윤철은 이가 갈렸다. 그러나 하늘의 별처럼 많은 윤희원 추종자들이 학교에 있는 한 허윤철은 증오의 시선을 심지성에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
  • “윤 선생님…”
  •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 윤희원은 심지성에게 당부의 말 한마디만 남기고 몸을 돌려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돈으로 허윤철을 망신 주려던 목표가 윤희원 때문에 망가지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심지성은 마음속 깊이 윤희원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 정신을 차린 심지성은 황급히 그녀를 뒤쫓아갔고 계단 입구에 다다랐을 때, 모퉁이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윤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심지성은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곧바로 들려오는 통화 내용을 듣는 순간 심지성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윤 선생님, 아버지께서 진 빚, 이젠 갚으셔야죠?”
  • “우린 선생님 사무실에서 죽치고 있을 테니까, 오늘 돈을 갚지 않으면 우리가 이 일에 대해 떠벌려도 우리 탓은 하지 마세요.”
  • 윤희원의 예쁜 얼굴에 현실에 시달리는 쓸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 윤희원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심지성은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 윤희원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심지성은 싱숭생숭 마음이 복잡했다.
  • 사무실!
  • ‘그 자식들이 지금 사무실에서 윤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잖아. 안 돼, 내가 가봐야겠어!’
  • 윤희원이 홀로 위험하게 사무실로 향했다는 생각이 번쩍 든 심지성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책가방을 멘 채 윤희원의 사무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