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6화 작은 비밀

  • “헐, 이건 무슨 상황이야!”
  • 심지성은 어안이 벙벙한 채 소녀 냄새가 물씬 풍기는 침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는 마치 혜성이 지구에 충돌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 심지성이 아직 어젯밤 자신이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한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덮침을 당한 건지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그때, 옆방에서 은은하고 듣기 좋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더 소름인 건 심지성은 그 노랫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 “망했다. 나 심도령이 평생의 명성이 설마 이렇게 무너진단 말인가?”
  • 조심스럽게 옷을 입은 심지성은 그제야 슬금슬금 더듬으며 침실을 나섰다.
  • 옆방에 문 앞에 도착한 그는 문틈 사이로 방 안을 힐끔 들여다보았고 너무 놀라 하마터면 바닥에서 펄쩍 뛸 뻔했다.
  • 옆방의 서재에는 평소 경영대에서는 늘 도도해 보였던 냉미녀 윤희원이 지금 마이크를 대고 부드럽게 노래하고 있다.
  • 게다가 두 손을 맞대고 즐거운 얼굴로 로켓을 쏜 오빠, 요트를 선물한 오빠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 윤희원이 라이브를?
  • 비록 널리고 널린 게 인플루언서들이고 누구나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시대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는 게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냉미녀 윤희원이 미녀 스트리머로 변신한 모습에 심지성은 신대륙을 발견한 만큼이나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 “헐, 윤 선생님한테 이런 면도 있을 줄이야!”
  • 몰래 안을 들여다보던 심지성은 실수로 문밖에 있는 휴지통에 부딪혔다.
  • 문밖에서 나는 소리는 순식간에 윤희원의 주의를 끌었다. 심지성은 윤희원이 허둥지둥 헤드셋을 벗고 라이브 화면까지 끄는 것을 보았다. 보아하니 윤희원은 자신이 스트리머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 “망했다!”
  • 심지성은 나지막하게 탄식을 내뱉고는 황급히 몸을 돌려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 금방 술에서 깬 듯한 표정을 지었다.
  • 심지성의 연기가 리얼해서인지, 아니면 윤희원이 단순해서인지 방에 들어와 막 잠에서 깬 모습의 심지성을 본 윤희원은 눈을 몇 번 깜박였고 예쁜 얼굴에는 ‘어색’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 “아!”
  • “윤 선생님, 제가 왜 여기 있어요?”
  • 지금 이 순간 심지성의 오버스러운 연기가 빛을 발했고 놀란 토끼 눈을 뜬 그의 표정은 윤희원의 얼굴에 어색함을 더했다.
  • “어젯밤에 임페리얼을 지나다가 네가 술을 많이 마시고 길가에서 자고 있길래 내가 데려왔어!”
  • 얘기를 안 꺼냈을 땐 괜찮았는데 얘기를 꺼내고 나니 윤희원의 눈동자에 수줍음이 스쳐 지나갔다.
  • 특히 어젯밤 심지성이 술에 취한 채 오빠한테 웃어보라느니 돈이 많다느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윤희원은 그를 다시 길가에 내던져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주사가 인성만큼 믿음직하다고 자부해오던 심지성의 얼굴에도 순간 뻘쭘함이 드러났다.
  • “고마워요, 윤 선생님!”
  • “됐어, 서둘러 학교에 수업 들으러 가.”
  • 윤희원이 축객령을 내린 마당에 아무리 뻔뻔스러운 심지성일지라도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는 없었다.
  • 현관문 앞으로 걸어간 심지성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윤희원의 방을 향해 힐끔 보았고 입가에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 “379458!”
  • 그는 작은 목소리로 몇 개의 숫자를 중얼거렸고 그건 다름 아닌 윤희원의 라이브 방 번호였다.
  • “인터넷에서의 윤 선생님은 어떤 모습일까?”
  • 평소 차갑고 엄숙한 윤희원이 컴퓨터 앞에 앉아 라이브 시청자들을 앞에 두고 핫한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모습을 생각하니 심지성은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 윤희원의 숙소에서 나온 심지성은 가는 길 내내 어젯밤 경영대 최고의 여신인 윤희원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리를 쥐어짜내며 기억을 되새겼다.
  • “아 맞다, 다른 형들은?”
  • 심지성이 어젯밤 친구들이 길거리에서 잠든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던 그때, 조우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여보세요, 우빈 형, 형들 어디 갔어?”
  • “다들 괜찮지?”
  • 어젯밤은 심지성의 일 년 동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날일 뿐만이 아닌 조우빈 삼인방도 기를 편 날이라 네 사람 모두 과음을 했다.
  • “지성아…”
  • 겨우 두 글자를 뱉었는데 심지성은 전화기 너머로 전해져오는 떠들썩한 소리를 들었다.
  • 큰일이 났다는 심상치 않은 예감이 엄습해왔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익만 추구하는 과시욕 넘치는 전 여자친구보다 의리를 지키는 조우빈 삼인방이 심지성에게는 더욱 소중했다.
  • “우빈 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미안해 우진아. 우리가 또 사고를 쳐서 널 곤란하게 할 것 같다.”
  • 조우빈의 말투에는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어젯밤 필름이 끊긴 후, 심지성만 영문도 모른 채 길가에서 윤희원에 의해 그녀의 집으로 간 것이 아닌 조우빈 삼인방에게도 약간의 사고가 있었던 것 같았다.
  • 전화기 너머로 한바탕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조우빈에게 무언가를 배상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 “여보세요, 친구 셋이 강에 던져져 물고기 밥이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6억 챙겨서 송림가 문아관으로 와!”
  • 이번에 들려온 건 조우빈의 목소리가 아닌 거칠고 난폭한 남자 목소리였고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 송림가는 현지에서 가장 이름난 골동품 거리로 비록 서울의 판가원에는 못 미치지만 그 안의 세력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좋은 사람, 나쁜 사람들이 함께 뒤섞여 사는 곳이다.
  • 조우빈 삼인방이 어떻게 송림가까지 갔는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는 심지성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곧바로 송림가로 향했다.
  • “기사님, 문아관으로 가주세요. 빨리 좀 부탁드려요.”
  • “젊은이, 자네도 문아관 마담인 서문아를 꼬시러 가는 건가?”
  • 심지성은 순간 멈칫했고 이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을 구하러 가는 건데 여자를 꼬시러 간다니?
  • 게다가 서문아라는 여자가 윤 선생님보다 예쁠 리가 있겠는가?
  • 서문아의 이름이 언급되자 택시 기사님은 말문이 트였는지 그 여자에게 무장해제된 사람처럼 쉬지 않고 말했다.
  • 서문아라는 여자는 골동품을 감별하는 고서를 토대로 자수성가했고 송림가에서 그녀만의 세상을 이뤄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심지성은 마음이 살짝 움직였다.
  • 심사 규칙에 따라 일 년 내에 열 배의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금뿐만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이다.
  • 택시 기사님을 통해 전해 들은 서문아라는 여자는 심지성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자, 특히 젊은 여자가 자수성가하여 송림가라는 복잡한 곳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이뤄냈다는 건 절대적인 능력자 여야만이 가능한 것이다.
  • 반면 서문아는 피부가 희고 예쁘며 여우처럼 매혹적으로 사람을 유혹한다는 말에 대해서 심지성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 우연히 경영대 최고의 여신 윤희원 선생님과 접촉이 있은 후로 심지성은 점점 존경스러운 윤 선생님만이 인생 궁극의 여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심지성도 굳이 윤희원의 라이브 방 번호를 머릿속에 새기지 않았을 것이다.
  • 십분 뒤, 송림가 입구. 심지성은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웅장한 문아관을 바라보았고 마음속에 서문아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갔다.
  • 문아관 입구에는 차갑고 준엄한 남자 두 명이 철통방어를 하고 있었고 긴장된 분위기가 엄습해왔다.
  • “뭐 하는 놈이야?”
  • 입구에 발을 내딛자마자 심지성은 문을 지키는 두 남자에게 저지당했다.
  • “친구를 데리러 왔어요.”
  • “날 따라와.”
  • 설령 조우빈 삼인방이 진짜로 송림가의 거물급인 문아관을 건드렸다 하더라도 오늘 심지성은 그 세 사람을 모른 척 내버려 둘 수는 없다.
  • 방 안에 들어서니 밧줄에 꽁꽁 묶인 채 구석에 버려진 조우빈 삼인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심지성이 온 것을 본 세 사람의 본래 창백하고 잔뜩 겁을 먹었던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이 드러났으나 이내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 “우빈 형, 형들 괜찮아?”
  • “미안해, 지성아.”
  • 심지성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으려던 그때, 누군가 하이힐을 신고 나무 바닥 위를 걸어왔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당신 친구들이 내 관요의 청화자기를 깨트렸으니, 계산은 정확히 해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