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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지랄맞은 룰

  • 눈빛에 분노가 가득했지만 가난한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건네고 있는 듯한 시티은행 간판을 올려다보자 조우빈은 분노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 “지성아, 우리 그냥 가자!”
  •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에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대.”
  • 십 년?
  • 심지성의 입꼬리가 음미하듯 곡선을 그렸다.
  • “안 그럼 밖에서 기다릴래?”
  • 심지성이 고집스럽게 불구덩이로 뛰어들려고 하자 조우빈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드디어 결심한 듯 말했다.
  •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살아야지. 그냥 한 번 쪽팔리는 거잖아. 내가 같이 가줄게!”
  • 성미가 곧은 조우빈은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조우빈을 본 심지성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우빈아, 앞으로 나만 믿어. 우리 브라더 굶기지 않을게.”
  • 아직 심지성의 그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조우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
  • 문밖부터 가난한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는 듯한 분위기를 뿜는 시티은행의 홀은 더욱 으리으리했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홀에 들어섰지만 조우빈은 여전히 어색했다. 누가 봐도 촌놈이 관청에 끌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 자칭 타칭 프리미엄 프라이빗 은행이니 서비스도 당연히 물샐틈없었다.
  • 온몸에 5만 원도 넘지 않는 싸구려 옷을 두른 심지성 그들을 본 여직원의 얼굴에 피었던 자본주의 미소가 뚜렷이 굳어졌다.
  • “두 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투철한 직업의식을 탑재한 그녀는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여직원의 질문에 조우빈의 얼굴의 어색함이 더 짙어졌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그는 제일 먼저 들어갈 것이다.
  • “돈을 인출하려고요!”
  • 심지성은 무척 편안해 보였는데 덤덤한 말투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 여직원은 살짝 멈칫했다. 그녀의 눈빛에 순간 경멸이 스쳤다.
  • “그럼 고객님께서 먼저 카드를 보여주세요!”
  • 심지성이 시티은행의 카드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조우빈의 눈빛에 한줄기 희망이 있었다.
  • “죄송해요. 저는 은행 카드는 없어요.”
  • 그러자 직업정신이 투철한 여직원의 안색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 “하하, 은행 카드. 이 빈털터리는 여기의 룰도 모르는 거야.”
  • 방금 돈을 인출한 진기석은 전여울의 팔짱을 낀 채 걸음을 멈췄다. 심지성이 제가 지른 불에 제가 타죽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는 흥미가 돋은 것이다.
  • “고객님, 저희 은행에서 은행 카드를 만드시려면 재산증명을 제시해 주셔야 합니다. 20억이 기본이고요. 또한 처음 발급받으려면 최소 2억을 입금해야 합니다!”
  • 여직원은 그들을 내쫓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고 인내심 있게 심지성에게 룰을 설명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지성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
  • “제가 여기에 물건을 보관했고 지금 그걸 찾으러 온 거예요!”
  • 그 한 마디에 여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심지성을 쳐다보았다.
  • 시티 은행은 일상적인 금전 저축과 대출 등의 업무 외에 다른 가치 있는 물건을 은행 금고에 보관할 수 있었다.
  • 다른 물건을 시티은행에 넣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면 대단한 신분일 것이다.
  • 하지만 대단한 신분이라는 다섯 글자는 아무리 봐도 심지성과 어울리지 않았다.
  • “고객님…”
  • “이게 저축 증빙 서류예요. 이제 안내해 줄래요?”
  • 심지성은 설명하기 귀찮은 듯 지갑에서 꼬깃꼬깃한 저축 증빙 서류를 꺼냈다.
  • 그러자 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진기석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심지성을 바라보았다.
  • 전여울은 심지성이 그녀에게 그 증빙 서류를 보여줬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때가 되면 그녀가 공주님처럼 살 수 있게 하겠다고 굳게 맹세했었다.
  • 아쉽게도 전여울은 전혀 믿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전여울은 이유 없이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하, 어디서 가짜 증빙을 구해와서 허세를 부리다니!”
  • 진기석은 세계 멸망을 믿을지언정 심지성의 손에 있는 저축 증빙 서류가 진짜라는 걸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 “죄송합니다만 고객님의 저축 증빙 서류를 확인해야 합니다!”
  • 비록 그녀도 진기석처럼 심지성의 저축 증빙 서류가 가짜라고 심각하게 의심했지만 여직원은 룰대로 자본주의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말했다.
  • “빨리 부탁드려요!”
  • 심지성은 덤덤하게 웃으며 그 저축 증빙 서류를 건네주었다.
  • 그 여직원이 저축 증빙 서류를 들고 황급히 지점장 사무실에 달려간 틈을 타, 진기석은 가차 없이 심지성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 “빈털터리, 증빙 서류를 위조하는 게 어떤 죄명인지 알아?”
  • 전여울도 이를 악물더니 진기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맞장구쳤다.
  • 장단을 맞추는 두 사람을 봤지만 심지성은 더 설명하기 귀찮았다.
  • 같은 시각, 지점장 사무실. 방금 심지성의 저축 증빙 서류를 가져간 여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녀의 앞에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녀와 마찬가지로 불안함 가득한 표정으로 질주했다.
  • “심지성 씨, 안녕하세요. 저는 이곳의 지점장입니다. 방금 전에는 대접이 소홀했습니다!”
  • “부디 마음에 담아두시지 마십시오!”
  • 스스로를 은행 지점장이라고 소개한 대머리 남자는 땀투성이가 된 얼굴로 허리를 숙이며 심지성에게 인사했다.
  • 방금 심지성의 접대를 책임진 여직원은 진작부터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재해의 생존자 같은 표정이 짙었다.
  • 방금 심지성의 저축 증빙 서류의 정보를 시스템에 입력하자 바로 블랙 다이아몬드 VIP라는 글자가 튀어나왔던 것만 생각하면 여직원은 저도 모르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 진기석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도 순간 굳어졌다. 그는 심지성의 저축 증빙 서류가 진짜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전여울도 똑같이 멍해졌다.
  • “이제 제 물건을 찾아도 되나요?”
  • “물론입니다. 심지성 씨, 저를 따라오시죠!”
  • 지금 이 순간, 심지성의 앞에서 굽신거리는 은행 지점장을 본 진기석은 자신의 세계관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시티은행의 지점장은 다른 은행의 지점장과 달랐다. 진기석도 감히 시티은행의 지점장에게 미움을 살 배짱은 없었다.
  • “가자, 우빈아. 멍하니 있지 말고!”
  • 조우빈의 어깨를 두드린 심지성은 살짝 미소 지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조우빈은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통증이 엄습하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제야 하하 웃으며 심지성의 뒤를 따랐다.
  • 진기석과 전여울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심지성은 걸음을 살짝 멈췄지만 그는 전여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 하지만 그 순간, 심지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후회라고 할 만한 것이 스쳤다.
  • 한 번 배신한 감정은 똥통에 빠진 동전 같았다. 여전히 돈이었지만 아무도 주우려고 하지 않으니까.
  • “그럴 리가!”
  • “저 빈털터리가 어떻게!”
  • 한참 뒤, 진기석은 무엇에 홀린 듯 그럴 리가,라는 네 글자를 고래고래 외쳤다.
  • 시티은행의 금고, 지점장은 깍듯한 태도로 심지성을 안내해 가장 안쪽의 금고 앞으로 갔다.
  • “심지성 씨, 우선 비밀번호를 입력하신 뒤, 지문과 홍채 정보를 입력해 주세요. 그럼 금고를 여실 수 있습니다!”
  •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우빈은 여전히 눈앞의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심지성이 금고를 열 때까지.
  • 금고 안에는 쌓아놓은 금괴와 달러와 아무렇게나 놓은 각종 명품 시계가 있었다. 조우빈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 “젠장, 드디어 끝났네!”
  • 전에 심지성은 한 번도 돈이 이렇게 중요한 건 줄 몰랐다. 하지만 일 년 동안 자신의 힘으로 생활하다가 금고 안의 놀라운 부를 보자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 심지성이 재산 일부를 먼저 꺼내려고 하는데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
  • 시간 맞춰 보내진 메일을 본 심지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 “시발 젠장, 끝이 없구나!”
  • ‘심 씨 가문의 1순위 후계자 룰’이라는 제목의 메일은 몇 가지 조항만 나열되어 있었다.
  • 1. 1순위 후계자로서 일 년의 시험을 통과하면 1차 창업 자금을 획득한다.
  • 2. 후계자는 반드시 1차 창업 자금으로 일 년 안에 열 배의 이익을 창출해야 하며, 그러지 못하면 후계자 자격을 상실한다.
  • 3. 후계자는 시험 포기를 선택할 수 있으며, 포기한다면 창업 자금은 자동으로 해고 수당이 된다.
  • “지성아, 왜 그래?”
  • 어렵게 마음을 진정한 조우빈은 심지성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보고 그에게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