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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우산

  • “내일 아침 여덟시에 데리러 올게요.”
  • 그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쿨하게 떠나버린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하빈은 그제야 우산을 차에 두고 내렸음을 깨달았다.
  • 평소 덤벙대는 성격이 전혀 아닌데, 어쩌다 이런 실수를 한 걸까.
  • 유하빈은 서둘러 호텔로 들어가 프런트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방 문이 철컥 닫히는 순간,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현관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무릎을 구부려 감싸 안았다.
  • “미쳤어, 유하빈.”
  •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남자한테 무턱대고 찾아가 협박에 가까운 말들을 내뱉으며 딜을 하다니.
  • 심지어 그 남자는 그녀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 내일부터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야 한다고?
  • 그녀는 한평생 이토록 충동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 도망치려면 기회는 지금뿐이다.
  • 하지만 왜일까……
  • 이번만큼은 도망을 치고 싶지 않았다.
  • 더 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 어차피 온 세상이 그녀를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그들의 바람대로 정말로 미친 척을 해서 목적이라도 달성해야 억울하지 않을 테니까……
  • **
  • “대표님, 아까 하신 말씀 정말 진심이세요?”
  •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던 김정혁은 그 여자가 차에서 내리기만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자신의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 “내가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은 적이 있었나?”
  • 차지태의 한마디는 모든 답변을 대신한 셈이었고 김정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지금껏 톱 연예인, 재벌가의 딸들을 포함해서 외모는 물론이고 스펙까지 훌륭한 여자들의 셀 수 없는 대시를 받아왔음에도 늘 철벽을 쳤던 대표님이 그저 꽃뱀처럼 보이는 여자가 나타나 뜬금없는 협박을 한 것에 대해 혐오감을 내비치지 않은 것도 모자라 그 여자의 결혼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다니.
  • 김정혁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 혹시 오늘 뭘 잘못 드신 걸까?
  • 사실 차지태 정도의 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이슈는 손쉽게 무마할 수 있을 텐데.
  • 세상 사람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신분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 김정혁은 차지태가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걸고 큰 도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병원으로 모실까요?”
  • “아니. 오늘은 바로 집에 돌아가지.”
  • 차지태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다 무심코 발을 움직인 순간, 발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 고개를 살짝 숙여 옆좌석의 레그룸 쪽을 확인하던 그는 유하빈이 두고 간 빨간색 우산을 발견했다.
  • 아직 빗물이 마르지 않아 흥건하게 젖어있는 우산.
  • 결벽증인 그가 평소였다면 절대 손도 대지 않았을 물건이지만, 뭔가에 홀린 듯 그 우산을 집어 들었다.
  • 특유의 장미 향이 그의 코끝을 자극했다.
  • 그녀가 차에서 내리고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지만 왠지 우산의 손잡이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다음날, 비안나 호텔 앞.
  • 유하빈은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간단히 준비를 한 다음 미리 호텔 로비에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그가 어쩌면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 그러나 그의 벤틀리 차량은 여덟시 정각에 바로 비안나 호텔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