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쿨하게 떠나버린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하빈은 그제야 우산을 차에 두고 내렸음을 깨달았다.
평소 덤벙대는 성격이 전혀 아닌데, 어쩌다 이런 실수를 한 걸까.
유하빈은 서둘러 호텔로 들어가 프런트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 문이 철컥 닫히는 순간,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현관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무릎을 구부려 감싸 안았다.
“미쳤어, 유하빈.”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남자한테 무턱대고 찾아가 협박에 가까운 말들을 내뱉으며 딜을 하다니.
심지어 그 남자는 그녀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내일부터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야 한다고?
그녀는 한평생 이토록 충동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도망치려면 기회는 지금뿐이다.
하지만 왜일까……
이번만큼은 도망을 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온 세상이 그녀를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그들의 바람대로 정말로 미친 척을 해서 목적이라도 달성해야 억울하지 않을 테니까……
**
“대표님, 아까 하신 말씀 정말 진심이세요?”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던 김정혁은 그 여자가 차에서 내리기만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자신의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내가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은 적이 있었나?”
차지태의 한마디는 모든 답변을 대신한 셈이었고 김정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톱 연예인, 재벌가의 딸들을 포함해서 외모는 물론이고 스펙까지 훌륭한 여자들의 셀 수 없는 대시를 받아왔음에도 늘 철벽을 쳤던 대표님이 그저 꽃뱀처럼 보이는 여자가 나타나 뜬금없는 협박을 한 것에 대해 혐오감을 내비치지 않은 것도 모자라 그 여자의 결혼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다니.
김정혁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혹시 오늘 뭘 잘못 드신 걸까?
사실 차지태 정도의 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이슈는 손쉽게 무마할 수 있을 텐데.
세상 사람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신분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김정혁은 차지태가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걸고 큰 도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병원으로 모실까요?”
“아니. 오늘은 바로 집에 돌아가지.”
차지태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다 무심코 발을 움직인 순간, 발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살짝 숙여 옆좌석의 레그룸 쪽을 확인하던 그는 유하빈이 두고 간 빨간색 우산을 발견했다.
아직 빗물이 마르지 않아 흥건하게 젖어있는 우산.
결벽증인 그가 평소였다면 절대 손도 대지 않았을 물건이지만, 뭔가에 홀린 듯 그 우산을 집어 들었다.
특유의 장미 향이 그의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고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지만 왠지 우산의 손잡이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음날, 비안나 호텔 앞.
유하빈은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간단히 준비를 한 다음 미리 호텔 로비에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