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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예상 밖의 시나리오

  • 철컥-
  • 그 순간, 유하빈은 팽팽한 줄이 몸을 속박하는 느낌을 받았다.
  • “안전벨트.”
  • 낮게 속삭인 차지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제 위치로 돌아가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유하빈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으면 안전벨트를 매는 것도 잊어버렸을까.
  • 게다가 가까이 다가갔을 뿐인데 당황하여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까지.
  • 생각보다 빈틈이 많은 그녀가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 “네, 진심이에요. 오늘은 시간이 늦었고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죠.”
  • 제법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 결혼할 신붓감을 데려오지 않으면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조차 없다는, 거의 생떼에 가까운 노인네의 엄포에 마침 골치가 아프던 참이었다.
  • 그런 와중에 그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으려 하고 재산에도 관심이 없는 여자가 자진하여 시집을 오려 하다니.
  • 게다가 1년 후의 이혼이라.
  •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는 남는 장사일 수도 있다.
  • “……그래요.”
  •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지만, 그녀는 어쩐지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차지태같은 인간의 주위에는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 그러니 고작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고 그녀에게 관심을 가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왠지 오산이었던 것 같다.
  • 그의 입에서 진도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그녀에 관해 어느 정도의 조사를 마쳤음을 의미했다.
  • 그 말인즉 차지태는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상했고 언젠가는 그가 놓은 덫에 걸려들었을 것이라는 뜻인가.
  • 이건 완전히 예상 밖의 시나리오였다. 그녀가 차지태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 그것이 덫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녀가 직접 차지태를 찾아와 딜을 한 건 바뀔 수 없는 현실이니까.
  • 하빈은 스스로가 내린 결정에 책임을 져야 했다.
  • ‘그래, 이 정도의 위치에 올라선 남자라면 언제든 닥쳐올 위기에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판을 다 깔아두는 거겠지. 그래서 나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그저 위기를 모면할 의례적인 과정일 뿐이겠지.’
  • 유하빈은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차지태가 한낱 평범한 그녀에게 관심을 보여 뒷조사까지 한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집이 어디예요? 데려다줄게요.”
  • 홀로 생각에 잠긴 채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던 유하빈은 차지태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깜짝 놀라 무심결에 대답했다.
  • “아, 비안나 호텔이요.”
  • 그녀의 대답에 센스 좋은 기사는 차를 돌려 비안나 호텔 방향으로 운전하기 시작했다.
  • “호텔에서 지내는 겁니까?”
  • 차지태의 계속되는 질문에 유하빈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 “네, 급하게 돌아오느라.”
  • 차지태는 한쪽 눈썹을 씰룩이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 “진도영의 결혼식 때문에?”
  • “……”
  • 또 한 번 진도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이 남자는 사람의 정곡을 찌르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이상한 악취미라도 있는 걸까.
  • 유하빈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차지태는 말없이 입꼬리를 쓱 올렸다.
  • 그녀는 왠지 차 안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차가 호텔 앞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침묵이 더 편했다.
  • 그와 대화를 하면 모든 주도권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 차라리 차지태가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