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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탐닉법

짐승의 탐닉법

노아

Last update: 2023-01-05

제1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 미국, W 병원 암 병동 1인실.
  •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창밖을 내다보며 나른한 하품을 하는 한 여자.
  • 유리창으로 비춰들어오는 햇빛에 여자가 목에 걸고 있는 명찰이 반짝였다.
  • [Habin Yoo]
  •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빛나는 다갈색 눈동자를 소유한 여자는 이곳에서 보기 드문 동양인 의사였다.
  • “이렇게 말라서 어떡해, 엄마.”
  • 여자가 엄마라고 부르는 중년 여인은 힘없이 병상에 누워있었다.
  • 삐쩍 마른 몸에 피부가 워낙 창백해 주삿바늘을 꼽은 손등에 실핏줄이 도드라졌다.
  • “엄마는 괜찮아. 우리 하빈이 엄마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어떡해.”
  • 중년 여인은 애써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 그런 엄마가 안쓰러웠던 유하빈은 손을 뻗어 주름이 깊게 파인 엄마의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 “수술도 잘 되었고 정말 다행히도 초기에 발견했으니까 항암 치료만 잘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 그러니까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
  • 딸의 따뜻한 위로에 여인은 다정한 미소로 화답했다.
  • “도영이는 아직도 연락 없어?”
  • 여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유하빈은 순간 심장이 덜컥 가라앉았다.
  • 진도영, 그녀가 3년을 만난 남자친구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한 달째 그녀와 연락이 두절된 남자이기도 했다.
  •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였던 사람이었으니까, 하늘의 별도 따주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었으니까.
  • 한 달 정도의 휴식기를 가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저도 모르게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 “며칠 전에 연락 왔어. 요즘 회사 일로 좀 바빴대.”
  • 거짓말이었다.
  • 아픈 엄마가 자신의 일로 쓸데없는 걱정이라도 할까 처음으로 엄마 앞에서 거짓말을 해버렸다.
  • “그래, 연락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너도 이젠 집에 돌아가서 쉬어, 한 달째 집에도 못 가고 이게 무슨 고생이야. 오후에는 민아가 온다고 하니까 걱정 말고 집으로 돌아가.”
  • 엄마가 쓰러졌다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한국에서 부랴부랴 새벽 비행기로 미국에 돌아온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항에서 휴대폰까지 잃어버렸지만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평소에도 몸이 좋지 않았던 엄마에게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병원부터 가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 이후 공부 때문에 바쁜 동생을 대신해 엄마의 병간호를 도맡은 유하빈은 어차피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이라 익숙했기에 24시간 병원에 있으며 엄마의 병상을 지켰다.
  • 그러다 보니 잃어버린 휴대폰을 다시 살 시간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 한 시간 후, 유하빈은 두 손 가득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동생에게 엄마를 부탁하고 병실을 나섰다.
  • 그러다 불현듯 등 뒤에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는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하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 “언니, 언니! 이 기사 좀 봐!”
  •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뛰어온 유민아는 힘겹게 숨을 고르며 제 휴대폰을 유하빈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 “뭔데 그…….”
  •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받아들며 습관적으로 슬라이딩하려던 유하빈의 손이 문득 허공에서 멈췄다.
  • [JK 그룹 후계자 진도영과 W&K 그룹 상속녀 온주연의 결혼 발표…]
  •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제 눈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의심했다.
  • 하지만 그런 의구심을 품을수록 그의 이름 세 글자는 더욱 선명해져 그녀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클릭한 유하빈은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조용히 글을 읽어내려갔다.
  • “언니, 이거 도영 오빠 맞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도영 오빠가 왜 이 여자랑 결혼해?”
  • 머리가 윙윙거렸다.
  • 내일 오후 네시에 진행되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라니.
  • 이 기가 막힌 상황에도 그녀에게는 충격을 받을 시간조차 없었다.
  • 진도영과 만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야만 했다.
  •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결국, 유하빈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티켓을 구매했다.
  • 여전히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유민아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 그녀는 병원을 뛰쳐나와 택시를 타고 뉴욕 공항으로 향했다……
  • **
  • 이튿날 오후 세시, 팰리스 호텔.
  • 자극적인 기사 타이틀을 뽑을 수 있진 않을까, 부푼 기대를 안고 벌떼처럼 모여든 수많은 취재진들 사이로 길게 늘어뜨린 화려한 레드 카펫이 눈에 띄었다.
  • 비밀리에 진행되는 여느 재벌가들의 결혼식과는 달리 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온 세상에 소문을 내지 못해 안달인 듯했다.
  • “초대장 있으십니까?”
  • 그리고 여기, 한 손은 캐리어를 끌고 한 손에는 의사 가운을 든 채 땀을 뚝뚝 흘리며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한 여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호텔 경호원을 바라보고 있다.
  • “초대장은 없는데요. 하지만 진도영…… 신랑분과 친구 사이입니다. 들어가게 해주실래요?”
  • “초대장 없으시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 경호원은 마치 미친 여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유하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단호하게 막아섰다.
  • 답답함에 발만 동동 구르던 유하빈 앞에 문득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지더니 이어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 순간 심장이 덜컥 가라앉았다.
  • 16년 동안, 매번 그날이 다가올 때면 악몽처럼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금 또다시 그녀 앞에 나타났다.
  • 하지만 이번엔 허상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었다.
  • “진도영……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몸의 떨림을 억지로 감추기 위해 주먹을 꾹 말아 쥔 유하빈은 잇새로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 “어디서 함부로 우리 진 서방 이름을 입에 올려? 우리 주연이 아빠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남자까지 탐내는 거니?”
  • 표독스러운 여인의 눈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 “허, 걔가 그래요? 내가 빼앗았다고?”
  • 유하빈은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 “저기요, 아줌마. 온주연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남의 남자친구까지 탐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 기억 속 주눅이 든 나약한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두 눈을 번뜩이며 되레 쏘아붙이는 유하빈을 바라보며 여인은 순간 멈칫했다.
  • 하지만 그럴수록 화만 더욱 치밀어 올랐고 바락바락 대드는 그 모습에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듯했다.
  • “남자친구? 어디서 헛소리야? 너도 네 어미처럼 정신병원에 갇히고 싶어서 안달 났어? 애초에 네 거는 어디에도 없었어. 제 어미를 닮아 몸이나 함부로 굴리고 다니는 주제에 감히 우리 주연이에게 막말하는 거니? 너야말로 어릴 때부터 우리 주연이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거 아니야?”
  • 사정없이 쏘아대는 화살에 유하빈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 몸을 함부로 굴린다니, 정신병원에 갇힌다니, 정확한 설명 하나 없었지만 유하빈은 여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 하지만 유하빈에게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여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우리 주연이 임신 1개월이란다. 당연히 진 서방 애고.”
  • ……뭐?
  • 여인의 말에 유하빈은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제 귀를 의심했다.
  • “그……그게 무슨……”
  • “무슨 말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사악하게 웃는 여인과 눈이 마주치자 유하빈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 임신 1개월이라……
  • 한 달이면, 정확히 진도영과 연락이 끊겼던 그날 밤이었다.
  • 그 말인즉, 그녀가 숱한 치욕을 겪으며 애타게 그를 찾던 그날 밤, 그는 온주연과 함께 있었단 말인가?
  • 더 이상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 밀려오는 배신감에 넋을 놓은 채 멍하니 호텔 안을 바라보고 있던 유하빈은 문득 “신랑 진도영, 신부 온주연”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 그 열 글자는 유독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후벼팠다.
  • “이 정신 나간 여자 좀 쫓아내.”
  • 이어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졌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경호원들이 유하빈의 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려던 순간,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 팔을 잡고 있는 손을 밀어냈다.
  • “이거 놔, 혼자 갈 테니까.”
  •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차가운 목소리와 온기 하나 없이 마치 산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차디찬 손에 흠칫 놀란 경호원들은 저도 모르게 힘을 풀었다.
  • “너 지금 뭐……”
  • “남의 걸 탐내는 그 못된 습관은 역시나 유전인가 보네요. 이런 걸 도벽이라고 하나?”
  • 흥분한 여인의 말을 가볍게 끊어버린 유하빈은 서릿발같은 눈빛으로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그대로 뒤돌아 떠나버렸다.
  • “허, 저게 진짜 그년이라고?”
  • 여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빨갛게 칠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