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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균열

  • 단 한순간의 일이었다.
  • 나름 평화로웠던 그녀의 일상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 그 여자의 목소리, 말투, 눈빛…… 하나하나가 그동안 유하빈이 마음속 깊숙한 곳에 봉인해뒀던 끔찍한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 눈앞이 어지러웠다. 또다시 과호흡이 찾아오려는 모양이었다.
  • 유하빈은 서둘러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물 한 병을 구입한 후, 가방 안에서 신경 안정제를 꺼내 익숙하게 입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 천천히 안정을 되찾은 유하빈은 고개를 들고 여전히 소란스러운 호텔 입구를 바라봤다.
  • 결국 만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녀를 까맣게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 그녀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남자가 지금 턱시도를 입은 채 저 호텔 안에서 그녀의 이복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니, 아직도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 그 모든 다짐이 전부 거짓이었단 말인가.
  • “진도영, 왜 하필 팰리스 호텔이야?”
  •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그 끔찍한 기억이 또다시 그녀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던 막연함……
  • 겨우 트라우마를 벗어나 삶을 이어가려던 그녀에게 짙은 어둠에 대한 공포를 다시 갖게 만들었던 그날 밤의 기억.
  • 그녀는 여전히 팰리스 호텔 1501호의 공기부터 냄새까지, 그리고 짐승처럼 그녀에게 덮쳐들었던 악마 같은 그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 아니, 영원히 잊을 수 없겠지.
  • 유하빈은 팰리스 호텔을 벗어나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두 눈을 질끈 감고 등받이에 기댄 그녀는 호텔 테라스에서 한 남자가 입꼬리를 말아올린 채 자신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돌아왔군.”
  • 화이트 슈트 차림의 남자는 유하빈이 탄 택시가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손에든 샴페인 잔을 빙빙 돌렸다.
  • “네? 차 대표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 평소 공개적인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유명한 남자가 웬일로 화제의 중심인 JK 그룹 후계자의 결혼식에 얼굴을 비춘다는 소식이 내로라하는 집안의 여자들을 중심으로 쫙 퍼졌다.
  • 그리고 그 남자와 말 한마디라도 붙여보려 관심도 없었던 경제와 시사에 대해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온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남자를 빙 에워싸고 있었다.
  • “길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수줍게 묻는 말을 가볍게 무시한 남자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 그는 샴페인 잔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며 저를 둘러싸고 있는 여인들에게 비키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 “아, 네, 네. 죄송해요, 차 대표님.”
  • 머쓱한 기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여자는 황급히 자리를 비켜섰고 남자는 고개를 살짝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남자가 발걸음을 옮기자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비서가 안경을 치켜들며 서둘러 남자의 뒤를 따랐다.
  • “대표님, 차 대기시킬까요?”
  • 남자에 못지않게 차가운 얼굴을 한 비서가 눈치껏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그래. 재미있는 구경도 했으니 이젠 돌아가야지.”
  •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을 내뱉은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호텔 밖으로 향했다.
  • 그의 말의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늘 저만의 생각이 있는 대표님이었기에 비서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 **
  • 유하빈은 팰리스 호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휴대폰 매장에 들렀다.
  • 습관처럼 몇 년째 사용하고 있는 모델을 집어 들려고 하는 순간, 우연히 새롭게 출시된 휴대폰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 “이거로 주세요.”
  • 어째서였을까, 거의 병적인 수준으로 물건도 익숙한 것만 고집하던 유하빈이 신상 휴대폰에 관심을 보인 건.
  •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결제까지 마치고 신상 휴대폰을 손에 든 채 매장 밖에 서있었다.
  • “뭐 하는 거야, 유하빈.”
  •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넘긴 유하빈은 짧은 탄식을 내뱉고는 통신사로 향했고 원래 쓰던 번호를 다시 개통한 후 밖으로 나왔다.
  • 어느새 밖에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 하필이면 비라니, 재수가 없어서야 원.
  • 미리 예약해둔 호텔이 바로 근처였기에 굳이 우산을 사고 싶진 않았다.
  • 백업까지 마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후 유하빈은 한 손으로 비를 막고 다른 한 손은 캐리어를 끌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호텔이 바로 앞인데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 비는 점점 더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도로 중앙에 서있는 그녀에게는 앞으로 나아갈 선택지밖에 없었다.
  •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 이때,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겠다는 듯 누군가가 고집스레 메시지를 보내왔다.
  • 하지만 유하빈은 쏟아지는 비에 휴대폰을 꺼낼 수 없었다.
  • 그러자 이번에는 집요하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 결국 울컥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든 순간, 전화는 바로 끊겼다.
  • 마치 상대방의 목적은 유하빈이 그 메시지를 확인하게 하려는 것인 듯.
  • 휴대폰에는 총 열 통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 끊임없이 화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으로 쓸어버리며 유하빈은 메시지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 [이번에도 내가 이겼네?]
  •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유하빈은 메시지를 보내온 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 문자 한 줄을 제외하면 나머지 아홉 통의 메시지가 전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벌거벗은 채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었으니까.
  • 사진 속 주인공은 바로 그녀의 이복 여동생 온주연과 그녀의 애인이었던 남자, 진도영이었다.
  • 그리고 두 사람이 누워있는 침대 위로 [팰리스 호텔]이라는 다섯 글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 그녀가 금방 휴대폰을 새로 샀다는 걸 어떻게 알고 기가 막힌 타이밍에 메시지를 보내온 것일까.
  • 어쩌면 미행을 붙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하빈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 “하…… 하하…… 하하하하……”
  • 실소가 터져 나왔다.
  • 거의 직감적으로 또다시 온주연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날카롭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그녀의 사랑스러운 여동생은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채 천사 같은 얼굴로 아무도 몰래 제 이복 언니의 애인을 빼앗고 기념하듯 남긴 사진을 상대방에게 보내며 그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 그리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조차 알 길이 없는 유하빈은 여전히 미련하게도 제 이복 여동생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 세상이 고요해졌다.
  • 소란스러운 경적소리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는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 빗물인지, 아니면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세계로 뻗어나가는 올해의 기업인, 기업 Zeta의 대표, 차지태 씨입니다.”
  • 초점 없는 눈길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 불현듯 건너편 호텔 외벽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대형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광고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두 눈에 확 박혀버렸다.
  • 가늘게 쭉 찢어진 두 눈은 마치 한 마리의 뱀을 연상케했다.
  • 움푹 파인 눈두덩이 아래 기다란 속눈썹이 일렁이며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신비롭게 빛났고 길게 쭉 뻗은 새까만 눈썹에 시리도록 하얀 피부가 더욱 창백해 보였다.
  • 저 얼굴을 어떻게 잊겠어.
  • 그 남자였다.
  • 그날 밤, 짐승같이 그녀를 범하며 온밤 내내 공포에 떨게 했던……
  • 그녀의 인생을 최악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바로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