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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니셜이 새겨진 커프스 버튼

  • “이 무슨 황당한……”
  • 유하빈의 뜬금없는 말에 김정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언성을 높이며 또다시 문을 박차고 나가려 했다.
  • “풋.”
  • 하지만 그 순간, 뒷좌석에 있던 차지태가 몸을 들썩이며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 차지태가 이렇듯 풀어진 모습을 보여준 건 처음이었던 터라 김정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워낙 선팅이 짙게 되어있어 차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유하빈은 그저 말없이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 그리고 잠시 후, 뒷좌석 창문이 천천히 열리고 그녀의 뇌리에 깊게 박혀있는 그 얼굴이 다시 한번 눈앞에 나타났다.
  • 그 남자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고개만 옆으로 돌린 채 웃음기 하나 없는 딱딱한 표정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 “……저희, 구면이죠?”
  • 담담한 말투였지만, 차지태는 완벽한 그녀의 미소에 한 가닥의 흔들림이 나타났음을 감지했다.
  • “타시죠.”
  •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강타해 저도 모르게 심장이 떨렸다.
  • 우산을 쥔 손에 본능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 하지만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천천히 우산을 접은 유하빈은 차를 에돌아 차지태의 옆좌석에 올라탔다.
  • 쉽지 않은 상대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상상보다 훨씬 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 그녀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기사는 곧바로 방향을 돌려 어딘가로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 “멀쩡한 상태의 차지태씨는 생각보다 차분한 분이셨네요.”
  •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유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이왕 시작한 바엔 끝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 하지만 그녀의 말에 오히려 크게 당황한 건 차지태 본인이 아닌 김정혁과 운전기사였다.
  • 멀쩡한 상태라고?
  • 그들이 차지태의 곁을 지키는 동안, 단 한 번도 차지태에게 이런 식으로 무례를 범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 아니,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나.
  • “통성명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 유하빈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린 차지태가 내뱉은 말이었다.
  • 옅은 갈색의 눈동자 두 쌍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먼저 시선을 회피한 건 여자 쪽이었다.
  • “아, 역시나 기억을 못 하시는군요.”
  • 능청스러운 조롱 속에 어쩐지 씁쓸한 기색이 한 가닥 묻어있는 듯했다.
  • “유하빈입니다. 한 달 전, 팰리스 호텔 1501호에서 차지태씨에게 겁탈을 당한 사람이죠.”
  • 순간, 차가 잠시 흔들렸다.
  • 김정혁은 고개를 돌려 운전기사를 바라봤다.
  • 베테랑답지 않게 오늘따라 여러 번 실수를 한 운전기사는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 하지만 김정혁 또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 여자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대표님이 누군가를 겁탈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 역시나 정신이 나간 여자가 틀림없다고 스스로 판단을 내린 김정혁은 여자를 내쫓으려고 뒤를 돌아봤다.
  • 하지만 곧이어 여자는 종이 백에서 쭈글쭈글한 흰 셔츠 하나를 꺼내들었다.
  • 셔츠의 팔소매에 “T”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커프스 버튼이 달려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김정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그건 분명 차지태가 이탈리아에서 단독으로 주문 제작한, 이 세상에 하나뿐인 커프스 버튼이었으니까.
  • 팰리스 호텔 1501호……
  • 어쩐지 익숙한 그 단어를 곱씹어 보던 김정혁은 문득 한 달 전, 차지태의 부름을 받고 옷을 챙겨 팰리스 호텔로 향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설마, 그날이었나?
  • “이 셔츠 하나로 뭘 증명할 수 있다는 거죠?”
  • 차지태는 입꼬리를 쓱 올리며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 하지만 유하빈은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오히려 엷은 미소로 되받아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 “물론 증명할 수 없겠죠. 하지만 제가 이 셔츠 하나만으로 차지태씨의 약점을 잡았다고 착각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