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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만남

  • 온 세상이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
  • 그녀의 남자친구를 빼앗은 이복 여동생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의 얼굴을 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 그녀의 순결을 처참히 빼앗은 남자는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나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그녀가 오히려 정신병 취급을 받고 있었다.
  • “차지태……”
  • 시뻘건 눈으로 광고판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가 잇새로 짓씹듯 그 이름을 내뱉었다.
  • 신호등은 다시 초록불로 바뀌었고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끝에 힘이 실렸다.
  •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우산도 없이 걸어가는 그녀에게 때때로 시선을 보내오는 이도 있었지만, 관심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 비안나 호텔에 들어선 후,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낸 그녀는 프런트로 다가갔다.
  • “안녕하세요, 고객님. 예약하셨나요?”
  • 앳된 얼굴의 프런트 여직원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고 유하빈은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여직원에게 건넸다.
  • “네, 유하빈이요.”
  • 갈라진 목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에 여직원은 순간 당황하며 건네받은 신용카드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 다급히 고개를 숙여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 여직원은 다시 카드를 주워 체크인을 마쳤다.
  • 호텔 키와 신용카드를 건네받은 유하빈은 말없이 뒤돌아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왠지 으스스한 분위기에 여직원은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띵-
  • 엘리베이터가 11층에 도착하고 유하빈은 캐리어를 끌고 오늘 밤 머무를 1105호실에 들어섰다.
  • 전등도 켜지 않은 채 축축하게 젖은 옷을 전부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욕실에 들어선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 쌓인 피로로 인해 두 눈에는 실핏줄이 가득했다.
  •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 잠도 자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니 원체 살집이 없던 몸이 더욱 삐쩍 마른 것 같았다.
  •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근 그녀는 깊은 고민에 잠긴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리고 한참 후, 결의에 찬 표정으로 세면대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챙겨 미리 예매했던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는 욕조에서 나왔다.
  • 몸의 물기를 닦고 욕실에서 나와 가운도 입지 않은 상태로 그녀는 아무렇게나 던져둔 캐리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캐리어 안에는 한 달 전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챙겼던 짐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 하빈은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은 채 캐리어를 천천히 열어 그날 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쭈글쭈글한 흰색 셔츠를 꺼내 종이 백에 담았다.
  •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을 드라이기로 말린 다음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던 붉은색 립스틱을 꺼내들어 입술을 진하게 칠하고 향수까지 뿌렸다……
  • 하이힐이 호텔 대리석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빗방울이 떨어지는 리듬에 맞춰 화음을 넣듯 울려 퍼졌다.
  • 진한 장미향에 프런트 직원들은 저도 모르게 향기가 풍겨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여자가 몸에 딱 달라붙는 정장 원피스를 입은 채 도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 “우산 빌려도 되죠?”
  • 하빈은 한쪽 눈썹을 찡긋하며 프런트 여직원에게 물었다.
  • “아, 네, 네! 그럼요! 외출 나갔다가 돌아오시는 길에 원위치에 다시 놓아두시면 되세요!”
  • 여직원은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 유하빈은 싱긋 웃으며 호텔의 시그니처 컬러인 붉은색의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 호텔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던 손님들과 직원들은 거의 동시에 그녀가 나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제타(Zeta) 앞 사거리.
  •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고 벤틀리 한 대가 좌회전을 해 회사 관계자 전용 주차장 쪽으로 유유히 나아갔다.
  • “대표님, 곧 도착입니다.”
  • 비서의 말에 뒷좌석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이던 차지태는 천천히 눈을 떴다.
  • 끼이익-
  • 그 순간, 안정적으로 나아가던 차가 불현듯 급정거를 했다.
  • 그 충격으로 차 안에 있던 모두가 몸이 앞으로 쏠렸고 차지태 또한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한 기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 차지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분이 언짢았지만, 기사의 말에 일단 고개를 들고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 한 여자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붉은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차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허리까지 오는 검은 생머리에 그녀가 들고 있는 붉은 우산과 똑같은 색의 핏빛 입술, 그리고 깡마른 몸까지……
  •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 “대표님,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 조수석에 앉아있던 비서가 차 문을 열려던 찰나, 우산이 천천히 들렸고 환한 자동차 불빛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 차 안에 있던 모두가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여자는 유유히 차지태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 그제야 정신을 차린 비서는 여자의 접근을 막으려고 서둘러 차에서 내리려 했다.
  • “김정혁. 가만히 있어.”
  • 그러나 차지태는 오히려 손을 뻗어 비서의 어깨를 잡고 제지했다.
  • “안녕, 차지태씨?”
  • 유하빈은 허리를 살짝 굽혀 선팅이 짙게 되어있는 뒷좌석 차창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안에 있을 사람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 그리고 그녀가 이어서 꺼낸 한마디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이가 경악하기에 충분했다.
  • “나 차지태씨랑 결혼하려고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