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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날의 기억

  • 한 달 전, 팰리스 호텔 1501호.
  •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잠을 자고 있던 차지태는 눈이 부신 느낌에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떴다.
  • 하지만 잠에서 깬 그를 맞이한 건 낯선 환경이었다.
  •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순간 강렬한 두통이 찾아왔고 그는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은 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한참 후,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자신의 몸이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왼쪽 어깨는 누군가가 깨물었는지 깊게 파인 치아 자국이 있었고 상처가 난 피부에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었다.
  • 거울로 확인하니 길게 난 손톱자국으로 등 쪽 피부가 엉망이 되어있었다.
  • 간밤에 살쾡이에게 뜯기기라도 했나.
  • 그는 지난밤의 기억을 되짚어보려 했으나 마치 필름이 끊긴 듯 단편적인 기억만 언뜻언뜻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 거울로 몸을 비춰보던 그가 뒤로 돌아선 순간,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 침대 주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여자의 찢어진 스타킹과 원피스, 그리고 여성용 속옷.
  • 게다가 새하얀 침대 시트를 새빨갛게 물들인 선명한 핏자국까지.
  • 어젯밤에 심각한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 하지만 찢어진 옷의 주인이 자리를 떠나버렸으니, 그는 정확히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살쾡이가 아니라 여자였군.”
  • 나지막이 읊조리던 그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 왜 떠난 걸까.
  • 그의 곁을 쭉 지키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을 텐데.
  • 아니면 나중에 엄청난 보상을 받기 위한 큰 그림인가?
  • 차지태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 누군가가 이미 씻었던 건지 욕실 바닥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물기로 흥건했다.
  • 분명히 그 속옷의 주인일 것이다.
  • 욕조에 몸을 담그고 반신욕을 하던 차지태는 여전히 따끔거리는 상처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후……”
  • 욕실에서 나와 옷을 입기 위해 옷장을 열었지만, 웬일인지 셔츠만 사라져있었다.
  • 황당한 일들의 연속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 “팰리스 호텔 1501호. 새 옷 챙겨서 와.”
  • 용건만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차지태는 가운을 몸에 걸치고 침대 옆 소파에 털썩 앉았다.
  • 조식 서비스로 나온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어지러운 방 상태를 둘러보던 그때, 불현듯 카펫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물건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 무언가가 통창으로 비춰들어온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 문득 호기심이 생긴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물건을 주워들었다.
  • 그것은 바로 [Habin Yoo]라고 적혀있는 네임카드였다.
  • 이런 이름이 있었나 싶은 생각에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분명히 그의 주위에는 없는 낯선 이름이었다.
  • 하지만 카드 속 이국적인 외모에 건조하고 메마른 눈빛을 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차지태는 불현듯 달빛 아래 차갑게 빛나던 두 눈동자와 강렬한 장미 향이 떠올랐다.
  • 그 기억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듯했다. 그와 닮은 옅은 갈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으니까.
  • 이 사진 속 여자가 바로 어젯밤의 그 여자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똑똑똑-
  • “대표님, 접니다.”
  • 이윽고 김정혁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차지태는 발길을 돌려 방 문을 열러 갔다.
  •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 그리고 김정혁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 백만 건네받은 채 문을 닫아버렸다.
  • 그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여자의 네임카드를 재킷 주머니 안에 넣고는 유유히 방을 떠났다.
  • 회사에 돌아간 후, 차지태는 호텔 매니저에게 연락해 전날 밤 팰리스 호텔 15층의 CCTV에 찍힌 영상을 확인했다.
  • 영상 속, 그의 셔츠를 입은 채 허둥지둥 방을 나서는 여자의 얼굴은 네임카드의 사진 속 인물과 정확히 일치했다.
  • 역시나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차지태는 본격적으로 유하빈이라는 여자에 대해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