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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습관적인 거절과 사양

  • “아니에요. 한국에 머무는 동안은 본가에서 지낼 생각이에요. 어차피 지금 비어있거든요.”
  • 유하빈은 차지태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 어차피 계약 결혼일 뿐인데 굳이 집까지 마련해줄 필요가 있을까.
  • 괜히 신세를 지는 셈이었다.
  • “결혼 첫날부터 아내가 친정집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은 듣고 싶지 않아서요.”
  • “……”
  • 차지태는 자신이 오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 참을 수 없었다.
  • 스스로를 겹겹이 쌓인 방어막으로 둘러싼 채 단 하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 습관적인 거절과 사양.
  • 겉으로는 예의를 차리는 듯했으나 사실은 냉정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 유하빈은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 어쨌든 먼저 결혼을 제안한 것도 그녀였고, 그의 말대로 쓸데없는 소문에 휩싸이다 결혼을 물리겠다고 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 “알겠어요.”
  • 어차피 차지태와 함께 사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유하빈은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여전히 그의 손에 들려있는 열쇠를 건네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순간, 불현듯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그와 한껏 가까워져 있었다.
  • “저……저기……”
  •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요.”
  •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사이로 열쇠가 끼워진 상태였다.
  • 제삼자의 시선에선 두 사람이 열쇠를 주고받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손을 잡고 있는 것인지 애매하게 느껴졌다.
  • “잘 부탁드립니다. 유하빈씨.”
  •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손을 스르륵 풀고 쿨하게 떠나버렸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열쇠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 “여기서 기다리시면 곧 기사가 모시러 올 겁니다, 사모님.”
  • “네, 알겠어요.”
  • 김정혁은 유하빈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차지태의 뒤를 따랐다.
  • 유하빈은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 그녀의 손바닥에 여전히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남아있는 듯했다.
  • 잠시 후, 벤츠 한 대가 유하빈 앞에 멈춰 섰다.
  • 번듯하게 차려입은 기사가 차에서 내려 유하빈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차를 빙 돌아 뒷좌석 문을 열었다.
  • “고마워요.”
  • 유하빈이 차에 탑승하자 기사는 바로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 차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아주 여유롭게 앞으로 나아갔다.
  • 누가 봐도 기사의 운전 실력은 베테랑 급이었다.
  • “도착했습니다, 사모님.”
  • 기사는 유하빈이 앉아있는 뒷좌석 문을 열었고 유하빈은 기사에게 고마움을 전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 이때, 키가 거의 180은 되는 듯한 금발머리의 여자가 유하빈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대뜸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사모님. 오늘부터 사모님을 모시게 된 노아입니다.”
  • “네?”
  • 낯선 외국인이 갑자기 다가와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것도 충분히 당황스러운 일인데, 심지어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노아 씨는 원래 도련님 곁을 지키던 보디가드 분입니다.”
  • 영문을 모르는 듯한 유하빈의 모습에 기사가 다가와 설명했다.
  • “아…… 잘 부탁드릴게요. 얼른 고개 들어요, 노아 씨.”
  • 유하빈의 말에 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칼 단발로 자른 머리카락이 귓가에서 찰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