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차갑게 되묻자 고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
비 맞은 배꽃과도 같은 그녀의 모습을 다른 남자들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정이현의 눈에는 혐오스럽기만 했다.
그는 조금 전에 조사한 서류를 테이블에 던졌다.
“난 누구에게 함부로 누명을 씌우는 버릇이 없으니까 네 눈으로 봐.”
불안한 마음으로 서류를 들여다보던 고미진은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정이현은 그녀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아니야?”
“제… 제가…”
고미진은 댜시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현 씨, 제가 잘못했으니까 화내지 마세요. 당신을 너무 사랑하니까 그런 멍청한 짓을 했어요.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게요. 이현 씨, 당신을 너무 좋아하니까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까 봐 항상 두려워요. 이런 제 마음을 당신은 모르시죠? 제가 마음이 혼란스러우니까 잠시 어떻게 되었었나 봐요.”
정이현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난 너에게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진작에 말했잖아.”
“이현 씨, 우리가 같이 산 지 벌써 5년 됐는데 당신은 정말 저한테 아무런 느낌도 없어요?”
고미진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내 한계를 건드리려고 하지 마!”
정이현은 경고 한마디 하고는 문을 닫고 떠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고미진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었다.
‘5년이나 지나도 난 정이현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어. 고유진도 나타난 판에 진실이라도 밝혀지면 난 영영 정씨 가문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될 거야!’
고미진의 눈에 음흉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정이현은 내 것이야!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어!’
잠시 후 고미진은 휴대폰을 들고 고유진에게 전화했다.
전화가 통하기 바쁘게 그녀는 명령 조로 말했다.
“내일 2시간 앞당겨 품평회로 와.”
“응.”
고유진은 간단한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고미진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몇 년 못 봤더니 이 나쁜 년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 불쌍하게 고씨 가문에서 쫓겨난 주제야!’
다음날,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고유진은 약속대로 2시간 전에 품평회 현장인 대신 국제호텔에 도착했다.
오늘 품평회에는 여러 보석 디자인 대가들뿐만 아니라 각계 비즈니스 인사들도 모였다. 게다가 행사 마지막에는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거물급 신제품을 발표한다고 한다.
현장을 한 번 둘러보았지만, 고미진은 보이지 않았다. 고유진은 비서에게 얘기하고 정원을 거닐기로 마음먹었다. 가는 길에 행방불명된 자신의 두 아이가 떠오른 그녀는 마음이 착잡했다.
정원에는 기이한 꽃과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작은 돌다리 밑에 잔잔하게 흐르는 물, 조산과 정자는 신선이 사는 곳을 방불케 했다.
바람을 쐬고 나니 마음속의 걱정이 많이 줄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좀 더 걸어가자 두 아이의 말소리가 들렸다.
“꽃이 너무 예쁘다. 형, 그릴 수 있겠어?”
“당연하지. 오늘 우리 여기서 더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을 거야. 형이 다 그릴 수 있어.”
“그럼 형이 배운 다음에 나한테 가르쳐줄래?”
“응. 형이 꼭 가르쳐줄게.”
‘오늘 행사에 애들도 온다고 했나? 목소리를 들으니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 같은데.’
호기심이 생긴 고유진이 걸어가 보니 자신의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의 꼬맹이 둘이 연못가에 있는 돌 위에 앉아 스케치판을 들고 그림 그리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두 꼬맹이도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세 쌍의 눈이 마주친 순간 그들은 깜짝 놀랐다.
‘이상하네. 꼭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고유진은 두 꼬맹이한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약간 마른 애는 좀 커 보였는데 잘생기고 점잖았고, 다른 한 명은 젖살이 있었는데 그 역시 잘생긴 얼굴이었다.
‘크면 미남들이겠네.’
다만 고유진의 장난꾸러기 아이들과 달리, 낯선 사람을 보고 약간 당황하는 걸 보니 두 아이의 성격이 내성적인 것 같았다.
두 꼬맹이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유진을 가늠하고 있었다. 포도알 같은 두 눈에 고유진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한참 후에야 제정신이 든 고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두려워하지 마. 난 고유진이라고 하는데 오늘 품평회에 참가하러 왔거든. 방금 무의식중에 너희 대화를 들었어. 너희들도 행사에 참가하러 온 거야?”
그들이 놀랄까 봐 고유진은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 꼬맹이는 망설이다가 말은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빠가 낯선 사람과 말하지 말라고 했어.’
그런데 왠지 그들은 고유진의 질문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고유진의 몸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