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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체면을 깎다

  • 현장 조명은 약간 어두웠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무대에 쏠리자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 “이제부터 ‘사랑을 좇아’ 품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모두 자유롭게 감상하시기를 바랍니다.”
  • 현장에 온 디자이너와 성공 인사들은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백금으로 만든 반지 앞에서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그 반지는 고미진이 방금 선택한 모델이었다.
  • “와, 이 반지의 디자인이 정말 독특하네요. 그런데 이 반지에 내포된 뜻이 뭘까요?”
  • 이 말을 한 사람은 하나부동산 대표였다.
  • “정말 좋은 작품인 것 같은데 저는 이쪽 방면에는 문외한이어서. 하하…”
  • 다른 대표들도 그 반지에 관심을 보였지만, 아무도 반지의 의미를 말하지 못했다.
  •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고미진은 대담하게 앞으로 걸어가 긴 머리를 섹시하게 쓸어올리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 “안녕하세요. 저는 고미진이라고 하고요, 정이현 대표님의 파트너입니다. 여러 대표님, 이 반지는 라라 선생님의 작품인데요, 장미를 들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프러포즈할 때를 떠올리며 디자인한 것입니다…”
  • 고미진의 말에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고미진은 계속해서 팔찌 하나를 소개했다.
  • “이 팔찌의 이름은 ‘사랑의 밧줄’인데 형태가 수갑을 닮았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를 묶어두어 영원한 사랑을 나누자는 뜻이 내포되었어요…”
  • 고미진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거침없이 소개했다. 하지만 한참 지나도 그녀가 원하는 감탄을 듣지 못했다. 각계 인사들과 디자이너들은 그녀를 가리키며 수군거리고 있었고 약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 “저 여자, 정 대표님 파트너 확실해? 웃기러 온 건가?”
  • “정말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모르겠네. 라라 디자이너가 남잔지 여잔지도 모르면서 어디에 감히 나서.”
  • “그러게. 나였으면 쥐구멍 파고 들어가겠어!”
  • 고미진의 얼굴에 웃음이 갑자기 굳어졌다.
  • ‘어떻게 된 거지? 틀릴 리가 없는데? 이건 분명히 고유진이… 고유진?! 이 나쁜 년이 날 함정에 빠뜨리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했구나!’
  •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바로 알아차린 고미진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온몸을 부르르 떨며 미소를 짓고 있는 고유진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 그런 창피를 당하게 하고도 부족한지, 고유진은 그녀를 향해 술잔을 들어보이고는 일어서서 사람들을 향해 걸어왔다. 범상치 않은 그녀의 기질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 “너무 아름답다. 저런 색상의 원피스를 저렇게 잘 소화하다니. 정말 선녀 같아.”
  • “저 몸매, 완전 부럽다.”
  • “저런 대단한 기질을 풍기는 언니는 누구실까?”
  • 고유진을 본 정이현과 두 꼬맹이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가 사람들 틈에 끼었다. 그들은 그녀가 뭘 하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 고미진은 정이현의 행동을 보자 질투심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 고유진은 얼굴을 찡그린 고미진을 잠깐 돌아보고는 다시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안녕하세요. 저는 고유진이라고 하고요, 스타 그룹 책임자예요. 이 작품들에 관한 저의 견해는 고미진 씨와는 약간 달라요…”
  • 고미진이 이를 갈든 말든 상관없이 고유진은 먼저 그 반지 앞에 서서 작품을 보며 야무지게 말했다.
  • “이 반지는 라라 아가씨의 작품인데요, 어느날 라라 씨의 애인이 장미를 들고 그녀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일생일대의 약속을 했답니다…”
  • 고유진은 팔찌를 보더니 다시 고미진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이 팔찌의 이름은 ‘선’이에요. 서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한계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선을 넘지 말라는 뜻에서 수갑 형태로 디자인했죠… 이 팔찌가 내포한 뜻은 사랑이라고 하기보다 자신에 대한 약속이라고 하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팔찌는 애인에게 주는 선물이지만,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해요.”
  • “훌륭해요!”
  • “고 대표님의 설명을 들으니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 사람들은 고유진을 둘러싸고 그녀를 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 정민우와 정민섭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 ‘아줌마 정말 대단하네. 그림만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학식까지 갖췄네.’
  • 하지만 정이현의 태도는 그들과 완전히 달랐다. 그는 안색이 흐려졌고 온몸에서는 냉기가 감돌았다.
  • ‘고유진 이 여자, 나대는 걸 너무 좋아하네? 저 남자들이 자신의 몸만 쳐다보는 게 안 보이나?’
  • 정이현 자신도 왜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는 그 남자들이 아니꼬웠다.
  • 고유진의 등장으로 고미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 그녀는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 ‘네가 설마 이것까지는 모르겠지.’
  • 이번 행사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펜던트에 관해 그녀는 이미 사람을 시켜 알아 놓았다. 그 펜던트는 밀레이 디자이너가 갓 디자인한 작품인데 오늘 처음으로 출시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유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도 조금밖에 알아내지 못했는데 고유진이 알 리가 없지.’
  • 고미진은 고유진에게 다가가 도발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 “고유진 씨, 이 펜던트에 내포된 의미가 뭔지 얘기해보시겠어요? 저도 배우고 싶어서 그래요. 워낙 박식하시니까 아실 것 같은데요?”
  •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는 고미진을 본 고유진은 그녀가 자신을 망신시키려고 그런다는 걸 알고 일부러 뜸을 들이며 잘 모르는 척 연기했다.
  • “그게… 대가의 작품을 제가 어떻게 감히 평가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