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그룹은 정도 그룹과 협력을 하고 싶은 입장입니다. 그러니 절대 이렇게 아둔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20억 원은 그저 얼마 안 되는 돈일 뿐입니다. 고작 그까짓 돈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정도 그룹의 방화벽을 해킹하지는 않겠죠. 누군가 저를 모함한 것 같으니 이 일은 분명하게 조사해 제대로 해결한 뒤 정 대표님께 결과를 알려 드릴 것입니다."
정이현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고유진 씨의 결론 기다리겠습니다."
그녀가 떠나기 전 정이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고유진 씨에게 귀띔을 하나 드리자면, 이런 식으로 저의 주의를 끄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는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사용하는 여자들을 수없이 만나 보았다.
고유진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정 대표님처럼 대단한 분에게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니까요. 오늘 일은 빠른 시일 내에 조사를 마쳐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고유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이제 협력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부리나케 남산 별장으로 돌아온 그녀는 문을 열고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는 세 아이를 보게 되었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은 아직 어렸지만 잘생긴 티가 났다. 아이들은 얌전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고유진이 돌아온 것을 발견한 아이들은 전부 달려와 그녀를 에워싸고는 미소를 띠고 애교 섞인 인사를 건넸다.
"엄마."
천진난만하고 무해한 모습들이었다.
고유진의 화는 이미 절반은 풀려 버렸다.
세 아이는 그녀가 10개월 동안 품어서 낳은 아이들이었다.
그녀는 당시 병원에서 5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고미진이 그 아이들을 각각 다른 인신매매범들에게 팔아넘겼다.
그녀는 비싼 돈으로 고미진이 일을 시킨 간호사를 매수해 간신히 아이들에 대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다행히도 아이들을 사 간 사람들의 목적은 오로지 돈이었다.
충분히 많은 돈을 지불한 뒤에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남은 두 아이의 단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5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아이들을 찾는 노력을 멈춘 적이 없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정이현의 경고를 떠올린 고유진은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엄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 셋, 똑바로 서. 엄마가 지금 질문을 하나 할 테니 사실대로 대답해야 해."
고유진은 처음으로 이토록 엄한 태도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었다.
세 아이는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꼭 사실대로 대답할게요."
첫째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고유진은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엄하게 말했다.
"정도 그룹에 관한 질문인데..."
"저희가 저지른 짓이 아니에요."
세 아이는 다시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질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부정하다니.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고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더니 정말 화를 내기 시작했다.
첫째가 또다시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둘째도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요. 정도 그룹이 뭐예요?"
셋째는 애교를 부리며 가련한 척 말했다.
"엄마, 왜 저희에게 화를 내는 거죠?"
세 아이는 말을 하더니 곧 울 것처럼 굴었다.
‘어디 한번 연기를 계속 해 보시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이들은 비록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컴퓨터를 다루는 솜씨가 무척 뛰어났다.
첫째는 침착하고 냉정하며 여유로웠다. 날 때부터 타고난 고귀한 분위기에 어린 나이에 벌써 회사 임원 같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으며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 또한 거의 신급이라 칭할 수 있었다.
둘째 아이는 총명하고 영리하여 생각이 깊었고 평소 독설을 조금 많이 하는 편이었다. 아이는 어린 나이에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세 아이 중에서 책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셋째 아이는 두 형과는 크게 달랐다. 아이는 단 음식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했다. 두 형에게 뒤지지 않는 머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며 뒤에서 이익을 얻는 것만 즐겼다. 게다가 포동포동한 얼굴까지 더해지니 세 아이 중 가장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고유진은 아이들의 눈물에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고 여전히 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그랬는지 엄마에게 말해."
엄마가 이토록 확신하는 것을 본 세 아이는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들은 눈물을 쏙 거두더니 울먹이지도 않고 보통 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익숙하게 표정을 바꾸는 아이들을 보며 고유진은 놀라 멍해지고 말았다.
여전히 첫째가 대변인 역할을 하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속이기 쉬워 보였어요."
이어 둘째 아이의 독설이 들려왔다.
"보기만 해도 능력이 없는 남자였는데 역시나 회사의 방화벽마저 지키지 못하더군요."
말을 하면서 아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비웃음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고유진은 하마터면 아이들 때문에 화병에 걸려 세상을 하직할 뻔했다.
‘속이기가 쉬워? 능력이 없어?’
당당한 정도 그룹의 대표이사이자 한국의 기적과도 같은 존재로 일컬어지는 남자가 도대체 어쩌다 속이기 쉽고 능력이 없는 남자 취급을 당하는 걸까?
셋째는 두 형의 모습을 따라 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엄마. 이 남자가 엄마를 찾아와 뭐라 한 거예요? 그가 엄마를 괴롭힌다면 아예 그의 전 재산을 가로챌 거예요. 그럼 우리는 그 남자의 재산으로 디저트를 사 먹을 수 있잖아요."
첫째와 둘째는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동생의 말이 맞아요. 감히 그가 엄마를 괴롭힌다면 그의 회사를 해킹해 팬티 한 장 남지 않을 때까지 재산을 빼돌릴 거예요."
고유진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세 악동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도 그룹과 정면 승부를 겨루고 싶지 않았다.
정도 그룹에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직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정말 역추적에 들어간다면 이 엉망진창인 상황을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녀를 보호하려는 아이들의 마음에 고유진은 무척 감동했다.
하지만 감동은 감동일 뿐, 가르칠 건 가르쳐야 했다.
"아가야. 이렇게까지 날 보호해주다니 엄마는 너무 감동이야. 하지만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건 나빠. 어떻게 다른 사람을 해킹해 그의 재산을 빼돌릴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