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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IP주소가 당신 집으로 돼 있는데

  • 5년 뒤.
  • 정도 그룹의 재무팀 사무실의 온도는 마치 빙하로 뒤덮인 북극처럼 싸늘했다.
  • "방화벽 2호가 뚫렸습니다."
  • "방화벽 3호가 뚫렸습니다."
  • "방화벽이 전부 뚫렸습니다…"
  • 사무실에 서 있는 정이현의 얼굴은 새까맣게 타버린 냄비만큼 어두웠다.
  • 기술팀 팀장은 전전긍긍하며 그에게 다가가 보고했다.
  • "대, 대표님. 방화벽이 전부 뚫렸고 상대방은 저희 계좌에서 20억 원을 빼갔습니다."
  • 그 말을 내뱉자마자 사무실의 온도는 더욱 싸늘해지고 말았다.
  • "IP 추적해!"
  • "알겠습니다!"
  • 곧 정이현은 직원들의 보고를 받게 되었다.
  • "IP주소는 남산 별장으로 나타났습니다. 집주인의 이름은 고유진이고요."
  • "고유진?"
  • 같은 시각.
  • 정도 그룹 빌딩의 주차장. 시폰 블라우스에 와이드 팬츠를 입은 여자가 차에서 내려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빌딩의 대문으로 걸어갔다.
  • "장 대표 쪽의 계약서는 법무팀에게 한 번 확인해 보라고 해요. 이번 시즌의 회사 업무 보고서는 제 책상 위에 올려 두시고 다른 사항은 잠시 뒤에 다시 얘기를 나눕시다. 지금 정도 그룹에 왔거든요."
  • 전화를 끊은 고유진은 어마어마한 기세로 솟은 빌딩을 힐끗 쳐다보더니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안내데스크로 다가갔다.
  • "안녕하세요. 저는 스타 그룹의 대표 이사입니다. 정 대표님과 약속이 잡혀 있어요."
  • 지금의 고유진은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와 아름답기 그지없는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태연하고 여유로운 자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 그녀는 더 이상 5년 전 다른 사람들의 괴롭힘을 받던 나약한 고유진이 아니었다.
  • 비록 5년 전의 일은 고유진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지만 그녀는 그 일 때문에 타락하지 않았고 디자이너로 이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 그녀는 천부적인 디자인 재능으로 인해 첫 자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 3년 전, 그녀는 이 돈으로 스타 그룹을 세웠다.
  •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회사는 계속해서 규모를 불려 갔으며 지금은 서울 디자인 업계에서 당당히 선두를 달리고 있는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업계에서 그녀의 입김은 절대적이었다.
  • 이제 그녀는 스타 그룹의 해외 시장을 넓혀보려고 했다. 때마침 정도 그룹에서도 협력을 진행할 디자인 회사를 찾고 있었으니 이건 절호의 기회가 분명했다.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예약 리스트를 살펴보던 안내데스크 직원은 그녀의 이름을 확인한 뒤 양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양 비서님, 스타 그룹의 고 대표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대표님의 사무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 어두운 표정으로 고유진의 자료를 보고 있는 정이현을 힐끗 쳐다본 양림이 나지막이 물었다.
  • "대표님, 스타 그룹의 대표인 고유진 씨가 찾아왔습니다."
  • "그 여자야?"
  • 정이현은 서류에 적힌 신상 정보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날카롭게 두 눈을 번뜩였다.
  • "네. 저희 그룹의 방화벽을 뚫은 그 고유진 씨입니다..."
  • 양림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저도 모르게 닦아냈다.
  • "대표님, 만나실 겁니까?"
  • "만나야지."
  • 정이현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사악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그의 계좌를 해킹한 뒤 협력을 논의하러 찾아온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 "네, 대표님."
  • 대표 사무실로 안내를 받고 찾아온 고유진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마호가니 책상 뒤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게 되었다.
  • 그는 늘씬한 몸매에 조금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데 시선 역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 얇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를 감싸고 있는 고귀하고도 싸늘한 분위기 역시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심어주었다.
  • 고유진은 외모와 능력을 모두 갖고 있는 정이현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본인을 만나고 나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쁜 숨을 들이쉬고 말았다.
  • 그의 얼굴이나 풍기는 분위기는 확실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다만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이 자꾸만 들었을 뿐...
  •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를 본 정이현도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와야 할 곳은 나온 요염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흰 피부의 여자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홀려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자세히 보니 그녀는 마치 난초같이 고귀하고 우아해 감히 건드릴 수조차 없을 것만 같았다.
  • 특히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풍겨오는 장미 향에 정이현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 다만 오늘 그녀가 저지른 짓을 다시 떠올린 정이현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덤덤하게 물었다.
  • "고유진 씨?"
  • 정신을 차린 고유진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 "정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스타 그룹의 대표인 고유진입니다. 정도 그룹에서 함께 협력을 진행할 디자인 관련 회사를 찾는다고 들었어요. 저는 저희 스타 그룹이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
  • 이번 회담을 위해 고유진은 무척 많은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준비한 것들을 전부 보여주기도 전에 정이현이 싸늘하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 "정도 그룹은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과는 함께 일을 하지 않습니다."
  •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요?"
  • 고유진은 미소가 굳어버린 채 서서히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 "정 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
  • 정이현은 실눈을 뜨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여자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 "설마 고유진 씨는 모르고 계시는 겁니까?"
  • "모르겠는데요."
  • 그의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고유진은 자연스럽고 의젓하게 대답했다.
  • "스타 그룹은 업계에서 가장 호평을 많이 받는 기업이에요. 게다가 정도 그룹과는 업무상의 교집합도 전혀 없었고요. 오늘 처음 만나는 저와 정 대표님 사이에도 사적인 트러블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 정이현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저도 그것이 궁금합니다. 고유진 씨는 저와 사적으로 원한도 없었는데 왜 정도 그룹 재무팀의 방화벽을 해킹한 겁니까? 게다가 저의 계좌에서 20억 원을 빼가셨던데."
  • 비록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적은 돈이었지만 이런 행동은 정도 그룹에 먹칠을 하는 동시에 그의 얼굴에도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 정도 그룹의 방화벽은 가장 능력이 뛰어난 프로그래머들이 설계한 것인데 도대체 정도 그룹 방화벽의 수많은 관문을 뚫고 그의 자금에 손을 댈 만한 능력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 놀라서 두 눈이 살짝 휘둥그레진 고유진은 아무에게도 이런 짓을 시키지 않았다 장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되물었다.
  • "정 대표님께서는 그 일을 저의 사람이 저지른 것이라 왜 그토록 확신하시는 거죠?"
  • 정이현은 그녀에게 서류 한 무더기를 냅다 던졌다.
  • "IP 주소가 당신의 집으로 뜨고 있으니까요."
  • 고유진은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그녀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