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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 남산 별장.
  • 고유진은 세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
  • 딩동, 딩동.
  •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 초인종 소리를 들은 네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보았다.
  • 평소 그들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걸까?
  • 고유진은 의아한 듯이 문으로 다가가 구멍으로 밖을 쳐다보더니 찾아온 사람을 보고는 몰래 비명을 질렀다.
  • ‘큰일 났어. 정이현이 왜 찾아온 거지?’
  • 더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곧바로 뒤돌아 세 아이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 "아가, 지금 얼른 방으로 돌아가. 내가 신호를 주면 그때 다시 나와."
  • 엄마의 모습에 둘째가 의아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엄마, 누가 왔길래 우리가 숨어야 하는 거죠?"
  • 고유진은 인내심 있게 설명해 주었다.
  • "정도 그룹의 대표 이사인 정이현이야. 너희들은 그의 재무팀 방화벽을 해킹했기 때문에 그가 너희들을 만나서는 안 돼. 너희들은 얌전히 방으로 들어가 엄마를 기다려. 내가 잘 해결할 테니 날 믿어줘."
  • 첫째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 "우리는 두렵지 않아요. 엄마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그와 맞설 방법을 알고 있어요. 게다가 우리가 있으면 그가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우리가 보호해 줄 수 있잖아요."
  • 그들은 한시도 빠짐없이 엄마를 보호해야 했다. 빌어먹을 대마왕이 감히 집까지 찾아오다니!
  • 첫째와 둘째의 마음속에서 정이현의 호감이 1점 더 깎이는 순간이었다.
  • 셋째는 오히려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오늘 밤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먹을 수 있나요?"
  • 셋째는 그가 찾아온 게 별로 큰일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대마왕을 만나선 뭘 하게? 오히려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더 먹는 게 이득이었다. 아이는 엄마가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 “…”
  • 고유진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들은 벌써 조건을 걸 줄도 아는 것 같았다.
  • 하지만 때가 때인 만큼 고민을 할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 "그래. 하지만 엄마를 도와서 두 형을 설득해 줘야 해."
  • 말이 끝나기 바쁘게 셋째는 토실토실한 손으로 두 형을 끌어안았다.
  • "형아..."
  • 달콤하게 그 말만 내뱉었을 뿐인데 동생을 지극히 아끼는 두 형은 그만 백기를 들고 말았다.
  • "그래요. 우리도 엄마 말을 들을게요."
  • 이번만 대마왕의 편의를 봐 줄 생각이었다.
  • 고유진은 아이들에게 뽀뽀를 한 번씩 상으로 내려 주었다.
  • 그녀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일 때문에 아이가 다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첫째, 둘째와 셋째가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고유진은 조금 시름이 놓였다.
  •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 "지현 언니, 아이들의 물건을 치워 버려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게요."
  • "네."
  • 그녀에게 일을 시킨 뒤 고유진은 얼른 욕실로 달려가 머리를 적신 뒤 핑크색의 샤워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 정이현은 문밖에서 이미 15분을 기다린 상태였다.
  • 오기 전 이미 조사를 마친 결과에 따르면 고유진은 오늘 집으로 돌아온 뒤 나가지 않았다.
  • 한 번도 이런 푸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던 대표님의 인내심이 바닥을 치기 직전이었다.
  • 그때 방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막 샤워를 마친 미인의 모습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 절반쯤 젖은 긴 머리가 어깨 위로 드리워져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투명한 두 눈에는 조금의 놀라움을 담은 채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핑크색의 샤워가운 때문에 피부는 더욱 희게 보여 섹시하고도 청초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 특히 그 옅은 장미꽃 향은 사람을 취하게 만들었다.
  • 정이현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고유진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 "어머? 정 대표님? 정말 죄송해요. 샤워를 하느라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했네요. 당신이 왜..."
  •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 정이현은 직접적으로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 "할 말이 있다면 제 비서를 통해 저에게 알려주면 돼요. 왜 이 시간에 직접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요?"
  • 고유진은 무척 어리둥절했다. 정도 그룹의 방화벽을 해킹한 일은 이미 조사를 하고 해결한 뒤에 그에게 알려 주겠다 전달한 상황이었다.
  • ‘그런데 왜 갑자기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게다가 비서도 없이?’
  • 정이현은 고유진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 알아내려는 사람 같았다.
  • 그러더니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 "고유진 씨, 저를 안으로 초대해 차나 한잔 마시며 천천히 얘기를 나눌 수는 없을까요?"
  • 고유진은 기가 막혔다.
  • 만약 상대방이 정이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 남자가 이곳까지 추행을 하러 왔다 생각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저는 차를 즐겨 마시지 않아요. 게다가 날이 어두워졌는데 이런 시간에 남녀 단둘이 있는 건 적절하지 않아요. 정 대표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하실 말씀이 있다면 여기서 하시죠."
  • 정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설마 고유진 씨 집에 누군가를 숨겨두고 있나요? 제가 만나면 안 되는?"
  • 고유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 ‘왜 꼭 마치 불륜 현장을 잡으러 온 사람처럼 말하는 거지?’
  • 이어 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 아침 누군가 다시 정도 그룹의 재무팀을 해킹했어요. IP주소는 여전히 고유진 씨의 집이었고요. 한번은 우연이라 쳐도 그 우연이 두 번 반복될 수도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