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발뺌하며 소개하려 하지 않자 고미진은 코웃음을 치며 사람들 속으로 다가가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 이건 밀레이 대가께서 얼마 전 새로 출시한 작품이에요. 이번 ‘사랑을 좇아’ 디자인 품평회에 처음으로 전시한 덕분에 저희가 제일 첫 번째로 감상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네요. 밀레이 대가께서는 워낙 보석 공예에 조예가 깊으셨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에요. 전체적인 펀칭 기법으로 조각한 펜던트의 디자인은 밀레이 대가께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것으로 보여요.”
“고미진 씨 진짜 대단해요. 이렇게 빨리 디자인 콘셉트에 대해 이해하다니 진짜 너무 감탄스러워요.”
“고미진 씨의 설명을 들으니 바로 알 것 같아요.”
일부 사람들은 눈치를 살피며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정 대표님도 워낙 뛰어나신데 고미진 씨 역시 이토록 박식하다니 진짜 천생연분이 따로 없는데요.”
주위의 칭찬에 고미진은 득의양양해졌다.
‘비록 고유진한테 당하긴 했지만 지금 모든 사람의 시선은 날 향해 있어. 게다가 이건 밀레이 대가의 작품이야.’
일각에서는 이번 품평회를 밀레이 대가가 주최했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있었다. 설령 그녀가 주최한 것이 아니더라도 이번 품평회를 지켜볼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밀레이 대가가 이번 일로 인해 날 눈여겨볼지도 몰라.’
정도 그룹 산하의 드림 주얼리에서 밀레이 대가와 협력하려고 했지만 여태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만약 자신이 정이현을 도와 이 협력을 추진한다면 그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분명 달라져 있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바로 이때 고유진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절한 이 마음과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그대는 아시나요.”
갑자기 튀어나온 그 한마디에 사람들은 순간 멍해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고유진한테로 향했다.
정이현은 흥미로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민우와 정민섭도 덩달아 흠칫했다.
‘아줌마도 우리처럼 이 작품에 다른 숨겨진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세 사람은 고유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제가 보기에 이 펜던트의 디자인은 뼈에 사무치는 절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 같아요. 이 펜던트는 여섯 개의 절단면을 가지고 있고 내부는 황금 대신 고전적인 보석을 사용해서 지난날에 대한 정을 표현한 듯해요. 전체적인 골드 컬러의 사용은 밀레이 대가의 마음속에 숨겨진 정이 황금보다 견고하다는 것을 뜻하죠. 그 정은 남녀 사이의 정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생각에는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건 그리움이에요.”
고유진은 감개무량한 어투로 설명했다.
“진짜 그럴까요? 왠지 모를 감동이 느껴지는데요. 마치 밀레이 대가 마음속에 숨겨진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역시 대가는 대가네요. 이렇게 뛰어난 작품을 디자인할 수 있다니요.”
“진짜 고유진 씨의 견해는 남다르네요. 이런 디자인 콘셉트는 저희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거예요.”
정민우와 정민섭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줌마 진짜 대단해요.”
‘조금 전 엄마가 설명한 것도 좋았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아줌마의 설명을 듣고 나니까 이 작품이 더욱 완벽해진 것 같아.’
정이현의 얼굴에도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 순간 고미진은 자신에게로 향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고유진한테로 향한 데다가 정이현조차 급격한 태도 변화를 보이자 더욱 질투심에 불타올랐다.
이때 정민우와 정민섭이 갑자기 앞으로 다가와 존경스러운 눈길로 고유진을 바라보았다.
정민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줌마, 진짜 대단해요. 저희가 아줌마한테서 디자인에 대해 배우면 안 될까요?”
정민섭도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아빠는 비록 디자인에 대한 상식은 있었지만 일이 바빠 그들과 함께 디자인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의 엄마는 두 사람에 대해 더욱 관심이 없었다.
평소 디자인에 대해 함께 얘기할 사람이 없었던 그들은 고유진을 보자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고 고유진의 재능에 탄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아이의 이러한 행동에 정이현은 더욱 의아해졌다.
평소에 두 녀석은 낯가림이 심해 사람만 보면 피했었는데 고유진한테는 몇 번이나 먼저 말을 걸었고 심지어 그녀한테서 배우고 싶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두 아이를 바라보는 고유진의 눈빛도 더욱 온화해졌다.
이들은 정이현과 고미진의 아이라서 당연히 거리를 두고 아예 만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친근함에 그녀는 기대에 찬 그들의 눈빛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미진은 아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록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네가 한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네가 밀레이 대가도 아니고 그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자고로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 법이야. 아무리 유명해지고 싶어도 다른 사람들을 속여서는 안 되지.”
고미진의 가시 돋친 말에 고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거짓인지 아닌지는 시간이 증명해 주겠지.”
고유진은 그녀의 등 뒤에 있는 두 아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비록 그들이 친근하게 느껴졌지만 결국은 고미진의 아이들이었기에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고유진은 마음속의 아쉬움을 억누른 채 돌아서 자리를 떴다.
정이현은 고유진의 날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밀레이 대가의 작품에 담긴 뜻에 대해 어떻게 이토록 확신하는 거지?’
이때 조명이 어두워지며 사회자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모두 오늘 전시된 디자인 작품들을 보시고 디자이너의 재능에 감탄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든 디자이너분께 찬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신 귀빈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다음은 오늘의 품평회에서 가장 설레고 기대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저희 주최 측 책임자께서 직접 여러분께 마지막 디자인 작품을 선보이려 합니다.”
이때 스포트라이트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비추었고 무대 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은 설렘과 긴장감으로 가득한 드럼 소리로 바뀌었다.
모두 책임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이현 역시 기대에 찬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밀레이 대가와 협력하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하려 했지만, 상대방이 너무나 신비로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이번 품평회에 그녀의 최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에 그는 혹시나 하고 온 것이었다.
설령 밀레이 대가가 참석하지 않더라도 품평회 책임자와 반드시 연관이 있을 것이고 그 책임자를 중심으로 알아보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는 사이 무대 뒤의 드럼 소리가 갑자기 멈추었고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