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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후회해 보시지요

죽도록 후회해 보시지요

소울유

Last update: 2023-04-07

제1화 왕실의 체통

  • “꺄악!”
  • 혼례식을 돕는 어멈의 새된 비명이 축하를 뜻하는 꽹과리 소리를 뒤덮었다.
  • “새, 새색시가… 깨어나지 않아요!”
  • 기안대군의 저택에 축하하러 온 사람들이 헉 하고 놀랐다.
  • “죽었다고?”
  • 혼례복을 입은 채, 늠름한 자태를 뽐내던 기안대군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차가운 눈에 비웃음을 담고 물었다.
  • “좌의정(左相) 댁에 보내. 내 집을 더럽히지 말고.”
  • 하객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귓속말하기 시작했다.
  • “기안대군(麒王)이 좌의정 댁 큰 여식이랑 혼약이 있긴 했지만 서출 여식과 눈이 맞아서 대비마마께 혼약을 취소해 달라고 간청했는데 대비마마가 거절했다지 뭔가. 그래서 억지로 큰 여식과 서출 여식을 함께 맞이했다네. 겨우 시집온 큰 아씨가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 어멈은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라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신부 얼굴을 가린 면사포를 살짝 들었다. 숨을 쉬고 있나 확인해 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 가마 안에서 쓰러져 있던 새색시 한청연(冷清欢)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어멈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 “아, 안 죽었습니다요!”
  • 한청연은 뻣뻣해진 몸을 움직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 ‘안 죽었다고? 여기는 어디지?’
  • 그녀의 기억은 바이러스 연구소가 최근 연구 개발에 성공한 나노 분자를 노린 테러리스트들의 침입을 당한 것에 멈춰 있었다. 나노 분자를 저장한 캡슐은 반지만 한 크기였는데 그곳에는 연구소의 모든 연구 성과와 엄청난 양의 약품이 들어 있었다. 만약 그것이 놈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 한청연은 동료의 도움으로 캡슐을 몸에 지닌 채, 연구소의 옥상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던 테러리스트의 사나운 표정을 끝으로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 고개를 숙이자 화려한 전통 혼례복이 보였다. 혼례복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져 가마 밖까지 흐르고 있었다.
  • 댕기 머리를 한 소녀가 가마에 난 창문으로 그녀를 보더니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로 말했다.
  • “안 죽었어요. 아씨 안 죽었어요! 대군마마, 저희 아씨에게 의원님 좀 불러주세요. 저희 아씨 살 수 있어요.”
  • ‘아씨? 대군마마? 이게 무슨 상황이지?’
  • 한청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 ‘나 죽은 게 아니라 타임슬립을 한 거야? 그것도 아기가 아니라 결혼하는 사람으로?’
  • 모영기(慕容麒)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혐오스러운 얼굴로 가마를 힐끗 보고 차갑게 말했다.
  • “의원을 부르거라.”
  • 저택의 의원이 약 상자를 들고 헐떡이며 뛰어왔다. 그는 몸을 가마에 쑥 들이밀더니 한청연의 상처를 보고 손목을 짚었다. 그러더니 곧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바로 일어서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 “대군마마,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구경꾼들이 가마를 빽빽이 둘러싼 채, 고개를 빼들고 구경하는 장면을 본 모영기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마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 “솔직히 말해 보아라.”
  • 의원은 언사를 고민하다가 모영기에게 다가가 말했다.
  • “상처는 심장이 아니니 크게 위험할 건 없으나 왕자빈마마께서는 회임한 것 같습니다.”
  •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가마 안의 한청연은 그 소리를 정확히 들었다. 순간 그녀는 크게 벌어지는 입을 어찌할 수 없었다.
  • ‘뭐야? 이 몸이 이제 몇 살이라고? 이때의 사람들은 이렇게 개방적이었나?’
  • 그녀는 믿을 수 없어 자신의 맥을 짚었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좋아, 아주 좋아!”
  • 모영기의 차가운 목소리에 의원은 뒷걸음질쳤다. 곧이어 이를 악문 모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좌의정 참 대단한 양반이군. 여식을 아주 잘 가르쳤어!”
  • 한청연은 숨막힐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피를 많이 흘린 그녀는 원래도 어지러운 것을 겨우 참고 있었는데 숨까지 막히자 머리가 새하얗게 되는 것 같았다.
  • 그녀가 겪은 적 없는 일들이 기억으로 변해 밀물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몰려들었다.
  • 온몸에 살기를 띠고 있는 남자는 바로 그녀와 예전부터 혼약관계를 맺었던 서방님이자 두 번째 왕자 기안대군이었다. 왕실에서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는 전설의 인물이었다.
  • 그는 어렸을 때부터 외조부 안국공과 함께 전쟁터로 나가서 병법으로 책략을 세워 공을 수태 세웠다. 그는 장안(长安)의 수많은 소년들의 동경의 대상이자 수많은 소녀들이 꿈에 그리는 낭군감이었다.
  • 한청연의 몸 주인은 그와 예로부터 혼약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한 달 전에 절에 향 피우러 가던 길에 복면한 강도를 만나 순결을 빼앗겼다. 게다가 어제 자신이 회임한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 왕실에 오쟁이를 지우다니. 이건 작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명인 혼인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다른 방도가 없었던 몸 주인은 이 상황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가마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 ‘이미 끝장난 상황인데 내가 왜 이 몸에 들어오게 된 거야? 어차피 죽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 한청연은 다급히 큰소리로 외쳤다.
  • “이, 이거 놔!”
  • “이거 놔? 좌의정 댁은 대체 이 모영기를 뭐로 본 거요? 한청연, 죽고 싶어서 이런 짓을 했소? 그럼 어디 소원대로 들어주지!”
  • 한청연은 온몸의 힘이 서서히 빠지는 느낌에 모영기가 있는 곳으로 힘겹게 기어갔다.
  • 모영기는 어두운 눈빛으로 뒤로 슬쩍 물러났다.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한청연은 넝마처럼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 “아씨.”
  • 하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겁에 질려 몸을 덜덜 떨고 있음에도 그녀는 용기를 내서 한청연의 앞으로 나섰다.
  • “대군마마, 저희 아씨가 부상이 심해 이렇게 내버려 둔다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 모영기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분노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 “죽어도 싸다.”
  • 한청연은 숨을 헐떡이다 크게 기침했다. 그 바람에 가슴팍의 상처가 벌어져 피가 더욱 심하게 흘러내렸다.
  • “저하!”
  • 좌의정 댁 둘째 딸 한청낭(冷清琅)이 어멈의 부축을 받으며 뛰어왔다. 면사포를 들어올리자 눈물이 글썽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가냘픈 몸을 휘청거리며 다가와 모영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다 소녀가 잘못한 것이니 언니를 원망하지 마시옵소서. 저하와 혼인하는 게 강직한 성격의 언니로는 견디기 힘들어서 이런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저하께서 탓하시려면 청낭이 저한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 한청연을 위해 애원하는 듯하지만 순식간에 한청연에게 동생을 질투하는 죄명을 뒤집어씌웠다.
  • 순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자신의 동생한테도 야박하게 구는 여인이니 덕도 없을 터, 그래서 대군마마가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 “그러니까, 둘째 아씨 마음이 얼마나 고와? 평소 집에서 큰 아씨의 구박을 호되게 당한 게 분명해!”
  • 모영기의 차갑던 눈동자는 한청낭을 본 순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한청낭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인데 네가 왜 신경을 쓰는 것이냐? 이곳은 좌의정 댁이 아니니 네가 설움을 참고 버틸 필요가 없단다.”
  • 한청낭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위로 들더니 가녀린 손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 “언니와 저하의 혼약이 먼저인데 저와 함께 시집오는 게 못마땅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저하께서 저를 다시 집으로 보내주시옵서소. 저는 자매의 정에 금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모영기는 직접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언짢은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 “말도 안되는 소리. 내가 측빈을 들이겠다는데 그녀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죽음으로 날 좌우지하려 들다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닌 저 여인이다. 여봐라, 당장 이 여인을 좌의정 댁으로 보내서 좌의정더러 잘 가르치라고 하여라.”
  •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혼인 날에 소박을 맞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 ‘좌의정 댁 큰 아씨는 너무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게 아니야? 감히 기안대군에게 밉보이다니, 고생을 사서 하는군.’
  •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하녀와 달리 한청연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 ‘우는 소리를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었군. 서출 동생이라고 하던데 보통 인물이 아니야. 그래서 이 몸 주인을 내쫓고 자신이 그 자리를 꿰찬 거였어!’
  • 한청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기로 했다. 원래의 몸 주인이 순결을 잃은 걸 모영기가 아직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떠나지 않고 버틴다면 모영기가 좌의정 체면이고 뭐고 그녀의 치욕스러운 일을 까발릴 수 있었다.
  •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며 말했다.
  • “도순아, 이만 가자.”
  • 고개를 숙인 한청낭의 눈에 의기양양한 빛이 어렸다.
  • 모영기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 “눈치는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