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음 때문에 결국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전화를 받았다.
유진화의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영이가 그러는데 너 오전에 집에서 나왔다며? 지금쯤 병원에 있는 거 다 알아. 내가 왜 치료비 지원을 끊었는지 너도 이제 알았겠지?”
유현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시킨 일을 제대로 완수하지 않아서겠죠.’
이어서 유진화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 최씨 가문에 돌아가기 싫어졌지? 하지만 유현아, 넌 결국 돌아가야 할 거야! 너 안 돌아가면 모든 병원에 연락해서 네 외할머니 치료를 거부하게 할 거야.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거 너도 알지? 물론, 믿고 싶지 않으면 어디 한번 해봐. 네 외할머니가 그러다가 목숨을 잃으면 그건 네 탓인 거야.”
유현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녀는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순간, 그녀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속에 있는 불만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을 달성한 유진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얌전히 말 듣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그 대가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전화를 끊은 뒤, 유현아는 병상에 누워 있는 외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조금만 능력이 있었어도 이대로 부친의 꼭두각시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테고 외할머니의 병세도 지금처럼 심해지지 않았을 것 같았다.
밤 열한 시, 유현아는 긴 한숨을 내쉬며 택시를 잡아 최씨 가문에 돌아왔다.
고용인들도 전부 쉬러 간 시간이었다.
온종일 끼니를 거른 유현아는 살금살금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거실에 도착하자마자 벽쪽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 때문에 화들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도 그녀를 발견한 것 같았다.
‘최지한이 왜 여기 있지? 유아영은?’
“누구 찾아?”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자 최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유현아는 펜과 종이를 꺼내 답을 적었다.
[동생이요.]
최지한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여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유아영이 당신 자리를 대신할까 봐 두렵지도 않아?”
유현아는 그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는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유아영은 집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어. 앞으로 입조심 해야 할 거야. 어떤 말을 해야 하고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할지 당신도 잘 알겠지.”
‘유아영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나한테 경고하는 건가?’
유현아는 낮에 호시탐탐 최지한을 바라보던 유아영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여태 살면서 유아영이 그녀를 괴롭힌 적은 있어도 그녀가 유아영에게 불만을 토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유현아는 유아영과 왕래를 끊고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일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다음 날 오전, 유아영이 유현아의 방 문을 노크했다.
“언니, 아줌마가 그러는데 정원에 연못도 있고 그렇게 경치가 좋대. 나랑 같이 구경하러 가면 안 돼?”
유아영은 순진무구한 소녀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유현아는 슬며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씨 아줌마를 비롯한 고용인들이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거절하면 또 무슨 얘기를 들을지 알 수 없었다.
유현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저택 정원을 걸었다. 유현아는 넘치는 최씨 가문의 재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이 집 어르신은 이미 10년 전에 회사에서 은퇴하고 본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그 뒤로 최지한이 경영권을 떠맡게 되었는데 어르신이 건재하실 때보다 그룹 규모를 더 크게 확장했다고 들었다.
업계에서 최지한을 따를 자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아부하려고 줄을 선 사람도 무수히 많았다.
인맥, 재력 모두 풍부한 최씨 가문은 정원의 연못까지도 워터파크를 연상케 할 정도로 크게 지었다.
연못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을 기르고 있었는데 유현아와 유아영은 다리 위에서 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감상했다.
한참이 지나도록 유아영은 풍경만 감상할 뿐,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리던 순간, 유아영은 갑자기 앞서가는 유현아의 등을 힘껏 밀쳤다.
유현아가 중심을 잡고 뒤돌아서던 순간,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유아영이 연못에 빠졌다.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
유현아는 두 눈을 의심했다.
유아영의 연극은 의도가 너무 선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큰 가문에 CCTV 하나 설치하지 않았을까? CCTV를 돌려보면 모든 게 들통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