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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진퇴양난

  • 오전 내내 일만 하던 유현아는 목이 말라 물을 찾아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계단을 지나던 순간 두 고용인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듣자 하니 유아영 씨는 해외 박사 학위까지 딴 인재라면서요? 예쁘고 게다가 무용도 전공했었대요. 작년에 서울 발레 콩쿠르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고 하더라고요.”
  • “그러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들어온 분은 말도 못 하고 성격도 소심해 보이고 결혼식도 없이 바로 집에 들어왔잖아요. 그게 무슨 사모님이에요.”
  • “도련님이 얼굴에 흉터가 있어도 능력은 출중하시잖아요.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데 어떻게 벙어리와 결혼할 생각을 하셨을까요?”
  • “누가 아니래요? 내가 알기로는 말을 못 하는 벙어리는 장애인 3급 판정이라면서요?”
  • 3급 장애인….
  • 유현아는 눈을 깜빡였다.
  • 사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열 살이 되던 해 큰 화재 사고가 있었는데 그 사고 뒤로 그녀는 성대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해외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확률이 있었지만, 유진화는 그렇게 큰돈을 그녀에게 쓰려고 하지 않았기에 결국 미루다가 이 지경이 되었다.
  •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유현아는 크면서 점차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부친 옆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자식이 아니라 사고로 생긴 사생아일 뿐이라는 것을.
  • 그래서 사람들의 이런 비난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유현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때,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 “누가 당신들한테 최씨 가문 일을 사사로이 의논해도 된다고 했지?”
  • 고개를 돌린 두 가정부는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최지한과 마주했다.
  • 순간 당황한 두 사람이 급하게 변명했다.
  • “도련님, 저희가 잘못했어요! 다음에는 안 그럴게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 남자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뒤에 따라오던 그의 비서가 입을 열었다.
  • “두 분은 내일부터 안 나오셔도 될 것 같네요.”
  • 두 가정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 최지한은 고개를 돌려 유현아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더러워진 그녀의 두 손과 허리에 두르고 있는 앞치마에 향했다. 그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물었다.
  • “당신은 이 집안 안주인이야.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유현아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 소여홍이 그녀한테 온갖 잡일을 시킨 사실을 그는 정녕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 그녀가 말이 없자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 “집에 가정부 있으니까 앞으로 이런 일 하지 마.”
  • 유현아는 속으로 갑갑했지만 겉으로는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녀는 앞치마를 벗고 빗자루를 내려놓고는 위층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직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가정부가 보였다.
  • 유현아는 속으로 별로 내키지 않았다.
  • 남자는 그녀를 도우려고 나선 게 아니라 가문의 체면이 구겨져서 심기가 안 좋을뿐이었다.
  • 신데렐라 이야기는 동화 속에만 존재하며 그녀의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유현아는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었으니까.
  • 위층으로 돌아온 그녀가 침실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 유진화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 한편, 아래층에 있던 최지한에게도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문 비서의 문자였다.
  • [유씨 가문에서 작은 사모님께 연락을 취했습니다.]
  •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 휴대폰이 도청당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유현아는 조용히 부친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 “현아야, 아빠가 급히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 너 최지한 서재에 가서 ‘부동산 협력 계약서’ 사진 한 번만 찍어서 보내줘. 계약서 내용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찍어야 해. 최지한 모르게 행동해 줘.”
  • 유진화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였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유현아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 그녀가 쉽게 대답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유진화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 “네가 효심이 지극한 아이라는 건 아빠도 알아. 네 외할머니가 아직 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 명심해.”
  • 유현아는 외할머니 얘기가 나오자 온몸이 경직되었다.
  • 그녀의 외할머니는 아직 혼수상태로 병원에 있었다. 유진화의 냉혹한 성격이라면 정말 외할머니를 이대로 방치할 수도 있었다.
  • 그나마 남아 있던 부녀의 정도 전부 사라진 순간이었다. 이토록 냉철한 부친은 매번 그녀가 상처받을 말만 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외할머니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그녀에게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 방으로 돌아온 최지한은 외출준비를 했다. 방을 나가기 전, 그는 유현아를 힐끗 보았다.
  • 그녀가 알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유현아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 열한 시가 지나자 가정부들도 각자 방으로 쉬러 갔다.
  • 최지한의 서재 앞에 도착한 유현아는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