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일만 하던 유현아는 목이 말라 물을 찾아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계단을 지나던 순간 두 고용인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듣자 하니 유아영 씨는 해외 박사 학위까지 딴 인재라면서요? 예쁘고 게다가 무용도 전공했었대요. 작년에 서울 발레 콩쿠르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들어온 분은 말도 못 하고 성격도 소심해 보이고 결혼식도 없이 바로 집에 들어왔잖아요. 그게 무슨 사모님이에요.”
“도련님이 얼굴에 흉터가 있어도 능력은 출중하시잖아요.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데 어떻게 벙어리와 결혼할 생각을 하셨을까요?”
“누가 아니래요? 내가 알기로는 말을 못 하는 벙어리는 장애인 3급 판정이라면서요?”
3급 장애인….
유현아는 눈을 깜빡였다.
사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열 살이 되던 해 큰 화재 사고가 있었는데 그 사고 뒤로 그녀는 성대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해외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확률이 있었지만, 유진화는 그렇게 큰돈을 그녀에게 쓰려고 하지 않았기에 결국 미루다가 이 지경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유현아는 크면서 점차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부친 옆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자식이 아니라 사고로 생긴 사생아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의 이런 비난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유현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때,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누가 당신들한테 최씨 가문 일을 사사로이 의논해도 된다고 했지?”
고개를 돌린 두 가정부는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최지한과 마주했다.
순간 당황한 두 사람이 급하게 변명했다.
“도련님, 저희가 잘못했어요! 다음에는 안 그럴게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남자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뒤에 따라오던 그의 비서가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내일부터 안 나오셔도 될 것 같네요.”
두 가정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최지한은 고개를 돌려 유현아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더러워진 그녀의 두 손과 허리에 두르고 있는 앞치마에 향했다. 그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은 이 집안 안주인이야.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유현아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소여홍이 그녀한테 온갖 잡일을 시킨 사실을 그는 정녕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그녀가 말이 없자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집에 가정부 있으니까 앞으로 이런 일 하지 마.”
유현아는 속으로 갑갑했지만 겉으로는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앞치마를 벗고 빗자루를 내려놓고는 위층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직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가정부가 보였다.
유현아는 속으로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를 도우려고 나선 게 아니라 가문의 체면이 구겨져서 심기가 안 좋을뿐이었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동화 속에만 존재하며 그녀의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유현아는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었으니까.
위층으로 돌아온 그녀가 침실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유진화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한편, 아래층에 있던 최지한에게도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문 비서의 문자였다.
[유씨 가문에서 작은 사모님께 연락을 취했습니다.]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휴대폰이 도청당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유현아는 조용히 부친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현아야, 아빠가 급히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 너 최지한 서재에 가서 ‘부동산 협력 계약서’ 사진 한 번만 찍어서 보내줘. 계약서 내용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찍어야 해. 최지한 모르게 행동해 줘.”
유진화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였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현아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녀가 쉽게 대답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유진화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네가 효심이 지극한 아이라는 건 아빠도 알아. 네 외할머니가 아직 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 명심해.”
유현아는 외할머니 얘기가 나오자 온몸이 경직되었다.
그녀의 외할머니는 아직 혼수상태로 병원에 있었다. 유진화의 냉혹한 성격이라면 정말 외할머니를 이대로 방치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부녀의 정도 전부 사라진 순간이었다. 이토록 냉철한 부친은 매번 그녀가 상처받을 말만 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외할머니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그녀에게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최지한은 외출준비를 했다. 방을 나가기 전, 그는 유현아를 힐끗 보았다.
그녀가 알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유현아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