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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자친구

전 남자친구

진유

Last update: 2021-12-02

화1 전 남자친구

  • 쾅쾅쾅-
  • "야, 유아연!"
  •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현재 시각 오후 11시 하고 2분. 두드리는 문 틈새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쾅쾅 울렸다. 문을 두드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다시 손을 들어 올리려는 행동 전에 달칵, 문이 열렸다.
  • "왜!"
  • 거칠게 열린 문에 한발 물러난 흑발의 남자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열리는 문 사이로는 통, 하고 작은 체구가 튀어나왔다.
  • 남자는 열린 문을 한 손으로 터억 잡았다. 이미 열을 받을 대로 받아 문을 붙잡은 손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핏줄이 툭툭 돋았다.
  • "노래 안 끄냐?"
  • 이를 악문 남자의 저음에, 문을 열고 상큼하게 나온 여자는 분위기에 맞게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뭘 하고 있던 건지 이 밤에는 어울리지 않는 나풀나풀한 하늘색의 원피스를 입고선 비스듬히 문가에 기댔다. 그리고는 최대한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 "싫은데?"
  • "유아연 너……."
  • 얼마나 힘을 줬으면 턱 근육이 씰룩거리는 남자의 모습에 아연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옅은 카푸치노 브라운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은 작은 머리 중앙에 통, 말려 있었다. 얼굴이 작아 흡사 올려 묶은 머리와 크기가 엇비슷해 보였다. 화장기 없는 맑은 피부에 오목조목 들어간 눈코입은 자기주장이 심했다.
  • “응, 지강유. 내가 내 집에서 노래도 못 틀어 놓고 있냐?"
  • 하지만 더 자기주장이 심한 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앞에 서 있는 강유의 이목구비였다. 시원하게 찢어진 눈과 흑색 눈동자, 그리고 무심한 듯 넘긴 흑발. 그에 대조되는 흰 피부는 아연 덕분에 열이 받아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 제 이름을 부르는 걸 비꼬듯이 따라 한 아연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댕강 높은 강유를 향해 얄밉게 혀를 쏙 내밀었다.
  • "그리고 너 2층 올라오지 마라?"
  • 쾅-
  • 거칠게 문을 닫고 들어온 아연은 한 방 먹여줬다는 생각에 키득키득 웃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내일 있는 데이트를 위해 옷을 고르고 있었는데 방해꾼 지강유가 나타나 중단됐다. 에이씨, 괜히 시간만 버렸잖아.
  • "뭐를 입을까나."
  • 크게 틀어 놓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아연의 취향이 잔뜩 배인 원피스와 치마 그리고 밝은 옷들이 가득한 룸은 여자라면 누구라도 꿈꿀 듯한 공간이었다.
  • 꾸미는 걸 좋아해 드레스 룸 가득 옷과 신발 그 외 액세서리가 잔뜩이었다. 이것저것 꺼내며 거울로 다다다 뛰어가 대 보고, 신어봤다.
  • 한창 옷을 고르고 있는데 순간 들어오는 냄새에 아연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손에 들린 치마를 놓고 허겁지겁 거실로 나갔다. 잠깐 열어둔 거실 창문 틈으로 담배 냄새가 스며들었다.
  •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범인은 딱 하나였다. 아연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 "아아악! 지강유!"
  • 그대로 뛰쳐나간 아연은 와다다 계단을 내려갔다. 푸른 잔디가 잘 가꾸어진 곳에 강유는 설치된 해먹 위에 긴 다리를 쭉 펴고 누워 있었다. 손에는 연기가 폴폴 나는 담배를 들고.
  • 계단을 내려간 아연은 정원을 향해 미친 듯이 소리쳤다.
  • "야 내가 담배 피우지 말라고 했지?! 옷에 냄새 배! 아니 집에 냄새 밴다고!"
  • 흰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소리를 지르던 아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유는 보란 듯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필터까지 타오른 담배를 해먹 옆에 설치된 잿덜이에 지지며 연기를 깊게 내뱉었다.
  • 거리가 그렇게 가깝지 않아 아연에게까지 연기가 오진 않았지만, 위로 올라가는 연기는 집으로 스며들었다. 연기를 보며 아연의 얼굴이 열 받아 붉어지지만, 그는 느긋하게 웃었다.
  • "명상 중이야."
  • 저 뻔뻔한! 거짓말에도 성의가 없잖아!
  • "명상을 누가 담배 피우면서 해!"
  • "내가."
  • 으득. 이번엔 아연의 이가 갈렸다. 이렇게 치사하게 나온다 이거지?
  • "그래? 너 오늘 잠 못 잘 줄 알아라."
  • 잔뜩 독기를 품은 아연이 매섭게 강유를 노려보다가 휙 몸을 틀었다.
  • "야야."
  • 언제 일어난 건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아연의 손목을 낚아챘다. 큰 손에 감기고도 남을 얇은 손목이 느슨하게 잡혔다. 그는 귀찮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너 또 새벽에 뛰려고 하지?"
  • "뭔 상관?"
  • "나 요즘 작업 중이다? 협조 좀 하자?"
  • 키가 160센티가 겨우 되는 자신을 내리깔아 바라보는 강유의 시선에 아연은 자존심이 상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186센티인 그가 아연과 시선을 맞출 방법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키만 멀대같이 커 가지곤.
  • 가까이 있으니 방금 태운 진한 담배 냄새와 흐릿한 알코올 냄새가 아연의 코를 찔렀다. 금방 다시 얼굴이 구겨졌다.
  • "너 술 마셨냐?"
  • "왜 냄새나?"
  • 킁킁. 자기 옷을 들어 냄새를 맡은 강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 "안 나는데? 어디가 나?"
  • 훅 고개를 숙인 강유가 어깨를 아연의 얼굴 쪽으로 들이밀었다. 갑자기 다가온 그 때문에 아연이 주춤 한발 물러섰다.
  • "점심때 몇 잔 마신 게 단데.”
  • 여전히 가까운 얼굴에 아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얘는 뭐 이렇게 또 가까이 오고…….
  • 강유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여전히 조각 같은 코는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높았고, 잘 깎아 놓은 듯한 턱선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을지도.
  • "너, 너는 무슨 술을……, 점심에 마시냐."
  • 확 긴장한 아연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자, 강유가 냄새를 확인하다 말고 힐끔 아연을 바라봤다. 여전히 숙인 허리는 키가 작은 아연과 시선을 마주 닿기에 충분했다.
  • 미세하게 흔들리던 아연의 동공을 확인한 강유는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는 픽 웃으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아연을 바라봤다.
  • "유아연 후각 예민한 건 알아줘야 해."
  • "뭐, 뭐래."
  • "뛰지 마라? 오빠 작업하신다."
  • 슥슥. 아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은 강유는 1층 집으로 들어갔다. 거의 반강제로 꾹꾹 눌린 거나 다름없었다. 그의 뒷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다 아연이 빽 소리쳤다.
  • "작업은 네 작업실 가서 해!"
  • 대꾸도 없는 강유의 모습에 아연이 씩씩거리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쿵, 닫히는 문에 기댄 아연은 손을 들어 올려 가슴을 꾹 눌렀다. 심장이 쿵쾅쿵쾅 정신 없이도 뛰어댔다.
  • "미쳤어……."
  • 스르륵. 문을 타고 내려앉은 아연이 아직까지 진정 되지 않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멍한 시야로 아까 강유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 열일곱의 강유, 스물셋의 강유, 스물아홉의 강유.
  • "유아연, 정신 차리자."
  • 착착-
  • 아연이 제 뺨을 다소 거칠게 쳤다.
  • 지강유. 열일곱의 철없던 시절부터 스물셋 성인이 되기까지 연애한 전 남자친구.
  • 6년을 연애했고, 6년을 헤어져 스물아홉인 지금 '전 남자친구 지강유'와 단독주택에 함께 거주 중이었다.
  • ***
  • 6년 전.
  • "지강유. 마흔 시간 째야."
  •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물감 냄새, 이젤 특유의 나무 냄새. 아연은 이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 원목 이젤의 높이와 아연의 키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연은 단호한 얼굴로 여전히 자신이 왔음에도 이젤 앞에 앉아 눈을 꾹 감고 있는 강유를 바라봤다.
  • "야."
  • "……."
  • "야!"
  • 결국 버럭 소리친 아연의 모습에 강유가 스르르 눈을 떴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약간 검게 그을린 피부. 여전히 찢어져 날카로운 눈매.
  • 강유는 미세하게 미간을 찡그렸지만, 곧 그 표정마저 풀렸다.
  • "왔어."
  • "왔어?"
  • 느긋한 강유와는 다르게 흰 피부에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어금니를 악문 아연은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 "왔냐고? 그게 다야?"
  • "또 왜."
  • "하, 지강유. 너 장난해 지금?"
  • 탁-
  • 아연은 들고 있던 클러치백을 바닥에 던지듯 놓아버렸다. 팽개치듯 내던져진 클러치는 바닥과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신경이 예민한 그는 그 소리에 잠시 눈을 내리깔아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다 다시 느릿하게 아연을 바라봤다.
  • 의자에 앉아 있는 강유와 서 있는 아연의 시선 높이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차가울 정도로 메마른 그의 흑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아연의 숨이 턱 막혔다. 아니, 이건 가슴이 꽉 메는 거였다. 답답함에, 속상함에, 서운함에.
  • 그는 피곤한 듯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쓸어내리려다, 손에 묻는 물감을 확인한 후 다시 손을 차분히 내렸다.
  • "너 전역한 지 그저께야 알아?"
  • "알아."
  • "근데 그저께부터 여기 박혀 있던 것도 알아?"
  • "……알아."
  • 조금 늦은 대답에 아연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전역 날짜 맞춰 꽃단장하고 남들 다 한다는 꽃신 신는 이벤트 기대했던 자신이 미치도록 한심했다. 전역하기 몇 주 전부터 작업실에 들려야 한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던 그가 설마 진짜로 이렇게 바로 작업실로 올 줄 몰랐다.
  • 아무리 그림을 사랑해도,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어도, 그 아무리 2년 동안 그 재능 썩혀 왔어도 이건 아니었다. 그가 잘 되길 바라고 또 바랐던 게 바로 아연 자신이었으니까.
  • 여전히 무심했고, 여전히 단호한 강유는 이제는 이젤 옆에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세워 두기까지 한다. 허탈함이 온몸을 훑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 갈고 갈아 날카로운 칼이 된 말이 아연의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 "그림 좀 그린다고 유세 떨어?"
  • "유아연."
  • 아연의 날 선 말에 강유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연을 불렀다. 아니, 부른 게 아니지. 저건 그만하라는 일종의 강유 나름대로 표현 방식이다. 아연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강유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겨울 정도로 너무나도 잘.
  • 아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해 줄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뭔데. 난 대체 너한테 뭔데.
  • "그래, 너 군대 가서 힘든 거 알아. 그래도 전화로 투정 한 번 안 부리고, 휴가받으면 꼬박꼬박 나 만나고, 군대에서도 나 많이 그리워하고 그럼에도 나 정말 많이 사랑해준 거 알아. 그걸 어떻게 내가 몰라."
  • "근데."
  • 차가운 강유의 모습에 아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허공에서 한참을 서로 바라보던 시선을 먼저 피한 건 아연이다.
  • 아연은 떨어트린 클러치를 주워들었다. 엉망으로 던진 만큼 그새 긁힌 자국들이 선명했다. 눈물이 곧 터질 듯 코끝이 맵고 목이 메었다.
  • "너 고생한 만큼 밖에서 속 앓고 힘들어했던 건 나야."
  • 눈물이 점점 차올라 강유의 얼굴마저 흐릿하게 보였다.
  • "그 시간 동안 너 좋아하는 그림 한 번 제대로 못 그렸던 거, 그거 내가 너무 속상해서……!"
  • 결국 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강유의 찌푸린 미간이 서서히 풀렸다. 그의 진했던 인상이 물을 탄 수채화처럼 옅어졌다.
  • 아연은 손을 들어 벅벅 눈물을 닦았다. 자존심이 미친 듯이 상했다.
  •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나 한 번쯤은 안아줬어야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