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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부정했던 과거

  • "안 데려다 줘도 된다니까. 이게 뭐야 오빠 또 택시 타고 가야 하잖아."
  • 저녁을 먹고 영화까지 본 뒤 아연을 굳이 데려다 주겠다며 집 앞으로 온 은호는 아연의 걱정어린 투정에도 그저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 하는 그를 괜히 귀찮게 한 것만 같아 아연은 인상을 찡그렸다.
  • "차 없으면 데려다 주지 마."
  • 제 걱정에 툴툴거리는 아연이 귀여운지 은호는 착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에는 항상 차 가지고 데이트하자."
  • 은호의 웃음에 아연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으며 활짝 웃었다. 사람이 다정해도 어쩜 이리 다정할 수 있을까.
  • "바보."
  • "바보면 어때?"
  • "내일 출근이나 잘해!"
  • "아연이도 출근 잘하고. 아, 그림 수정 때문에 이제 바빠진다고 했나?"
  • 은호는 까먹었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자 시무룩해졌다.
  • "내가 한가할 땐 아연이가 바쁘네."
  • "그러게, 그렇게 되네 우린. 이제 대회 기간이라서 조금 바빠질 거야."
  • 한숨을 푹 내쉬는 아연을 보며 은호는 온종일 돌아다니느라 빨개진 아연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 "아연아 그 일 언제까지였지?"
  • "그건 왜?"
  • 아연의 눈썹을 치켜세우며 은호를 바라봤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여전히 아연의 볼을 매만졌다.
  • "정직원이 아니니까……. 그냥 아연이 그림 계속 그리고 싶으면 내가 개인……."
  • "됐어. 그 얘긴 하지 말라고 했잖아."
  • 아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상한 아연의 모습에 은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미안해. 기분 상하라고 한 말은 아닌데……. 그냥 아연이 하고 싶은 그림 계속 못 그리니까, 거기서 일하면 애들 그림만 봐줘야 하고……."
  •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아연이 손을 들어 은호의 손을 제 볼에서 떼어냈다. 아까까지 미소가 피어났던 얼굴에는 이제 찡그린 주름이 잡혔다.
  • "그냥, 이제 너도 스물아홉이고 하니까?"
  •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무마하려는 은호의 모습에 아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스물아홉에 정직원도 아닌 알바나 뛰고 있으니까 옆에서 오빠가 보기에 답답할 수도 있겠다."
  • "아니야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닌 거 알잖아."
  •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인 거 다 알아. 이게 뭐야. 좋게 데이트해서 지금 이렇게 마지막에 분위기 다 망쳤잖아."
  • 더는 웃지 않는 아연의 모습에 은호는 실수했다는 듯 와락 아연을 끌어안았다.
  • "미안, 내가 무조건 잘못했어. 미안해."
  • "흥."
  • "미안해 기분 풀어."
  • 체구가 작은 아연은 은호의 품에 쏙 들어갔다. 미안하다는 은호의 말에 아연은 더 토라진 척해볼까 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회사 가는 사람을 밖에 세워두고 그러고 싶진 않았다.
  • "알겠어. 이제 가, 안녕."
  • 은호의 품에서 나온 아연은 손을 휙휙 흔들었다. 은호의 회사와 아연이 사는 집 자체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덕분에 은호는 짬을 내서 아연을 보러 오곤 했다.
  • 끝까지 아쉬워하는 은호를 보내고는 아연은 대문을 열었다.
  • 푸른 잔디가 깔린 정원에는 소나무와 함께 감나무가 있었다. 그 뒤에는 편히 쉴 수 있는 해먹과 2인용 나무 의자가 있는 걸 제외하고는 썰렁할 정도로 심플한 정원이었다. 작은 화분이나 꽃조차 없었다.
  • 자연스럽게 1층으로 시선이 향한 아연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2층 계단으로 향했다.
  • 1층은 전면 유리창으로 안에서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지만, 시스템을 풀지 않는 이상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 집으로 들어온 아연은 차갑게 식은 집에 보일러부터 틀었다. 아연은 해외 출장이 잦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 와서 혼자 산 기간이 길었다.
  • "으아, 이걸 다 언제 해."
  • 직장 겸 알바로 뛰고 있는 미술 보조 일은 언제나 피곤했다. 그림에 'ㄱ'자도 모르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그림 그리는 수업을 하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학교에 제출하는, 또는 그림 대회에 제출하는 그림들은 전부 아연의 손을 80% 이상 거쳐 탄생했다.
  • 후딱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연은 편한 작업복과 함께 아이들의 그림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원래 같으면 일을 이렇게 집까지 가져오는 편은 아니지만,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이번 달만 해도 수강을 시작한 아이들이 열 명이 넘었다.
  • "이게 다 지강유 때문이지!"
  • 천재 화가로 유명세를 탄 강유가 이제는 TV까지 나오기 시작하니, 모든 엄마들이 제 아이에게 그림을 가르치기에 미쳐 있었다. 그 배경에는 강유와 같은 대학교, 심지어 동기로 있었던 아연의 스펙 덕분이기도 했지만.
  • S미대에 합격해 다녔던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연은 졸업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퇴였다. 문제는 아연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녀가 휴학했거나 졸업을 미루고 있다는 정도로만 안다는 거였다.
  •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때의 아연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일자리를 구할 기회를 버릴 수도 없었다.
  • "어? 뭐야? 왜 없어."
  • 학원에서 쓰는 팔레트와 수채화 물감 박스 하나만 달랑 들고 왔었다. 하늘색이 필요해 팔레트를 열었지만, 하늘색은 물론이거니와 흰색과 파란색도 다 썼다. 심지어 수채화 물감에서도 아이들이 장난을 쳐 놓은 건지 물감 몇 개가 홀랑 사라져 있었다.
  • 어쩔 수 없이 집에 박아둔 물감이라도 찾으려고 창고로 쓰는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무용지물인 걸 알기 때문에 아연은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 학교를 자퇴하고 어쩔 수 없이 전공을 그나마 살려 돈을 벌 수 있던 게 이 미술 보조 선생이었다. 체구가 작은 아연은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어느 곳에서도 바라지 않았고, 막상 시작해도 아연 스스로가 버텨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미술이 하고 싶어 보조 선생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 '해도 해도 난 아니라는데 그걸 내가 알고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뭘 더 해!'
  • 스물하나, 자신이 했던 악에 가까웠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은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 간당간당하게 대학에 입학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쟁쟁한 재능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짓밟힐 만큼 짓밟혔다. 오래 봐 왔던 강유의 그림이 이미 눈에 익어서 제 선을 못 따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자존심 상할 정도로 잘 알고 있던 것도 아연 자신이었다.
  • 그대로 주저앉은 아연은 대충 흘려 묶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 "짜증 나……."
  • 그냥 다 버리고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저 그림들을 보자니 속이 답답했다.
  •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어난 아연은 휴대폰을 찾아들어 현관문으로 향했다. 당장 이 늦은 시간에 물감을 살 곳도 없을뿐더러 내일 학원을 일찍 가면 완성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저 무작정 현관을 나섰다.
  • 2층 계단 끝과 마주 보는 1층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 심호흡을 짧게 한 아연은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
  • 몇 분이 지났을까 지금쯤이면 '왜'라며 까칠한 강유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뭐야, 얘."
  • 다시 벨을 눌렀지만, 똑같았다.
  • "아이씨!"
  • 집에 없는 것 같아 아연이 몸을 틀어 다시 올라가려 할 때, 대문이 열렸다.
  • 2층 계단에 선 아연과 이제 막 대문을 열고 들어 온 강유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아연을 바라보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지금 들어오냐?"
  • "지금 들어오고 있는 건 너거든?"
  • 어이가 없어 아연이 허, 하며 숨을 내뱉었다. 강유는 별 관심 없었는지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기 집으로 향했다.
  • "지강유.”
  •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에 아연이 강유를 불렀다. 부름에 돌아본 그는 대답도 없이 아연을 바라봤다.
  • "나 물감 좀 빌려 줘."
  • 잠시 강유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싶어 아연을 훑어보는 그의 시선에 아연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
  • "왜."
  • 짤막한 물음에도 아연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 그림에 회의를 느꼈고 아연은 그걸 이겨내지 못했다. 그림과 모든 삶을 함께한 강유 마저 부정했던 과거가 아연의 입을 무겁게 만들었다.
  • ***
  • 쾅쾅쾅!
  • 술에 취해 제가 어떤 꼴인지도 모르는 아연은 그저 문을 부서지게 두드렸다. 문은 아연의 굳건한 주먹에도 야속하리만큼 단단했다. 쾅쾅. 하얀 주먹이 붉어질 때까지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 "지강유 나와!"
  • 1층 현관 앞에 주저앉아 있는 힘껏 문을 두드리던 아연은 줄줄 흐르는 눈물을 벅벅 닦아냈다.
  • "흐윽. 전화도 안 받고! 만나주지도 않고……!"
  • 바로 아래층에 강유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어 괴로웠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아연은 문에 매달리듯 스르륵 주저앉았다.
  • "흐으윽, 내가 잘못했어 강유야……."
  •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아연의 마지막 기억은 대답 없는 강유의 집을 두드린 것까지였다.
  • 달칵-
  • 아연이 문을 두드리고 한참이 지나 영영 열리지 않을 것 같던 현관문은 너무나 손쉽게 열렸다. 이미 울다 지쳐 잠에 빠진 아연은 술기운에 정신도 못 차릴 만큼 취해 있었다.
  • 집에서 나온 강유는 그런 아연의 앞에 주저앉았다. 작고 작은 그녀의 앞에. 물끄러미 취해 잠든 그녀를 바라봤다.
  •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네가 이렇게 우는 게 나한테는 내가 받을 상처보다 아파서 못 놓고 있었어."
  • 조심스럽게 흐트러진 아연의 머리카락을 넘긴 강유의 얼굴도 그녀 못지않게 까칠했다.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평소보다도 더 낮았다. 쭉 잠을 못 잔 건지, 그의 얼굴에는 짙게 묵은 피로감마저 쌓여 있었다.
  • 웅크려 있는 아연의 손을 조심스럽게 제 손바닥 위에 올렸다. 아기처럼 작은 손이 그의 마음을 엉망으로 흩트려 놓았다.
  •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던 강유도 끝내 고개를 떨궜다. 툭. 영영 아연은 알지 못할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 아침에 아연이 눈을 떴을 땐 제 방 침대 위였다. 흐릿한 시야에도 이불은 곱게 몸을 감싸고 있었고 침대 옆 테이블에는 쪽지 하나 없이 아직 따듯한 온기를 머금고 있는 계란찜이 놓여 있었다. 아연이 해장을 계란찜으로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뛰쳐나갔지만, 그땐 이미 1층은 텅 비어 있었다.
  • "말도 안 돼……. 흐으윽."
  • 며칠을 울며 강유를 찾았지만, 결국 들려오는 소식은 미뤘던 유학을 갔다는 말뿐이었다. 아연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버린 강유는 그렇게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