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영화까지 본 뒤 아연을 굳이 데려다 주겠다며 집 앞으로 온 은호는 아연의 걱정어린 투정에도 그저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 하는 그를 괜히 귀찮게 한 것만 같아 아연은 인상을 찡그렸다.
"차 없으면 데려다 주지 마."
제 걱정에 툴툴거리는 아연이 귀여운지 은호는 착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항상 차 가지고 데이트하자."
은호의 웃음에 아연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으며 활짝 웃었다. 사람이 다정해도 어쩜 이리 다정할 수 있을까.
"바보."
"바보면 어때?"
"내일 출근이나 잘해!"
"아연이도 출근 잘하고. 아, 그림 수정 때문에 이제 바빠진다고 했나?"
은호는 까먹었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자 시무룩해졌다.
"내가 한가할 땐 아연이가 바쁘네."
"그러게, 그렇게 되네 우린. 이제 대회 기간이라서 조금 바빠질 거야."
한숨을 푹 내쉬는 아연을 보며 은호는 온종일 돌아다니느라 빨개진 아연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연아 그 일 언제까지였지?"
"그건 왜?"
아연의 눈썹을 치켜세우며 은호를 바라봤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여전히 아연의 볼을 매만졌다.
"정직원이 아니니까……. 그냥 아연이 그림 계속 그리고 싶으면 내가 개인……."
"됐어. 그 얘긴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상한 아연의 모습에 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안해. 기분 상하라고 한 말은 아닌데……. 그냥 아연이 하고 싶은 그림 계속 못 그리니까, 거기서 일하면 애들 그림만 봐줘야 하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아연이 손을 들어 은호의 손을 제 볼에서 떼어냈다. 아까까지 미소가 피어났던 얼굴에는 이제 찡그린 주름이 잡혔다.
"그냥, 이제 너도 스물아홉이고 하니까?"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무마하려는 은호의 모습에 아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물아홉에 정직원도 아닌 알바나 뛰고 있으니까 옆에서 오빠가 보기에 답답할 수도 있겠다."
"아니야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닌 거 알잖아."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인 거 다 알아. 이게 뭐야. 좋게 데이트해서 지금 이렇게 마지막에 분위기 다 망쳤잖아."
더는 웃지 않는 아연의 모습에 은호는 실수했다는 듯 와락 아연을 끌어안았다.
"미안, 내가 무조건 잘못했어. 미안해."
"흥."
"미안해 기분 풀어."
체구가 작은 아연은 은호의 품에 쏙 들어갔다. 미안하다는 은호의 말에 아연은 더 토라진 척해볼까 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회사 가는 사람을 밖에 세워두고 그러고 싶진 않았다.
"알겠어. 이제 가, 안녕."
은호의 품에서 나온 아연은 손을 휙휙 흔들었다. 은호의 회사와 아연이 사는 집 자체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덕분에 은호는 짬을 내서 아연을 보러 오곤 했다.
끝까지 아쉬워하는 은호를 보내고는 아연은 대문을 열었다.
푸른 잔디가 깔린 정원에는 소나무와 함께 감나무가 있었다. 그 뒤에는 편히 쉴 수 있는 해먹과 2인용 나무 의자가 있는 걸 제외하고는 썰렁할 정도로 심플한 정원이었다. 작은 화분이나 꽃조차 없었다.
자연스럽게 1층으로 시선이 향한 아연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2층 계단으로 향했다.
1층은 전면 유리창으로 안에서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지만, 시스템을 풀지 않는 이상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집으로 들어온 아연은 차갑게 식은 집에 보일러부터 틀었다. 아연은 해외 출장이 잦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 와서 혼자 산 기간이 길었다.
"으아, 이걸 다 언제 해."
직장 겸 알바로 뛰고 있는 미술 보조 일은 언제나 피곤했다. 그림에 'ㄱ'자도 모르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그림 그리는 수업을 하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학교에 제출하는, 또는 그림 대회에 제출하는 그림들은 전부 아연의 손을 80% 이상 거쳐 탄생했다.
후딱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연은 편한 작업복과 함께 아이들의 그림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원래 같으면 일을 이렇게 집까지 가져오는 편은 아니지만,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이번 달만 해도 수강을 시작한 아이들이 열 명이 넘었다.
"이게 다 지강유 때문이지!"
천재 화가로 유명세를 탄 강유가 이제는 TV까지 나오기 시작하니, 모든 엄마들이 제 아이에게 그림을 가르치기에 미쳐 있었다. 그 배경에는 강유와 같은 대학교, 심지어 동기로 있었던 아연의 스펙 덕분이기도 했지만.
S미대에 합격해 다녔던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연은 졸업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퇴였다. 문제는 아연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녀가 휴학했거나 졸업을 미루고 있다는 정도로만 안다는 거였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때의 아연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일자리를 구할 기회를 버릴 수도 없었다.
"어? 뭐야? 왜 없어."
학원에서 쓰는 팔레트와 수채화 물감 박스 하나만 달랑 들고 왔었다. 하늘색이 필요해 팔레트를 열었지만, 하늘색은 물론이거니와 흰색과 파란색도 다 썼다. 심지어 수채화 물감에서도 아이들이 장난을 쳐 놓은 건지 물감 몇 개가 홀랑 사라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박아둔 물감이라도 찾으려고 창고로 쓰는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무용지물인 걸 알기 때문에 아연은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를 자퇴하고 어쩔 수 없이 전공을 그나마 살려 돈을 벌 수 있던 게 이 미술 보조 선생이었다. 체구가 작은 아연은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어느 곳에서도 바라지 않았고, 막상 시작해도 아연 스스로가 버텨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미술이 하고 싶어 보조 선생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해도 해도 난 아니라는데 그걸 내가 알고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뭘 더 해!'
스물하나, 자신이 했던 악에 가까웠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은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간당간당하게 대학에 입학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쟁쟁한 재능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짓밟힐 만큼 짓밟혔다. 오래 봐 왔던 강유의 그림이 이미 눈에 익어서 제 선을 못 따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자존심 상할 정도로 잘 알고 있던 것도 아연 자신이었다.
그대로 주저앉은 아연은 대충 흘려 묶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짜증 나……."
그냥 다 버리고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저 그림들을 보자니 속이 답답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어난 아연은 휴대폰을 찾아들어 현관문으로 향했다. 당장 이 늦은 시간에 물감을 살 곳도 없을뿐더러 내일 학원을 일찍 가면 완성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저 무작정 현관을 나섰다.
2층 계단 끝과 마주 보는 1층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 심호흡을 짧게 한 아연은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
몇 분이 지났을까 지금쯤이면 '왜'라며 까칠한 강유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야, 얘."
다시 벨을 눌렀지만, 똑같았다.
"아이씨!"
집에 없는 것 같아 아연이 몸을 틀어 다시 올라가려 할 때, 대문이 열렸다.
2층 계단에 선 아연과 이제 막 대문을 열고 들어 온 강유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아연을 바라보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들어오냐?"
"지금 들어오고 있는 건 너거든?"
어이가 없어 아연이 허, 하며 숨을 내뱉었다. 강유는 별 관심 없었는지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기 집으로 향했다.
"지강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에 아연이 강유를 불렀다. 부름에 돌아본 그는 대답도 없이 아연을 바라봤다.
"나 물감 좀 빌려 줘."
잠시 강유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싶어 아연을 훑어보는 그의 시선에 아연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
"왜."
짤막한 물음에도 아연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림에 회의를 느꼈고 아연은 그걸 이겨내지 못했다. 그림과 모든 삶을 함께한 강유 마저 부정했던 과거가 아연의 입을 무겁게 만들었다.
***
쾅쾅쾅!
술에 취해 제가 어떤 꼴인지도 모르는 아연은 그저 문을 부서지게 두드렸다. 문은 아연의 굳건한 주먹에도 야속하리만큼 단단했다. 쾅쾅. 하얀 주먹이 붉어질 때까지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지강유 나와!"
1층 현관 앞에 주저앉아 있는 힘껏 문을 두드리던 아연은 줄줄 흐르는 눈물을 벅벅 닦아냈다.
"흐윽. 전화도 안 받고! 만나주지도 않고……!"
바로 아래층에 강유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어 괴로웠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아연은 문에 매달리듯 스르륵 주저앉았다.
"흐으윽, 내가 잘못했어 강유야……."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아연의 마지막 기억은 대답 없는 강유의 집을 두드린 것까지였다.
달칵-
아연이 문을 두드리고 한참이 지나 영영 열리지 않을 것 같던 현관문은 너무나 손쉽게 열렸다. 이미 울다 지쳐 잠에 빠진 아연은 술기운에 정신도 못 차릴 만큼 취해 있었다.
집에서 나온 강유는 그런 아연의 앞에 주저앉았다. 작고 작은 그녀의 앞에. 물끄러미 취해 잠든 그녀를 바라봤다.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네가 이렇게 우는 게 나한테는 내가 받을 상처보다 아파서 못 놓고 있었어."
조심스럽게 흐트러진 아연의 머리카락을 넘긴 강유의 얼굴도 그녀 못지않게 까칠했다.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평소보다도 더 낮았다. 쭉 잠을 못 잔 건지, 그의 얼굴에는 짙게 묵은 피로감마저 쌓여 있었다.
웅크려 있는 아연의 손을 조심스럽게 제 손바닥 위에 올렸다. 아기처럼 작은 손이 그의 마음을 엉망으로 흩트려 놓았다.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던 강유도 끝내 고개를 떨궜다. 툭. 영영 아연은 알지 못할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아침에 아연이 눈을 떴을 땐 제 방 침대 위였다. 흐릿한 시야에도 이불은 곱게 몸을 감싸고 있었고 침대 옆 테이블에는 쪽지 하나 없이 아직 따듯한 온기를 머금고 있는 계란찜이 놓여 있었다. 아연이 해장을 계란찜으로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뛰쳐나갔지만, 그땐 이미 1층은 텅 비어 있었다.
"말도 안 돼……. 흐으윽."
며칠을 울며 강유를 찾았지만, 결국 들려오는 소식은 미뤘던 유학을 갔다는 말뿐이었다. 아연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버린 강유는 그렇게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