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갑작스러운 그의 모습에 아연은 어떤 행동도 말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돌처럼 딱딱히 굳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이야."
그의 첫 마디. 인사 하나 없이 떠난 그가 건넨 첫 마디.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아연은 황급히 2층 계단으로 향했지만, 그러면 강유가 서 있는 현관문 앞을 지나쳐야 한다는 사실에 다시 걸음을 멈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국은 털썩 주저앉아버린 아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터벅터벅.
그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져 갔다. 푹신한 잔디를 밟는 소리부터 자신의 앞에 주저앉는 소리까지. 모든 신경이 그에게로 향했다.
"어디 아파?"
마치 오늘 아침에 굿모닝 인사라도 한 사람처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그의 말에, 아연은 눈물이 차올랐다.
그의 단호함과 무심함에 이별했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주는 행복이 너무 커 그를 사랑했었다. 온전히 전해지던 그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아연이 아직까지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흑……."
결국 울음소리가 새어나갔다. 그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 이런 모습으로 재회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하지만 강유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큰 손으로 아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한참을 울던 아연은 그 시간 동안 앞에서 묵묵히 머리만 쓰다듬어 주고 있는 그를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눈물에 온통 젖은 아연의 모습에도 강유는 슥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다.
"다 울었어?"
"왜 우는지 안 물어봐?"
코맹맹이 소리로 묻는 말에 강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고 있으니까."
유아연이면 하나부터 백까지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 여기 살 거야."
"……."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와 헤어지고 재회하는 꿈을 수백 번도 더 꿨다. 행복한 꿈이어도 결국 깨면 눈물바다로 진이 다 빠지는 날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 알게 되는 사실 하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거.
그걸 그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바라보고 있겠지.
오래한 시간이 길수록 그 시간의 소중함은 무뎌지고, 그 소중함이 주는 사람의 의미가 옅어진다. 그리고 결국 그것들은 상처가 되어 그들을 찢어 놓는다.
“응.”
짧은 대답이었지만, 아연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강유 자신이었다.
***
말로 정립하진 않았지만 둘은 '친구'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그 기간의 공백과 서로 사랑했던 6년이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아연은 괴로워했다.
가끔 마주칠 때 아연은 어색함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기 바빴다. 강유는 그런 아연을 재촉하지 않았다. 아연이 온전히 강유를 그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한발 물러났다. 그건 서로에게 예의이자 아름다운 이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렇게 2년. 둘은 다시 함께 살았다. 이곳, 이 자리에서.
왜 돌아왔느냐는 아연의 물음에 강유는 그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알아. 나 때문에 돌아온 건 아니잖아. 나도 뭘 어떻게 해 볼 생각 없어. 그저! 그때 왜 날 그렇게 끊어냈는지 물어보는 것도 안 되니? 모든 지나간 과거는 들춰내면 안 돼?"
아연의 흰 피부에 얼마나 힘을 준 건지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물감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준 아연은 실소를 터트렸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허탈했다.
강유가 돌아온 그 다음 날, 첫눈에 반했다는 은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은호가 좋았지만, 그때는 숨기 바빴던 아연의 비겁함이었다.
"어. 안 돼."
"뭐……?"
단호한 그의 대답에 아연이 충격받은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말을 끝낼 생각이 없는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들춰내고 싶지 않아."
직설적인 화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쓸데없이 감정 낭비하는 걸 싫어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너무 아팠다. 지금 왜 제 가슴이 이렇게 아픈지, 왜 이래야 하는지 아연 스스로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아연이었다.
"갈게."
다시 함께 살며 2년 만에 처음으로 서로에 대한 작은 감정을 드러냈던 날이었다.
도망치듯 그의 집을 나온 아연은 황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상관없었다. 그의 말처럼 다 지난 일이니까.
***
"아연 쌤 나 먼저 퇴근할게?"
"네, 전 이거 마무리하고 들어갈게요."
미술 학원에 원장으로 있는 승혜는 올해로 서른아홉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 퇴근 시간 맞춰 집에 달려가기 바빴다.
한창 바쁜 시즌이지만, 승혜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럴 거면 선생 하나를 더 고용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뿐이었다.
홀로 남아 작품을 마무리 짓던 아연은 물감 묻은 손을 박박 닦았다. 착용하던 앞치마와 토시까지 제 사물함에 넣어두고는 학원을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날은 꽤 추웠다.
지이잉-
마침 울리는 진동에 아연은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 뜨는 이름에 잠시 휴대폰을 꺼버릴까 생각하다 꾹 참고 화면을 터치했다.
"왜."
다소 까칠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누나 어디야? 나 지금 누나네 집 앞인데!
세 살 차 남동생 우연이었다.
"이제 퇴근했어. 왜 왔는데?"
-와, 누나 진짜 서운하다. 남동생이 몇 달 만에 한국 들어왔는데 물어보지도 않고. 나 이거 국제전화 아니다?
"그래, 그래서 뭐. 왜!"
괜히 성질에 버럭 소리치자 우연은 황당한지 어버버 거리다가는 자기도 왁 소리쳤다.
-내가 오면 안 될 곳 왔냐!
"들어가든가 왜 전화질이야!"
올해 스물여섯인 우연은 현재 대학교 3학년이었다. 일 년의 재수 생활과 이 년의 군 생활, 부모님 따라 해외여행을 하고 싶다고 또 일 년의 휴학. 심지어 5년제인 건축학과에 들어가는 바람에 남들보다 졸업이 더 늦었다.
-나 이번에 기숙사 뺐어.
"근데?"
-아부지랑 엄마가 누나 집 들어가서 살래.
이건 또 무슨……. 아연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우연은 인생을 정말 편안하게 살아온 놈이었다. 빈둥빈둥 20년을 놀더니, 할아버지 따라 건축가가 되고 싶다며 가족들한테 선언했을 당시에는 모두가 우연을 비웃었다. 수능도 안 쳐서 백수인 주제에 무슨 건축가 타령이냐는 아버지의 말에 그날로 재수 기숙 학원을 들어가더니 결국 아연이 갔던 S대 건축과에 붙었다.
당시에는 정말 기적과도 같았다. 공부에 공자도 모르던 우연이 일 년 만에 명문대에 입학하자 부모님은 난리가 났다. 자식 둘이 최고 대학이라는 S대에 합격했으니.
하지만 아연은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없었다. 누군가에 휘둘려 제 꿈을 정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스스로 겪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너도 그런다고 했어?"
-응. 방도 많고 뭐가 문제야? 집도 넓고. 학교 다니는 동안 내 생활비는 주신다고 했어.
아연도 다달이 생활비를 받아 생활했었지만, 미술 보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순간부터 부모님께 손을 빌리지 않았다. 애초에 집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아씨. 너 딱 기다려."
아연은 황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괜히 강유와 먼저 부딪힐까 걱정됐다.
강유와 우연은 친형제처럼 지냈다. 그런 강유와 헤어지고 아연이 폐인 같은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엔 우연은 재수 생활과 함께 대학교 1학년의 시절을 보내느라 몰랐다. 아연이 얼마나 처참히 망가지고 쓰러져 가는지를.
가족들은 둘의 헤어짐에 대해 그저 묵인했다. 아쉬웠지만 둘의 일이니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강유가 떠난 것도 다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년 전 그리고 지금까지 강유와 다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2년에 한 번 한국에 들어오시는 부모님과 놀러 다니기 바쁜 우연은 더욱이 몰랐다. 아, 딱 한 명. 은호만 알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아연은 담장 옆에 기대 있는 우연을 발견하고 빠르게 달려갔다.
"왜 뛰어 와?"
오랜만에 보는 아연의 모습에 우연은 식겁하듯 바라봤다. 키의 유전자는 우연에게로 몰려간 듯 아연과는 달리 우연은 기럭지가 길었다.
"계속 여기 서 있었어?"
우연에게 질문하며 힐끔 주변을 살폈지만, 강유는 외출한 건지 차가 없었다.
"응, 그러라며."
"아씨. 너 진짜 여기 살 거야?"
"그럼 나 어디 살라고? 학교랑도 가까운데 내가 왜 기숙사 들어가서 있어야 돼."
이미 큰 캐리어를 대문 앞에 세워둔 우연의 모습에 아연은 절망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말하고 이해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어?"
그때 우연이 시선이 틀어져 다른 곳을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따라가던 아연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오는 건지, 강유의 차가 둘의 앞에 부드럽게 멈췄다.
"……형?!"
그리고 차에서 내리는 강유의 모습에 우연은 놀라 뛰어갔다. 키가 아무리 크다 한들 강유보다는 아직 아래였다. 오랜만에 보는 우연의 모습에 그는 픽 웃었다.
"놀러 왔어?"
"뭐, 뭐야? 둘이 다시 뭐 그렇게 됐어?"
정말 당황한 우연이 말을 더듬자, 강유는 힐끔 아연을 바라봤다. 어제 그렇게 어색한 모습으로 헤어져 오늘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나 남자 친구 있어."
어느 새 다가온 아연이 우연의 팔을 잡아끌며 강유와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이상한 분위기에 둘을 휙휙 바라보던 우연은 갑자기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아! 둘이 친구 먹기로 했구나?"
"……친구?"
"에이, 괜찮아 괜찮아. 나도 전 여친이랑 친구했었어."
아연의 어깨에 팔을 둘러 토닥이는 우연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아연의 표정은 더 썩어들어 갔다.
"아, 친구 하자고 해 놓고 다시 사귀었다가 지금은 완전히 남남인 걔?"
"아 누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올라가."
우연을 질질 끌며 대문으로 향하는 아연 때문에 우연을 울상으로 제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아, 형. 나 오늘부터 여기 살 예정!"
거의 7년 만에 제대로 마주한 강유의 모습에도 우연은 어색함 하나 없이 손을 방방 흔들었다.
"아 근데 배고파 누나! 오늘 고기 먹자 고기!"
"아씨, 알겠으니까 저거 들고 따라오기나 해!"
결국 버럭 소리친 아연이 먼저 들어갔다. 우연은 까칠한 제 누나 모습에도 그저 싱글벙긋 웃으며 캐리어를 잡고 몸을 빙글 돌렸다.
“형, 밥 먹었어?"
"왜 같이 먹자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강유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우연을 지나쳐 들어갔다. 둘 다 자기를 버리고 먼저 들어갔지만, 개의치 않는 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들어갔다.
"누나가 쏘는 거야! 나 누나 취업하고 처음 먹어 봐!"
우연의 말에 앞서 걷던 강유는 고개를 틀어 바라봤다.
"취업?"
둘의 상황을 잘 모르던 우연은 굳이 숨길 건 아니라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미술 학원 선생님이잖아. 한 달에 이 백은 더 벌걸?"
우연의 말에 강유는 잠시 놀란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겠거니는 했지만……,미술 학원?
'그림이 싫어. 내 그림은 죽었어. 봐, 너도 보이잖아!'
아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녀와 떨어져 있었어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던 그 말이 떠올랐다.
'내 인생에 이제 그림은 없어.'
'절대 그리지 않을 거야.'
잊은 적 없어도 그저 무덤덤하게 지내왔었는데 왜 이제서야 이렇게 아연의 말이 실감이 나게 떠오르는지 자신도 몰랐다.
"형?"
우연이 부름에 강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사주는 고기 먹어보고 싶네."
"그치? 나 이거 짐만 올려두고 누나 꼬셔서 나올게! 소고기 먹자 소고기!"
신나 날뛰는 우연을 보며 강유는 픽 웃었다. 낑낑거리며 큰 캐리어를 2층까지 가지고 올라가는 우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도 집으로 들어갔다.
지이잉-
집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울리는 진동에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익숙한 이름에 강유는 별 반응 없이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