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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들춰내고 싶지 않아

  • 너무나 갑작스러운 그의 모습에 아연은 어떤 행동도 말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돌처럼 딱딱히 굳는 느낌이었다.
  • "오랜만이야."
  • 그의 첫 마디. 인사 하나 없이 떠난 그가 건넨 첫 마디.
  •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아연은 황급히 2층 계단으로 향했지만, 그러면 강유가 서 있는 현관문 앞을 지나쳐야 한다는 사실에 다시 걸음을 멈췄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국은 털썩 주저앉아버린 아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 터벅터벅.
  • 그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져 갔다. 푹신한 잔디를 밟는 소리부터 자신의 앞에 주저앉는 소리까지. 모든 신경이 그에게로 향했다.
  • "어디 아파?"
  • 마치 오늘 아침에 굿모닝 인사라도 한 사람처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그의 말에, 아연은 눈물이 차올랐다.
  • 그의 단호함과 무심함에 이별했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주는 행복이 너무 커 그를 사랑했었다. 온전히 전해지던 그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아연이 아직까지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 "흑……."
  • 결국 울음소리가 새어나갔다. 그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 이런 모습으로 재회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하지만 강유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큰 손으로 아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 한참을 울던 아연은 그 시간 동안 앞에서 묵묵히 머리만 쓰다듬어 주고 있는 그를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눈물에 온통 젖은 아연의 모습에도 강유는 슥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다.
  • "다 울었어?"
  • "왜 우는지 안 물어봐?"
  • 코맹맹이 소리로 묻는 말에 강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 "알고 있으니까."
  • 유아연이면 하나부터 백까지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 "나 여기 살 거야."
  • "……."
  •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 그와 헤어지고 재회하는 꿈을 수백 번도 더 꿨다. 행복한 꿈이어도 결국 깨면 눈물바다로 진이 다 빠지는 날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 알게 되는 사실 하나.
  •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거.
  • 그걸 그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바라보고 있겠지.
  • 오래한 시간이 길수록 그 시간의 소중함은 무뎌지고, 그 소중함이 주는 사람의 의미가 옅어진다. 그리고 결국 그것들은 상처가 되어 그들을 찢어 놓는다.
  • “응.”
  • 짧은 대답이었지만, 아연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강유 자신이었다.
  • ***
  • 말로 정립하진 않았지만 둘은 '친구'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그 기간의 공백과 서로 사랑했던 6년이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아연은 괴로워했다.
  • 가끔 마주칠 때 아연은 어색함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기 바빴다. 강유는 그런 아연을 재촉하지 않았다. 아연이 온전히 강유를 그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한발 물러났다. 그건 서로에게 예의이자 아름다운 이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 그렇게 2년. 둘은 다시 함께 살았다. 이곳, 이 자리에서.
  • 왜 돌아왔느냐는 아연의 물음에 강유는 그저 인상을 찌푸렸다.
  • "그래, 알아. 나 때문에 돌아온 건 아니잖아. 나도 뭘 어떻게 해 볼 생각 없어. 그저! 그때 왜 날 그렇게 끊어냈는지 물어보는 것도 안 되니? 모든 지나간 과거는 들춰내면 안 돼?"
  • 아연의 흰 피부에 얼마나 힘을 준 건지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물감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준 아연은 실소를 터트렸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허탈했다.
  • 강유가 돌아온 그 다음 날, 첫눈에 반했다는 은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은호가 좋았지만, 그때는 숨기 바빴던 아연의 비겁함이었다.
  • "어. 안 돼."
  • "뭐……?"
  • 단호한 그의 대답에 아연이 충격받은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말을 끝낼 생각이 없는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 "들춰내고 싶지 않아."
  • 직설적인 화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쓸데없이 감정 낭비하는 걸 싫어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너무 아팠다. 지금 왜 제 가슴이 이렇게 아픈지, 왜 이래야 하는지 아연 스스로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아연이었다.
  • "갈게."
  • 다시 함께 살며 2년 만에 처음으로 서로에 대한 작은 감정을 드러냈던 날이었다.
  • 도망치듯 그의 집을 나온 아연은 황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상관없었다. 그의 말처럼 다 지난 일이니까.
  • ***
  • "아연 쌤 나 먼저 퇴근할게?"
  • "네, 전 이거 마무리하고 들어갈게요."
  • 미술 학원에 원장으로 있는 승혜는 올해로 서른아홉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 퇴근 시간 맞춰 집에 달려가기 바빴다.
  • 한창 바쁜 시즌이지만, 승혜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럴 거면 선생 하나를 더 고용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뿐이었다.
  • 홀로 남아 작품을 마무리 짓던 아연은 물감 묻은 손을 박박 닦았다. 착용하던 앞치마와 토시까지 제 사물함에 넣어두고는 학원을 나왔다.
  •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날은 꽤 추웠다.
  • 지이잉-
  • 마침 울리는 진동에 아연은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 뜨는 이름에 잠시 휴대폰을 꺼버릴까 생각하다 꾹 참고 화면을 터치했다.
  • "왜."
  • 다소 까칠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 -누나 어디야? 나 지금 누나네 집 앞인데!
  • 세 살 차 남동생 우연이었다.
  • "이제 퇴근했어. 왜 왔는데?"
  • -와, 누나 진짜 서운하다. 남동생이 몇 달 만에 한국 들어왔는데 물어보지도 않고. 나 이거 국제전화 아니다?
  • "그래, 그래서 뭐. 왜!"
  • 괜히 성질에 버럭 소리치자 우연은 황당한지 어버버 거리다가는 자기도 왁 소리쳤다.
  • -내가 오면 안 될 곳 왔냐!
  • "들어가든가 왜 전화질이야!"
  • 올해 스물여섯인 우연은 현재 대학교 3학년이었다. 일 년의 재수 생활과 이 년의 군 생활, 부모님 따라 해외여행을 하고 싶다고 또 일 년의 휴학. 심지어 5년제인 건축학과에 들어가는 바람에 남들보다 졸업이 더 늦었다.
  • -나 이번에 기숙사 뺐어.
  • "근데?"
  • -아부지랑 엄마가 누나 집 들어가서 살래.
  • 이건 또 무슨……. 아연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 우연은 인생을 정말 편안하게 살아온 놈이었다. 빈둥빈둥 20년을 놀더니, 할아버지 따라 건축가가 되고 싶다며 가족들한테 선언했을 당시에는 모두가 우연을 비웃었다. 수능도 안 쳐서 백수인 주제에 무슨 건축가 타령이냐는 아버지의 말에 그날로 재수 기숙 학원을 들어가더니 결국 아연이 갔던 S대 건축과에 붙었다.
  • 당시에는 정말 기적과도 같았다. 공부에 공자도 모르던 우연이 일 년 만에 명문대에 입학하자 부모님은 난리가 났다. 자식 둘이 최고 대학이라는 S대에 합격했으니.
  • 하지만 아연은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없었다. 누군가에 휘둘려 제 꿈을 정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스스로 겪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너도 그런다고 했어?"
  • -응. 방도 많고 뭐가 문제야? 집도 넓고. 학교 다니는 동안 내 생활비는 주신다고 했어.
  • 아연도 다달이 생활비를 받아 생활했었지만, 미술 보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순간부터 부모님께 손을 빌리지 않았다. 애초에 집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 "아씨. 너 딱 기다려."
  • 아연은 황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괜히 강유와 먼저 부딪힐까 걱정됐다.
  • 강유와 우연은 친형제처럼 지냈다. 그런 강유와 헤어지고 아연이 폐인 같은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엔 우연은 재수 생활과 함께 대학교 1학년의 시절을 보내느라 몰랐다. 아연이 얼마나 처참히 망가지고 쓰러져 가는지를.
  • 가족들은 둘의 헤어짐에 대해 그저 묵인했다. 아쉬웠지만 둘의 일이니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강유가 떠난 것도 다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2년 전 그리고 지금까지 강유와 다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2년에 한 번 한국에 들어오시는 부모님과 놀러 다니기 바쁜 우연은 더욱이 몰랐다. 아, 딱 한 명. 은호만 알고 있었다.
  • 택시에서 내린 아연은 담장 옆에 기대 있는 우연을 발견하고 빠르게 달려갔다.
  • "왜 뛰어 와?"
  • 오랜만에 보는 아연의 모습에 우연은 식겁하듯 바라봤다. 키의 유전자는 우연에게로 몰려간 듯 아연과는 달리 우연은 기럭지가 길었다.
  • "계속 여기 서 있었어?"
  • 우연에게 질문하며 힐끔 주변을 살폈지만, 강유는 외출한 건지 차가 없었다.
  • "응, 그러라며."
  • "아씨. 너 진짜 여기 살 거야?"
  • "그럼 나 어디 살라고? 학교랑도 가까운데 내가 왜 기숙사 들어가서 있어야 돼."
  • 이미 큰 캐리어를 대문 앞에 세워둔 우연의 모습에 아연은 절망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말하고 이해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 "어?"
  • 그때 우연이 시선이 틀어져 다른 곳을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따라가던 아연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오는 건지, 강유의 차가 둘의 앞에 부드럽게 멈췄다.
  • "……형?!"
  • 그리고 차에서 내리는 강유의 모습에 우연은 놀라 뛰어갔다. 키가 아무리 크다 한들 강유보다는 아직 아래였다. 오랜만에 보는 우연의 모습에 그는 픽 웃었다.
  • "놀러 왔어?"
  • "뭐, 뭐야? 둘이 다시 뭐 그렇게 됐어?"
  • 정말 당황한 우연이 말을 더듬자, 강유는 힐끔 아연을 바라봤다. 어제 그렇게 어색한 모습으로 헤어져 오늘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 "그런 거 아니야. 나 남자 친구 있어."
  • 어느 새 다가온 아연이 우연의 팔을 잡아끌며 강유와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 이상한 분위기에 둘을 휙휙 바라보던 우연은 갑자기 손뼉을 짝, 하고 쳤다.
  • "아! 둘이 친구 먹기로 했구나?"
  • "……친구?"
  • "에이, 괜찮아 괜찮아. 나도 전 여친이랑 친구했었어."
  • 아연의 어깨에 팔을 둘러 토닥이는 우연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아연의 표정은 더 썩어들어 갔다.
  • "아, 친구 하자고 해 놓고 다시 사귀었다가 지금은 완전히 남남인 걔?"
  • "아 누나!"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올라가."
  • 우연을 질질 끌며 대문으로 향하는 아연 때문에 우연을 울상으로 제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 "아, 형. 나 오늘부터 여기 살 예정!"
  • 거의 7년 만에 제대로 마주한 강유의 모습에도 우연은 어색함 하나 없이 손을 방방 흔들었다.
  • "아 근데 배고파 누나! 오늘 고기 먹자 고기!"
  • "아씨, 알겠으니까 저거 들고 따라오기나 해!"
  • 결국 버럭 소리친 아연이 먼저 들어갔다. 우연은 까칠한 제 누나 모습에도 그저 싱글벙긋 웃으며 캐리어를 잡고 몸을 빙글 돌렸다.
  • “형, 밥 먹었어?"
  • "왜 같이 먹자고?"
  •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강유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우연을 지나쳐 들어갔다. 둘 다 자기를 버리고 먼저 들어갔지만, 개의치 않는 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들어갔다.
  • "누나가 쏘는 거야! 나 누나 취업하고 처음 먹어 봐!"
  • 우연의 말에 앞서 걷던 강유는 고개를 틀어 바라봤다.
  • "취업?"
  • 둘의 상황을 잘 모르던 우연은 굳이 숨길 건 아니라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 "누나 미술 학원 선생님이잖아. 한 달에 이 백은 더 벌걸?"
  • 우연의 말에 강유는 잠시 놀란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겠거니는 했지만……,미술 학원?
  • '그림이 싫어. 내 그림은 죽었어. 봐, 너도 보이잖아!'
  • 아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녀와 떨어져 있었어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던 그 말이 떠올랐다.
  • '내 인생에 이제 그림은 없어.'
  • '절대 그리지 않을 거야.'
  • 잊은 적 없어도 그저 무덤덤하게 지내왔었는데 왜 이제서야 이렇게 아연의 말이 실감이 나게 떠오르는지 자신도 몰랐다.
  • "형?"
  • 우연이 부름에 강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누나가 사주는 고기 먹어보고 싶네."
  • "그치? 나 이거 짐만 올려두고 누나 꼬셔서 나올게! 소고기 먹자 소고기!"
  • 신나 날뛰는 우연을 보며 강유는 픽 웃었다. 낑낑거리며 큰 캐리어를 2층까지 가지고 올라가는 우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도 집으로 들어갔다.
  • 지이잉-
  • 집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울리는 진동에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익숙한 이름에 강유는 별 반응 없이 전화를 받았다.
  • "어."
  • -강유야, 나 화실 왔는데 어디야?
  • 어리둥절하고 다정한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너머 친근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