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아연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강유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연을 향해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한참이나 꺾인 허리에도 그는 익숙했다.
물감이 묻지 않은 손등 쪽으로 조심히 눈물을 닦은 그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미안, 여태 스트레스받아서 내가 생각이 짧았어."
열일곱, 고등학교를 올라가던 그날 강유는 제 진심을 담아 처음으로 아연을 그렸다. 외할아버지와 엄마를 따라 자연스럽게 어릴 적부터 미술을 접했던 그는 재능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로 자라 온 아연에게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을 끌어 그녀에게 고백했다.
소꿉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어려웠을 뿐이었다. 평생을 옆에 둘 수 있는 친구를 잃을 수도, 단 한 번의 진심을 전하지도 못할 수도 있는 관계였다. 그러나 그는 진심을 전하는 쪽을 택했다. 아연이 여자로 보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유학을 가지 않겠느냐는 엄마의 말을 거스르고 아연을 따라 일반고에 진학했다. 강유의 그림은 언제 어디서나 칭송받았다. 젊은 화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는 건 어쩌면 그에겐 당연했다. 그런 강유를 따라 아연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우기고 우겨 입시 미술 학원까지 등록했다.
강유를 따라 시작한 것치고 아연의 그림은 개성 있었다. 그렇게 아연은 그를 따라 미대 지원을 했고, S대 미대의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같은 대학생이지만, 그는 이미 세계에서 알아주는 화가였고 자신은 그저 턱걸이로 들어온 노력파일 뿐이었다. 그것도 정말 겨우겨우 입학한.
스물한 살 그가 입대로 휴학하던 날, 아연은 꿈과 현실의 괴리감을 못 이겨 자퇴서를 작성했다.
2년의 작품 활동을 중단해야 하는 그는 아연이 어떤 문제로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아니, 제 스트레스에 가려 알 수 없었다. 그게 그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일이었는지, 그때 당시의 그는 알 길이 없었다.
"아니, 내가 철이 없었던 거야."
아연은 한발 뒤로 물러나 고개를 저었다.
"손이 굳을 걸 걱정하는 너한테, 어리광 피우면 안 됐던 거야."
자퇴를 휴학이라고 거짓말하며, 미술 보조 알바를 뛰던 아연은 항상 곁에 있던 강유 마저 없자 심하게 앓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럼에도 군대에 가서 더 힘들 강유를 아니까 투정 한 번 부리지 못했다. 부모님이 해외에 계시는 바람에 아연은 오직 혼자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돌아가신 강유 외할아버지의 유언 대로 둘은 외할아버지가 살아생전 거주하셨던 단독 주택으로 들어갔다. 건축가셨던 아연의 외할아버지가 지어, 화가이신 강유의 외할아버지가 사셨던 그 집으로.
둘이 사귀기도 하겠다 층수도 나뉘어 있어 차라리 혼자 자취하는 것보다 안심이라며 두 부모님 다 적극 찬성을 하셨다. 그 이유에서는 둘이 함께 있어 좋은 대학에 붙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준 덕도 컸다.
아주 잠깐 그와의 추억을 상기하던 아연의 표정이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현아."
강유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워낙 감정 표현이 다양하지 않은 그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림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직전 '지현'이라는 본명을 '지강유'라는 예명으로 바꾼 그의 진짜 이름을 아는 건 아연뿐이었다.
"우리 그만하자."
아연의 이별과 동시에 강유의 입에서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습관적으로 고하는 이별, 곧 후회에 젖어 붙잡는 아연의 모습이 눈앞에 뻔히 그려졌다. 6년의 연애 기간 동안 아연이 고한 이별은 그에게는 매번 충격이었고 아픔이었다. 그럼에도 아연을 사랑해서 제 아픔, 상처 다 모른 척 받아줬었다.
"후회할 말 그만해."
"후회 안 해."
강유 만큼이나 단호한 얼굴을 한 아연은 이를 악물었다.
"넌 언제나 이렇게 간단했어. 내가 이별을 말하면 항상 지겹다는 듯이 바라봤고 변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그간의 설움이 터져 나오듯 아연의 입에서는 상처를 주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태 거의 표정 변화가 없던 강유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우리 6년 연애 기간 동안 네가 나한테 했던 헤어지잔 말을 이젠 셀 수도 없어."
"이젠 진짜야."
"그것마저도."
강유의 찌푸린 얼굴에 아연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에도 한 번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돌아올 줄 몰랐다.
"여기서 그만하면, 나 너 절대 안 볼 거야."
"……하."
아연의 입에선 알 수 없는 숨이 터져 나왔다. 이미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안 봐도 뻔하게 단호한 그가 있을 걸 생각하니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 그만해."
눈물을 닦고 강유를 마주하기보다, 아연은 몸을 틀어 그의 작업실을 나갔다.
***
문득 나는 옛날 생각에 아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 일이 생각나는 거람.
"왔어?"
"아, 오빠."
멍한 아연의 앞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은호가 다가왔다. 훤칠한 키에 누가 봐도 한 번쯤은 돌아볼 만한 그런 외모를 가진 남자. 그런 남자가 현재 아연의 남자친구였다.
제 회사 앞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연을 보기만 해도 예뻐 죽겠는지 은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들어오라니까."
아연의 옆에 자리를 잡은 은호는 방긋 미소 지었다. 목소리마저도 꿀을 바른 듯 달달했다. 아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으응, 아니야. 일은 끝난 거야?"
"응. 오늘 아버지랑 같이 출근해서 차 안 가지고 나왔는데 어쩌지?"
올해 서른셋으로 아연과는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였다. 하늘색 원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연은 반쯤 비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우선 나가자. 나 배고파."
아연이 가방을 챙기며 일어서자, 은호는 아연이 마셨던 컵을 정리하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파스타?"
카페에서 나오자 퇴근하는 직원들의 눈길이 아연의 온몸에 닿았다. 예전에는 불편했지만, 이것도 2년씩이나 지나니 그냥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은호는 아연이 고른 저녁 메뉴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어머니랑 갔던 파스타 전문점이 있었는데 맛있더라고."
"그래, 거기로 가자."
가까운 거리라며 걸어서 가도 괜찮냐는 은호의 말에 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작은 키 때문에 높은 힐을 자주 신어서 걸어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은 이런 데이트도 나쁘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북적였다.
"그래서 내가 다 치우고 어쩔 수 없이 물 쏟은 그림까지 다시 그려줬어."
"그랬어? 근데 학생 작품인데 그렇게 도와줘도 괜찮아?"
"사실 안 되는데, 여기 세계에서는 또 흔해. 입시 작품도 아니고 초등학생인데, 뭘."
주절주절 오늘 있던 일에 대해 떠드는 아연이 예쁜지 은호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10분을 더 걸었을까, 아연은 익숙한 풍경에 잠시 주변을 돌아봤다.
"아, 여기지? 미술의 거리."
은호도 아는 곳이라며 주변을 살폈다. 개인 소유로 되어 있는 이 거리는 유명 화가의 손길이 닿은 곳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거리에 아연은 그저 굳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이 거리를 빨리 지나가고 싶었다.
"왜 이렇게 빨리 가?”
어느새 걸음이 빨라진 아연을 의아하게 보던 은호가 속도를 늦췄다. 아연은 당황한 듯 속도를 다시 맞춰 걸었다.
"어? 그냥……."
"아하하하! 어차피 친구 그림이라 매일 봐서 흥미도 없는 거야?"
이제는 서울의 데이트 코스 명당으로 자리 잡은 이 거리는 밤낮 상관없이 연인들로 북적였다. 이국적이면서도 한 사람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이곳은 전 세계인들이 찾는 명소이기도 했다.
아연은 눈에 보이는 익숙한 붓 자취가, 색감이, 선들이 신경 쓰였다.
"예전에는 이 건물이 작업실이었다고 하던데?"
외관으로 봐도 마치 하나의 예술 같은 건물의 모습에 은호는 걸음을 멈추고 감탄을 자아냈다.
"가끔 출근할 때 보긴 하는데, 진짜 멋지다. 강유였지?"
결국 은호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아연은 보려 하지 않았던 건물을 눈에 담았다. 웅장한 성 같은 건물의 외관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입이 떡하니 벌어질 정도였다. 이것 역시도 하나의 예술이었고, 하나의 작품이었다.
은호는 모르겠지, 아니 이 거리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르겠지. 이 건물이 아직도 화가 지강유의 작업실로 쓰인다는 사실을.
'우와! 대박!'
열일곱의 아연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떠졌다.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는 단발은 아연이 얼마나 들떠 있는지 보여줬다.
'이제 너 여기로 작업실 쓰는 거야? 아줌마 쓰셨던 곳으로?'
'응, 맞아.'
젖살이 빠지기 전이지만, 여전히 눈매가 날카로운 강유는 픽 웃었다. 새벽 4시. 사람 한 명 없는 거리의 앞에서 그는 으리으리한 건물의 앞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가 쓰셨고, 엄마가 썼고 이제는 내가 쓸 곳이야.'
'그럼 나중에 네 아기가 화가가 되면 쓸 수도 있겠다!'
'그건 봐야 알지.'
마치 성문처럼 거대한 문을 밀고 들어가자, 화려하고 웅장한 외관과는 다르게 심플한 내부공간이 나왔다.
강유를 따라서 졸졸 쫓아 들어간 아연은 신기한 모습에 활짝 미소 지었다.
큰 문을 지나면 내부에 다른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문은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었다.
'잘 봐.'
웃음을 머금은 강유는 길고 예쁜 손가락으로 터치식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일, 일, 이, 칠.'
그리고 친절하게 숫자 하나하나를 말한 강유의 목소리에, 워낙 컸던 아연의 눈은 완전히 커져 강유와 도어락을 번갈아 바라보기 바빴다. 휙휙 돌아가는 아연의 시선에 강유는 픽 웃으며 잠금이 풀린 문을 밀어 열었다.
'유아연의 환상의 나라.'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쪽 문 센서 등과 벽면에 달린 자동 센서 등이 오렌지 색으로 빛나 작업실을 밝혀주었다.
'저, 정말? 진짜? 나두 들어가도 돼?'
'당연하지. 와서 그림도 그려. 그러라고 네 생일로 비밀번호 설정한 거야. 너랑 나밖에 몰라.'
그때 아연은 힘차게 달려가 강유를 안았다. 절대 품에 다 안을 수 없는 덩치 차이가 있었지만, 아연은 아무렴 좋았다.
다시 또 떠올랐다. 아주 오래, 이제는 생각도 안 날 만큼 저 깊숙한 곳에 묻어놨었던 기억들이었는데.
"오빠, 가자."
여전히 건물을 구경하고 있던 은호의 팔을 잡아끈 아연은 그대로 거리를 걸었다. 아까처럼 다시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