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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우리 그만하자

  • 여린 아연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강유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연을 향해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한참이나 꺾인 허리에도 그는 익숙했다.
  • 물감이 묻지 않은 손등 쪽으로 조심히 눈물을 닦은 그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 "미안, 여태 스트레스받아서 내가 생각이 짧았어."
  • 열일곱, 고등학교를 올라가던 그날 강유는 제 진심을 담아 처음으로 아연을 그렸다. 외할아버지와 엄마를 따라 자연스럽게 어릴 적부터 미술을 접했던 그는 재능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로 자라 온 아연에게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을 끌어 그녀에게 고백했다.
  • 소꿉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어려웠을 뿐이었다. 평생을 옆에 둘 수 있는 친구를 잃을 수도, 단 한 번의 진심을 전하지도 못할 수도 있는 관계였다. 그러나 그는 진심을 전하는 쪽을 택했다. 아연이 여자로 보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 유학을 가지 않겠느냐는 엄마의 말을 거스르고 아연을 따라 일반고에 진학했다. 강유의 그림은 언제 어디서나 칭송받았다. 젊은 화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는 건 어쩌면 그에겐 당연했다. 그런 강유를 따라 아연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우기고 우겨 입시 미술 학원까지 등록했다.
  • 강유를 따라 시작한 것치고 아연의 그림은 개성 있었다. 그렇게 아연은 그를 따라 미대 지원을 했고, S대 미대의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 같은 대학생이지만, 그는 이미 세계에서 알아주는 화가였고 자신은 그저 턱걸이로 들어온 노력파일 뿐이었다. 그것도 정말 겨우겨우 입학한.
  • 스물한 살 그가 입대로 휴학하던 날, 아연은 꿈과 현실의 괴리감을 못 이겨 자퇴서를 작성했다.
  • 2년의 작품 활동을 중단해야 하는 그는 아연이 어떤 문제로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아니, 제 스트레스에 가려 알 수 없었다. 그게 그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일이었는지, 그때 당시의 그는 알 길이 없었다.
  • "아니, 내가 철이 없었던 거야."
  • 아연은 한발 뒤로 물러나 고개를 저었다.
  • "손이 굳을 걸 걱정하는 너한테, 어리광 피우면 안 됐던 거야."
  • 자퇴를 휴학이라고 거짓말하며, 미술 보조 알바를 뛰던 아연은 항상 곁에 있던 강유 마저 없자 심하게 앓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럼에도 군대에 가서 더 힘들 강유를 아니까 투정 한 번 부리지 못했다. 부모님이 해외에 계시는 바람에 아연은 오직 혼자였다.
  • 스무 살이 되던 해, 돌아가신 강유 외할아버지의 유언 대로 둘은 외할아버지가 살아생전 거주하셨던 단독 주택으로 들어갔다. 건축가셨던 아연의 외할아버지가 지어, 화가이신 강유의 외할아버지가 사셨던 그 집으로.
  • 둘이 사귀기도 하겠다 층수도 나뉘어 있어 차라리 혼자 자취하는 것보다 안심이라며 두 부모님 다 적극 찬성을 하셨다. 그 이유에서는 둘이 함께 있어 좋은 대학에 붙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준 덕도 컸다.
  • 아주 잠깐 그와의 추억을 상기하던 아연의 표정이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 "현아."
  • 강유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워낙 감정 표현이 다양하지 않은 그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그림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직전 '지현'이라는 본명을 '지강유'라는 예명으로 바꾼 그의 진짜 이름을 아는 건 아연뿐이었다.
  • "우리 그만하자."
  • 아연의 이별과 동시에 강유의 입에서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 습관적으로 고하는 이별, 곧 후회에 젖어 붙잡는 아연의 모습이 눈앞에 뻔히 그려졌다. 6년의 연애 기간 동안 아연이 고한 이별은 그에게는 매번 충격이었고 아픔이었다. 그럼에도 아연을 사랑해서 제 아픔, 상처 다 모른 척 받아줬었다.
  • "후회할 말 그만해."
  • "후회 안 해."
  • 강유 만큼이나 단호한 얼굴을 한 아연은 이를 악물었다.
  • "넌 언제나 이렇게 간단했어. 내가 이별을 말하면 항상 지겹다는 듯이 바라봤고 변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 그간의 설움이 터져 나오듯 아연의 입에서는 상처를 주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 여태 거의 표정 변화가 없던 강유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 "우리 6년 연애 기간 동안 네가 나한테 했던 헤어지잔 말을 이젠 셀 수도 없어."
  • "이젠 진짜야."
  • "그것마저도."
  • 강유의 찌푸린 얼굴에 아연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에도 한 번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돌아올 줄 몰랐다.
  • "여기서 그만하면, 나 너 절대 안 볼 거야."
  • "……하."
  • 아연의 입에선 알 수 없는 숨이 터져 나왔다. 이미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안 봐도 뻔하게 단호한 그가 있을 걸 생각하니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았다.
  • "그래. 그만해."
  • 눈물을 닦고 강유를 마주하기보다, 아연은 몸을 틀어 그의 작업실을 나갔다.
  • ***
  • 문득 나는 옛날 생각에 아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 일이 생각나는 거람.
  • "왔어?"
  • "아, 오빠."
  • 멍한 아연의 앞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은호가 다가왔다. 훤칠한 키에 누가 봐도 한 번쯤은 돌아볼 만한 그런 외모를 가진 남자. 그런 남자가 현재 아연의 남자친구였다.
  • 제 회사 앞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연을 보기만 해도 예뻐 죽겠는지 은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들어오라니까."
  • 아연의 옆에 자리를 잡은 은호는 방긋 미소 지었다. 목소리마저도 꿀을 바른 듯 달달했다. 아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 "으응, 아니야. 일은 끝난 거야?"
  • "응. 오늘 아버지랑 같이 출근해서 차 안 가지고 나왔는데 어쩌지?"
  • 올해 서른셋으로 아연과는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였다. 하늘색 원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연은 반쯤 비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 "우선 나가자. 나 배고파."
  • 아연이 가방을 챙기며 일어서자, 은호는 아연이 마셨던 컵을 정리하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음, 파스타?"
  • 카페에서 나오자 퇴근하는 직원들의 눈길이 아연의 온몸에 닿았다. 예전에는 불편했지만, 이것도 2년씩이나 지나니 그냥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 은호는 아연이 고른 저녁 메뉴에 고개를 끄덕였다.
  • "저번에 어머니랑 갔던 파스타 전문점이 있었는데 맛있더라고."
  • "그래, 거기로 가자."
  • 가까운 거리라며 걸어서 가도 괜찮냐는 은호의 말에 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항상 작은 키 때문에 높은 힐을 자주 신어서 걸어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은 이런 데이트도 나쁘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북적였다.
  • "그래서 내가 다 치우고 어쩔 수 없이 물 쏟은 그림까지 다시 그려줬어."
  • "그랬어? 근데 학생 작품인데 그렇게 도와줘도 괜찮아?"
  • "사실 안 되는데, 여기 세계에서는 또 흔해. 입시 작품도 아니고 초등학생인데, 뭘."
  • 주절주절 오늘 있던 일에 대해 떠드는 아연이 예쁜지 은호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 그렇게 10분을 더 걸었을까, 아연은 익숙한 풍경에 잠시 주변을 돌아봤다.
  • "아, 여기지? 미술의 거리."
  • 은호도 아는 곳이라며 주변을 살폈다. 개인 소유로 되어 있는 이 거리는 유명 화가의 손길이 닿은 곳이었다.
  •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거리에 아연은 그저 굳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이 거리를 빨리 지나가고 싶었다.
  • "왜 이렇게 빨리 가?”
  • 어느새 걸음이 빨라진 아연을 의아하게 보던 은호가 속도를 늦췄다. 아연은 당황한 듯 속도를 다시 맞춰 걸었다.
  • "어? 그냥……."
  • "아하하하! 어차피 친구 그림이라 매일 봐서 흥미도 없는 거야?"
  • 이제는 서울의 데이트 코스 명당으로 자리 잡은 이 거리는 밤낮 상관없이 연인들로 북적였다. 이국적이면서도 한 사람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이곳은 전 세계인들이 찾는 명소이기도 했다.
  • 아연은 눈에 보이는 익숙한 붓 자취가, 색감이, 선들이 신경 쓰였다.
  • "예전에는 이 건물이 작업실이었다고 하던데?"
  • 외관으로 봐도 마치 하나의 예술 같은 건물의 모습에 은호는 걸음을 멈추고 감탄을 자아냈다.
  • "가끔 출근할 때 보긴 하는데, 진짜 멋지다. 강유였지?"
  • 결국 은호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아연은 보려 하지 않았던 건물을 눈에 담았다. 웅장한 성 같은 건물의 외관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입이 떡하니 벌어질 정도였다. 이것 역시도 하나의 예술이었고, 하나의 작품이었다.
  • 은호는 모르겠지, 아니 이 거리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르겠지. 이 건물이 아직도 화가 지강유의 작업실로 쓰인다는 사실을.
  • '우와! 대박!'
  • 열일곱의 아연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떠졌다.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는 단발은 아연이 얼마나 들떠 있는지 보여줬다.
  • '이제 너 여기로 작업실 쓰는 거야? 아줌마 쓰셨던 곳으로?'
  • '응, 맞아.'
  • 젖살이 빠지기 전이지만, 여전히 눈매가 날카로운 강유는 픽 웃었다. 새벽 4시. 사람 한 명 없는 거리의 앞에서 그는 으리으리한 건물의 앞으로 다가갔다.
  • '할아버지가 쓰셨고, 엄마가 썼고 이제는 내가 쓸 곳이야.'
  • '그럼 나중에 네 아기가 화가가 되면 쓸 수도 있겠다!'
  • '그건 봐야 알지.'
  • 마치 성문처럼 거대한 문을 밀고 들어가자, 화려하고 웅장한 외관과는 다르게 심플한 내부공간이 나왔다.
  • 강유를 따라서 졸졸 쫓아 들어간 아연은 신기한 모습에 활짝 미소 지었다.
  • 큰 문을 지나면 내부에 다른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문은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었다.
  • '잘 봐.'
  • 웃음을 머금은 강유는 길고 예쁜 손가락으로 터치식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 '일, 일, 이, 칠.'
  • 그리고 친절하게 숫자 하나하나를 말한 강유의 목소리에, 워낙 컸던 아연의 눈은 완전히 커져 강유와 도어락을 번갈아 바라보기 바빴다. 휙휙 돌아가는 아연의 시선에 강유는 픽 웃으며 잠금이 풀린 문을 밀어 열었다.
  • '유아연의 환상의 나라.'
  •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쪽 문 센서 등과 벽면에 달린 자동 센서 등이 오렌지 색으로 빛나 작업실을 밝혀주었다.
  • '저, 정말? 진짜? 나두 들어가도 돼?'
  • '당연하지. 와서 그림도 그려. 그러라고 네 생일로 비밀번호 설정한 거야. 너랑 나밖에 몰라.'
  • 그때 아연은 힘차게 달려가 강유를 안았다. 절대 품에 다 안을 수 없는 덩치 차이가 있었지만, 아연은 아무렴 좋았다.
  • 다시 또 떠올랐다. 아주 오래, 이제는 생각도 안 날 만큼 저 깊숙한 곳에 묻어놨었던 기억들이었는데.
  • "오빠, 가자."
  • 여전히 건물을 구경하고 있던 은호의 팔을 잡아끈 아연은 그대로 거리를 걸었다. 아까처럼 다시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 아연은 모든 추억이 담긴 이 '미술의 거리'를 얼른 빠져나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