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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우리는 끝났어, 그때 그 자리에서

  • "필요하니까……."
  • 결국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돌고 돌아 회피형 대답이었다. 불편해하는 아연의 모습이 두 눈에 훤히 보였다.
  • "왜 필요한데. 너 그림 안 그리잖아 이제."
  • 돌려 말하는 법 없는 그는 놓치지 않고 아연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뭐 하나 넘어가 주는 법 없던 6년 전과 같았다.
  • 그냥 나가서 사오는 게 나았을까? 아니 내일 일찍 학원을 가는 게 더 나았을지도. 속에서 후회가 물 밀듯 밀려왔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이 분위기 속에서 아연은 애꿎은 손톱만 뜯었다.
  • 스윽. 손톱을 뜯는 아연의 손을 큰 손으로 잡은 그는 잠시 아연의 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올렸다.
  • "미술 다시 해?"
  • 착각일까. 그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을 느낀 건.
  • 여전히 꾹 잡고 있는 손 때문에 아연은 제가 불안하면 습관적으로 뜯는 손톱을 더는 뜯지 않는 것도 몰랐다.
  • "유아연."
  • "안 해."
  • 스윽-
  • 아연이 황급히 손을 뺐다. 꾹 잡곤 있었지만, 힘을 주고 있지 않아서 손을 손쉽게 빠졌다.
  • 고개를 들어 힐끔 강유를 바라보던 아연은 그대로 뒤돌아 2층 계단으로 향하려 몸을 틀었다.
  • 탁.
  • 몸을 채 틀기도 전에 다시 익숙한 온기에 잡혀버렸다.
  • "들어 와."
  • 그리고 강유는 힘 하나 주지 않은 손으로 아연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불 다 꺼진 집에선 강유의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 몇 년 만이지. 이 집에 다시 들어오게 된 건. 너무 오래돼 기억도 안 났다.
  • "무슨 물감."
  • 불을 켜자 익숙한 집의 내부가 환하게 들어왔다. 사귈 때까지만 해도 강유는 항상 전면 유리창을 밖에서도 보이게끔 만들어 놨었다. 아니, 서로 이미 비밀번호를 다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한 집이나 다름없었다.
  • "수채화 물감 필요해서, 하늘색."
  • 집을 둘러보던 아연은 벽면에 설치된 계단을 바라봤다. 이 집은 원래 분리형이 아니어서 둘이 들어와 살게 되며 내부를 공사했다. 집 안의 계단을 막았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만들었다. 외관상 전보다 좋진 않았지만, 부모님들께서 원하시니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았다.
  • 잠을 자는 곳과 드레스룸을 제외하면 강유의 집 모든 곳은 거의 전시회나 다름없었다. 최대한 집에서 작업하지 않으려고 하지마는 어쩔 수 없이 하다 보니 방 다섯 개 중 세 개는 작업용 방이 되어버렸다.
  • 그가 들어간 방을 따라 들어온 아연은 작업실보다는 적었지만, 여전히 많은 화용구에 조금 놀라 눈이 커졌다.
  • 물감 종류와 색깔별로 정리된 것 중 푸른색 계열을 훑어보는 강유의 모습은 어쩐지 익숙했다. 아니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아연이 인생의 반을 넘게 봐 왔던 모습이었으니까.
  • "피코크 블루면 돼. 흰색도 조금 덜어 줘."
  • 아연의 말에 아무 말 없이 물감을 꺼낸 강유는 작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시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어느새 손에 감기는 물감 튜브의 촉감에 아연은 정신을 퍼뜩 차렸다.
  • "그림을 그리긴 하나 보네."
  • 픽 웃으며 하는 강유의 말에 아연은 손에 들어온 물감을 꾹 쥐었다.
  • "물감 냄새난다."
  • "넌 술 냄새나."
  • 아까부터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강유에겐 진한 술 냄새가 퍼졌다. 어쩐지 나른해진 눈매가 휘어 표정이 다양하지 않은 그가 흡사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너한테 물감 냄새나는 거 오랜만이야."
  • 학원에서 퇴근하고 강유를 마주친 적이 별로 없으니 그가 냄새를 못 알아차릴 만도 했다.
  • 강유가 불현듯 유학에서 돌아온 건 2년 전, 그리고 아연이 미술 학원에서 알바를 시작한 것도 이제 2년이 되어 갔다.
  • 여전히 잡혀 있는 손을 통해 그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간질거리는 이 느낌이, 싫지 않았다.
  • 그렇게 떠나버린 강유를 볼 수 있는 건 TV나 기사였다. 신문에 몇 번 나온 적도 있었고 문화·예술 면에서는 자주 보였다. 전화번호부터 모든 걸 싹 바꾼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매체라는 사실이 아연을 처참하게 망가뜨렸었다.
  • "왜……."
  • 잡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연이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 떠나버린 거냐고.
  • "나를 철저하게 끊어버린 거야?"
  • 이별을 고한 건 그녀였지만, 이별을 받아들인 건 그였다.
  • 강유 역시 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천천히 아연의 손을 놓았다. 멀어져가는 온기에 아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야?"
  • 그의 단호한 말에 아연의 가슴이 철렁였다. 그래, 지강유한테 무슨 대답을 듣길 원했던 거야.
  • 언제 느슨해졌느냐는 듯 강유의 눈매는 다시 날카로워졌다. 아니, 아연을 보는 시선이 그랬다.
  • "어떤 이유였든 간에 우리는 끝났어, 그때 그 자리에서."
  • "네가 이별을 준비하고 있던 건 아니었고? 헤어지자는 말이 무서워서 나한테 미룬 건 아니었어?"
  • 두 눈을 크게 뜨고 강유를 노려본 아연이 이를 악물었다. 진짜 사랑했다면 그렇게 모든 걸 끊어낼 수는 없었다.
  • 강유의 집요한 시선이 붉게 달아오른 아연에게 머물렀다.
  • "내가 정말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 "하……."
  •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적어도 아연이 아는 강유는 헤어지자는 그 말이 '무서워서' 미룰 남자는 아니었다.
  • "그럼 왜 돌아왔는데? 영영 사라지지 왜 돌아왔어?!"
  • 강유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왜 아연이 과거의 일을 들추는지, 그 일로 왜 지금 흥분하며 따지려 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 다 끝난 '과거'일 뿐이었으니까.
  • ***
  • 2년 전.
  • 면접이 끝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스물일곱에 취업은커녕 알바 자리 하나 구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 "……하아."
  • 다시는 미술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결국 돌아와 버렸다. 페이도 좋았고 근무 환경,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 "손이 굳은 줄 알았는데……."
  • 나지막하게 뱉은 제 말에 아연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강유가 떠나버린 지 4년이 흘렀다. 솔직히 2년은 미친 사람처럼 지냈던 것 같았다. 초반에는 죽어라 술을 마셨고 그다음에는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만났고 또 그다음에는 추억에 그리워 울었고 그다음, 그다음도 아연은 나아지지 않았다.
  • 학교를 그만두고 동기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애초에 학교생활을 성실히 하지 않아서 따로 연락하는 아이들도 적었었다.
  • 시간이 약이란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죽을 것 같던 이별의 고통도 4년이 흐르니 무덤덤해졌다. 가끔 이렇게 그와 관련된 생각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 그는 여전히 그림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거의 평생을 함께하던 제 빈자리를 느끼지도 않는 것만 같았다.
  • 지이이잉-
  • 가방 속에 얌전히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면접 결과인가 싶었지만, 이렇게 빨리 나올 리는 없다고 생각한 아연은 비교적 느긋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 액정에는 ‘주은호’라는 이름 석 자가 떴다. 사내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필요한 수습 기간에 만난 남자였다. 긴장한 탓에 주문 벨을 건네받을 때 손이 미끄러져 그대로 커피를 쏟았다, 주은호라는 남자한테. 그 이후 더 말할 것도 없이 알바는 잘렸고, 후에 들은 얘기로는 그 회사의 전무이사라고 들었다.
  • '세탁비 물어 드릴게요.’
  • 알바는 알바였고 자신 때문에 피해 본 사람에겐 배상을 하는 게 예의였다.
  • 쓰린 속 달래며 쫓아나갔지만, 의외로 남자는 옷을 갈아입은 상태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돈을 주겠다는 아연의 말에 밥을 사달라고 했던 남자는 아연에게 호의를 표했다.
  • 남자의 호의는 아직 많이 낯설었다. 인생에 남자가 그 하나뿐이어서 그런지도. 아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뭐 하고 있었어요?
  • 전화를 받자마자 부드러운 음성이 아연의 귀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코너만 돌면 나오는 집을 생각하며 아연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 "집 가고 있었어요."
  • -좋은 타이밍이네요. 심심했죠?
  • "그냥, 뭐……."
  • -혹시 내일 시간 돼요?
  • 잠시 스케줄을 생각하던 아연은 내일까지 답변을 주겠다는 원장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뭐, 어차피 출근은 다음 주부터라고 했으니까.
  • "네, 될 것 같아요."
  • -그럼 내일 우리 점심이나 할래요? 할 말도 있고. 저녁도 함께하면 좋고.
  • "……그러죠, 뭐."
  • 아연의 인생에 남자는 강유가 전부였다. 오랜 소꿉친구라서 그런지 학창 시절 내내 붙어 다녀 아연에게 다가오는 남자애들은 거의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전부 강유의 친구들이었다.
  • 그래서 처음에 은호를 보며 이 남자가 나한테 왜 이럴까 생각을 해봤지만, 아연은 그저 딱 '호의'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 전화를 끊고 코너를 돌던 아연은 낯선 차가 집 앞에 주차된 걸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뭐야, 왜 남의 집 앞에다가 차를 대고 난리야?"
  • 심지어 억 소리 나는 고급 외제 차였다. 자신은 차가 없어 딱히 상관이 없었지만, 괜히 괘씸했다. 하지만 근처에 볼일이 있을 수도 있고 여러 상황이 겹쳐 이럴 수도 있으니 내버려뒀다.
  • 차를 지나 대문으로 향했다. 혼자 살기에는 꽤 규모가 큰 집이었다. 심지어 4년 동안 1층 전부가 비어 있어 겁이 많은 아연은 후다닥 들어가기 바빴다. 특히 이러한 어두운 저녁이 될 쯤이면 더욱.
  •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푸른 잔디가 보였다. 가끔 부모님이 관리인을 보내주긴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아연은 신경도 쓰지 않아 엉망으로 자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엉망이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모습에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 "……."
  • 아침에 나갔을 때와 다르게 잔디는 말끔했다. 이름 모를 풀들에 감춰진 2인용 의자와 그가 떠나며 구석에 접혀 있던 해먹까지 제자리를 찾았다.
  • "이게 무슨……."
  • 변한 모습에 후다닥 들어가기보다는 아연은 정원을 둘러봤다. 마치 4년 전과 같은 모습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 "……!"
  • 결정적으로 1층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불을 다 꺼놓아서 바로 발견하진 못했지만, 안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빛에 아연의 손에는 땀이 진득하게 배어났다.
  •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현관문만 바라보던 아연의 시선에 결국, 바라던 모습이 보였다.
  • 큰 키로 현관에서 나오는 강유 덕분에 자동 센서 등이 켜져 그를 비췄다. 집에서 나오던 강유도 우뚝 서 있는 아연을 발견했지만, 그녀만큼 놀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담담한 얼굴로 아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별 후 4년 만의 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