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유현아 씨. 그분이 환자 가족들한테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하셔서요. 이해해 주세요.”
유현아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녀는 이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사람 중, 그 많은 돈을 일시불로 결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머리가 터지게 생각했지만, 누군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왜 그녀에게 이런 도움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이 은혜를 꼭 갚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 조급해하지 말자. 꼭 이분 찾아낼 거야.’
어느새 차는 최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날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유현아가 집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시경도 돌아왔다.
둘은 마침 거실에서 마주쳤다.
“현아 씨, 제 차로 모시려고 했는데 벌써 돌아갔다고 하더라고요.”
성시경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는 이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종일 수술하면서 쌓였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유현아는 미안한 얼굴로 손짓했다.
[감사해요, 선생님. 일이 있어서 먼저 왔어요.]
성시경은 손사래를 치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까만 눈동자는 별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감사는 됐어요. 어차피 같은 길이잖아요. 앞으로 병원에 가실 일이 있으면 제 차 타고 움직이면 돼요.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유현아는 그런 성시경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그는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선의를 베푼 사람이기도 했다.
소여홍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들 모자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소여홍은 까다롭고 변덕이 심한 반면, 성시경은 성격 좋고 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재주가 있었다.
유현아는 펜을 꺼내 할 말을 종이에 적었다.
[원장 선생님께서 그러시는데 할머니 다음 주 월요일이면 수술 들어가실 수 있대요. 혹시 집도 의사가 성 선생님이신가요?]
성시경은 수려한 글자체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 끝나면 어르신 괜찮아지실 거예요.”
유현아는 편안한 미소로 답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담화를 나누다가 유현아가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대화가 끝이 났다.
방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최지한이 보였다.
하안 담배 연기가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유현아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 주방에서는 우연히 만났다고 쳐도, 오늘도 우연인 걸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이곳이 그녀의 방이었다. 그는 왜 갑자기 그녀의 방에 방문한 걸까?
이때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서더니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시경이랑 온종일 놀러 나간 것도 부족해서 돌아와서도 둘이 한참이나 시시덕거리던데? 유현아, 당신 겉보기보다 야망이 큰가 봐? 시경이한테 눈독을 다 들이고?”
유현아는 굳은 표정으로 펜을 꺼내 해명했다.
“성시경 씨는 제 외할머니 주치의예요. 아까 얘기한 것도 외할머니 얘기만 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최지한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 쪽지를 힐끗 보고는 찢어서 바닥에 버렸다.
그는 매서운 눈빛을 빛내며 차갑게 물었다.
“내가 눈뜬장님으로 보여?”
최씨 가문에 시집온 뒤로 한 번도 진심으로 미소를 지어본 적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아까 아래층에서 성시경과 대화를 할 때, 그에게는 한 번도 지어준 적 없는 찬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시경도 좋아하는 여자를 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둘이 아무 사이라도 아니라니,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나한테 이득 볼 게 없으니까 시경이한테 접근한 거야? 시경이가 당신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 걔가 뭐가 부족해서 이미 더럽혀진 벙어리한테 관심을 갖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