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훈의 날카로운 눈빛에 유해성은 덜컥 겁이 났지만 그래도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할 수밖에 없었다.
“승우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혼자 몰래 방으로 들어가더니 창가에 앉아 우산을 들고 바깥을 보고 있었어. 고은정 씨가 승우한테 우산을 쓰고 뛰어내리면 날 수 있다고 말했대. 내가 때마침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순간 진태훈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그의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은정이는 승우 친 이모야. 승우한테 늘 잘해줬고. 아랫사람들 보고 집에 있는 우산 다 치우라고 해!”
진태훈은 마치 고은정을 두둔하려는 듯했다.
유해성은 진태훈의 말을 듣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고은정을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만약 고은정 씨가 정말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그때는…”
유해성은 진태훈의 차가운 눈빛을 피했고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유해성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못 들은 걸로 해.”
유해성은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다가 마침 진태훈을 찾으러 온 용준과 마주쳤다.
용준은 보고할 것이 많았지만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뜩이나 날이 서있는 진태훈은 용준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
“말해.”
“별장의 보안 시스템에 누군가 손을 댄 것 같습니다. 10여 분 동안의 CCTV 영상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하지만 별장에서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장 사람을 보내 추적하고 보안을 강화해. 승우의 안전도 더 신경 쓰도록!”
눈살을 찌푸린 진태훈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진 씨 가문의 보안 시스템은 세계 탑 수준이라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이 없었다.
오늘의 기괴한 사건들을 그녀와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와 연관된 건지 한번 알아봐.”
“좀 전에 조사해 봤지만 아직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여자의 신분이 너무 미스터리해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무능한 탓에 지금까지 알아낸 건 이름뿐인데 고… 고수연이라고 합니다…”
용준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진태훈 앞에서 ‘고수연’이라는 세 글자가 금기어라는 것을 진 씨 가문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 신비로운 여자의 이름이 하필이면 고수연이라니!
용준은 그 여인이 서울에서 비참하게 쫓겨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고수연?”
진태훈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름은 같지만 생김새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연인 것 같아요.”
용준은 애써 그를 위로했다.
‘전 사모님이 돌아가신 지 5년이나 지났는데 부활이라도 했겠어? 게다가 두 사람의 생김새와 성격이 전혀 딴판이라고.’
진태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계속 조사해! 그 여자, 분명 문제가 있어!”
그녀가 ‘고수연’ 이라는 이름으로 할아버지 묘지에 인사하러 갔었기에 진태훈은 절대 우연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오늘 밤 별장 보안 시스템이 해킹당한 것도 이 여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비록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여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치명적인 익숙함 때문의 진태훈의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용준은 조심스럽게 진태훈의 눈치를 살폈다.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은정 아가씨에 관한 일인데, 인터넷에서 누군가 아가씨에 관한 악의적인 기사를 냈고 현재 실시간 검색어 1위입니다. 우리 쪽에서 손을 쓸까요?”
용준이 태블릿PC를 건네자 고은정에 관한 몇 가지 검색어가 진태훈의 눈에 들어왔다.
진태훈은 한 번 훑어보고는 태블릿 PC를 내던졌다.
“이따위 하찮은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
다들 고은정이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진태훈은 몇 년 동안 줄곧 고은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봐왔기에 다른 사람의 지적이 필요 없었다.
“네, 대표님.”
고시윤은 잠들면 엄마가 쳐들어와서 데리고 가버릴까 봐 자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서 잠시 바깥의 상황을 엿듣고 있다가 도둑고양이처럼 진태훈의 서재 문 앞에 조용히 엎드렸다.
물론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작은 귀를 바싹 문에 대고 엿듣는 게 옹졸하고 치사한 것 같이 느껴졌다. 뭐라고 하는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 이제 조금 들리는 것 같아! 이런 나쁜 놈, 감히 우리 엄마를 조사하다니!’
고시윤은 절대로 엄마를 이 나쁜 놈의 손에 잡히게 둘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문이 움직이는 거지? 헉…’
문이 열리자 고시윤은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반응이 빨라서 앞사람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승우야, 여기서 뭐해?”
자신의 다리를 잡고 있는 아들을 보자 진태훈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고 눈빛에는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아들이 자신을 향해 벌린 작은 두 손을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아들을 안았다.
진승우가 말을 하게 된 후, 그는 두 사람의 사이가 이렇게 가까워질 줄 몰랐다.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고시윤은 자기가 엿듣고 있었다는 게 들통이 날 까봐 진태훈에 대한 역겨운 감정을 꾹 삼키고는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빠, 저랑 같이 자면 안 돼요?”
비록 친자식이라 예뻐하기는 했지만 진승우가 말을 하지 못해서 둘 사이가 별로 가깝지 않다고 유해성이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제출하면 진태훈이 싫다고 할게 뻔하니 고시윤은 무조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진태훈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
평소 같으면 자식에게 독립해야 한다고 가르쳤을 텐데 오늘은 이 아이가 너무 많은 일들을 겪은 것 같아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뭐야, 정보가 잘못된 거야? 두 사람 별로 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
고시윤은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나쁜 남자와 같이 자다니!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게 낫지! 하지만 지금은 물러설 곳이 없어… 엄마를 위해 내가 희생할 수밖에!’
이튿날 아침.
고수연은 고시윤이 보낸 카카오톡 문자 소리에 깨났다. 대화 창에는 잠든 미남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 미남은 다름 아닌 진태훈이었다.
그리고 진태훈 얼굴에 그린 커다란 거북이는 고시윤의 걸작인 게 분명했다.
‘역시 내 아들, 뭘 좀 아네.’
고수연이 고소해 하고 있는데 고시윤이 연속 문자를 보내왔다.
“엄마, 이 나쁜 남자가 엄마를 조사하고 있어요! 아들이 곁에 없으니 꼭 조심하세요! 그리고 제가 엄마를 지켜 줄 테니 걱정 마세요! 이 남자가 감히 엄마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제가 이놈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며칠만 괴롭히고 돌아갈 테니 저를 너무 보고 싶어 하지 마시고 잘 지내요! 사랑해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