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연은 쉽게 고은정을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다. 손을 들어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고은정의 마음을 한 번 또 한 번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고은정 씨가 내 노트북을 배상하기로 약속했는데, 설마 저버리진 않겠지?”
고은정은 재빨리 돌아서며 고수연의 두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작 노트북 때문이라니? 200억도 손에 쥔 사람이 그깟 돈도 넘보는 거야?”
고은정은 견적서를 고은정에게 넘겨 주라고 배혁에게 눈짓했다.
“고은정 씨, 미리 말해두는데 한 대가 아니라 열 대라고!”
계산서를 훑어본 고은정은 화가 치밀어 올라 그대로 바닥에 던지며 발로 힘껏 짓밟아 버렸다.
“너무 하는 거 아니야! 그깟 노트북 몇 대 가… 6, 600억? 강도가 따로 없네!”
차가운 표정을 지은 배혁이 살짝 귀띔해 줬다.
“고은정 씨, 저희 회장님의 노트북은 특별히 주문한 것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사양이기도 하죠. 더 중요한 것은 여러 해 동안 전 세계자선협회의 많은 선배들이 쌓아 올린 경험 자료, 그리고 이번 자선협회 수상자와 관련된 자료들까지 전부 포함되어 있어 열 대에 600억을 청구하겠다는데 그게 많습니까?”
“너, 너희들, 날 너무 무시하지 마!”
‘대놓고 뜯어먹겠다는 심보잖아! 그 늙은이가 생전에 이런 여자를 알고 지냈다는 걸 왜 몰랐을까?’
고수연은 그래도 그녀를 난처하게 하진 않았다.
“고은정 씨가 이 가격이 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뭐 됐어! 내가 사람 찾아 컴퓨터를 고치면 그만이지만 예전의 후보자 명단을 그대로 원상복구할 수 있는지 그건 장담 못 하겠네!”
이 말을 들은 고은정은 낯빛이 파래졌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그래, 눈치챘네.”
고수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은정은 화가 치밀어 올라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좋아, 당했다 치자. 하지만 당신들 사람 약점을 잡아 한몫 챙기는 것이니 신령님께 많이 기도하기를 바라. 돈은 벌어놓고 쓰지 못하는 꼴을 만들지 말고.”
‘내가 진 씨 가문에 시집가서 그 집 안주인이 되는 날엔 반드시 이 사람들을 지옥에 처넣을 거야!’
고은정은 무서운 말을 뱉은 후 체면을 좀 찾은 것 같기도 해서 씩씩거리며 가 버렸다.
실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어떻게 걸어 나왔는 지도 모르다. 800억이라, 시간이 반나절 밖에 없는데 어디 가서 800억을 구한단 말인가!
고수연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순 없다. 그 영감탱이든, 거짓 후원금 사건이든, 그녀의 약점이 고수연의 손에 잡히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럼 그녀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고수연은 목적이 달성되어 기분이 좋아졌다. 호주머니의 녹음 펜을 배혁에게 넘겨주고 방금 결정적 시기에 찍힌 CCTV 동영상을 모두 찾아내라고 했다.
“사람을 시켜 김혁규를 잘 감시하고. 이 사람이 등을 돌렸으니 고은정이 가만 놔 둘리가 없지. 의외로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네, 회장님.”
…
한편, 진 씨 가문의 별장은 암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병원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고수연이라는 여인을 만난 후, 진태훈은 서재에 자신을 가둔 채 검은색 회전의자에 앉았다.
헐렁한 검정 셔츠 사이로 섹시하고 탄탄한 가슴을 드러낸 모습이 마치 퇴폐적이고 금욕생활을 하고 있는 어둠 속에 잠긴 지옥의 왕 같아 보였다.
머릿속에는 온통 5년 전의 그 화면들뿐이었다.
5년 전, 고수연이 양심을 저버리고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했고 진 씨 가문을 배신해 고은정을 심하게 다치게 했다. 그 당시 CCTV 영상에는 범행을 저지른 사람의 모습이 선명히 찍혔는데 바로 그 얼굴, 임신 상태였던 그 여인, 고수연이 아니면 또 누구겠는가? 이미 인적증거와 물증이 다 확보된 상태였고 화가난 나머지 그녀를 경찰서로 이송해 대가를 치르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날 밤, 승우 혼자만 남겨놓고 그녀가 죽었다! 어찌 이대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고수연이 아직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대가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대로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감히!
하지만 지금, 그 신비한 여인이 나타난 후 계속 고수연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에 대한 증오심도 다시 일깨워놓았다! 바로 이 증오심이 마음을 잡아당겼고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심각한 불면증을 앓고 있어 증상이 점점 더 악화된 것 같은데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신경 하나하나가 큰 소리로 고함치고 있다! 그 여인의 몸에는 고수연과 동일한 익숙한 냄새와 눈빛, 그리고 이름까지! 심지어 할아버지의 기일에 묘원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그녀의 신상에 관한 아무런 내용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게 더욱 의심스럽다! 하지만 결코 고수연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죽었으니까! 그녀는 결코 할아버지의 오랜 벗처럼 그렇게 간단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똑똑똑, 대표님…”
멘붕에 빠졌다가 귀찮은 노크 소리가 들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간을 풀던 진태훈은 결국 화를 내며 대답했다.
“들어와!”
“방금 들려온 소식입니다. 묘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해 보니 그 당시 승우 도련님과 함께 실종된 사람 중에 또 한 명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고현수입니다.”
“고현수?”
‘이름이 왠지 익숙하단 말이야.’
“네, 이 사람은 고은정의 수행비서입니다. 주변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우리가 등산할 때 고수현은 바로 고은정 씨 뒤에 따라오고 있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하지만 승우 도련님이 실종되었을 무렵 그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사람이 좀 의심스럽지만 하필 고은정 씨 부하라서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요?”
“조사해, 누구 사람이든, 여하튼 승우의 신변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조사해야 한다!”
“네!”
“대표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용준이 잠깐 망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데?”
“묘원의 CCTV 동영상에 보호용 데이터가 나타났는데 마치 누가 원격으로 조종하여 프로그램에 손을 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에 CCTV를 망가뜨린 사람이 한 짓일 겁니다. 저희가 거꾸로 추적할 때 파괴된 묘원 동영상을 복제해 간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누군데?”
“비록 IP 주소 흔적은 지웠지만 그 흔적을 따라 확인해 보니 위치가 병원…”
“그 신비한 여자?”
“아직 확실치가 않지만 현재 상태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그녀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대표님이 그 여자를 엄청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보고한 것이었다.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
“한 시간 전에 글로벌 자선협회 사무실에 나타났는데 바로 10분 전 그만 놓쳤습니다…”
용준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화면에 정지되어 있던 빨간 점이 회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컹하여 진태훈을 바라보며 긴장했다.
‘진 씨 가문의 최첨단 추적 기술을 사용했는데도 이렇게 쉽게 놓쳐버리다니, 역시 보통 아니야.’
순식간에 서재안의 분위기가 조용해져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진태훈이 침묵하자 용준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결국 용준이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어 진태훈의 다리라도 붙잡고 빌어보려던 찰나에 진태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10분 내로 그 여자의 위치를 찾아내. 안 그러면 아프리카에 보내 우물 파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