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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불렀다 하면 800억

  • “비켜!”
  • 그녀가 차갑게 호통쳤다.
  • 하지만 뒤에서 여인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 고수연은 쉽게 고은정을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다. 손을 들어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고은정의 마음을 한 번 또 한 번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 “고은정 씨가 내 노트북을 배상하기로 약속했는데, 설마 저버리진 않겠지?”
  • 고은정은 재빨리 돌아서며 고수연의 두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 “고작 노트북 때문이라니? 200억도 손에 쥔 사람이 그깟 돈도 넘보는 거야?”
  • 고은정은 견적서를 고은정에게 넘겨 주라고 배혁에게 눈짓했다.
  • “고은정 씨, 미리 말해두는데 한 대가 아니라 열 대라고!”
  • 계산서를 훑어본 고은정은 화가 치밀어 올라 그대로 바닥에 던지며 발로 힘껏 짓밟아 버렸다.
  • “너무 하는 거 아니야! 그깟 노트북 몇 대 가… 6, 600억? 강도가 따로 없네!”
  • 차가운 표정을 지은 배혁이 살짝 귀띔해 줬다.
  • “고은정 씨, 저희 회장님의 노트북은 특별히 주문한 것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사양이기도 하죠. 더 중요한 것은 여러 해 동안 전 세계자선협회의 많은 선배들이 쌓아 올린 경험 자료, 그리고 이번 자선협회 수상자와 관련된 자료들까지 전부 포함되어 있어 열 대에 600억을 청구하겠다는데 그게 많습니까?”
  • “너, 너희들, 날 너무 무시하지 마!”
  • ‘대놓고 뜯어먹겠다는 심보잖아! 그 늙은이가 생전에 이런 여자를 알고 지냈다는 걸 왜 몰랐을까?’
  • 고수연은 그래도 그녀를 난처하게 하진 않았다.
  • “고은정 씨가 이 가격이 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뭐 됐어! 내가 사람 찾아 컴퓨터를 고치면 그만이지만 예전의 후보자 명단을 그대로 원상복구할 수 있는지 그건 장담 못 하겠네!”
  • 이 말을 들은 고은정은 낯빛이 파래졌다.
  •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 “그래, 눈치챘네.”
  • 고수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 고은정은 화가 치밀어 올라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 “좋아, 당했다 치자. 하지만 당신들 사람 약점을 잡아 한몫 챙기는 것이니 신령님께 많이 기도하기를 바라. 돈은 벌어놓고 쓰지 못하는 꼴을 만들지 말고.”
  • ‘내가 진 씨 가문에 시집가서 그 집 안주인이 되는 날엔 반드시 이 사람들을 지옥에 처넣을 거야!’
  • 고은정은 무서운 말을 뱉은 후 체면을 좀 찾은 것 같기도 해서 씩씩거리며 가 버렸다.
  • 실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어떻게 걸어 나왔는 지도 모르다. 800억이라, 시간이 반나절 밖에 없는데 어디 가서 800억을 구한단 말인가!
  • 고수연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순 없다. 그 영감탱이든, 거짓 후원금 사건이든, 그녀의 약점이 고수연의 손에 잡히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럼 그녀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 고수연은 목적이 달성되어 기분이 좋아졌다. 호주머니의 녹음 펜을 배혁에게 넘겨주고 방금 결정적 시기에 찍힌 CCTV 동영상을 모두 찾아내라고 했다.
  • “사람을 시켜 김혁규를 잘 감시하고. 이 사람이 등을 돌렸으니 고은정이 가만 놔 둘리가 없지. 의외로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 “네, 회장님.”
  • 한편, 진 씨 가문의 별장은 암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 병원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고수연이라는 여인을 만난 후, 진태훈은 서재에 자신을 가둔 채 검은색 회전의자에 앉았다.
  • 헐렁한 검정 셔츠 사이로 섹시하고 탄탄한 가슴을 드러낸 모습이 마치 퇴폐적이고 금욕생활을 하고 있는 어둠 속에 잠긴 지옥의 왕 같아 보였다.
  • 머릿속에는 온통 5년 전의 그 화면들뿐이었다.
  • 5년 전, 고수연이 양심을 저버리고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했고 진 씨 가문을 배신해 고은정을 심하게 다치게 했다. 그 당시 CCTV 영상에는 범행을 저지른 사람의 모습이 선명히 찍혔는데 바로 그 얼굴, 임신 상태였던 그 여인, 고수연이 아니면 또 누구겠는가? 이미 인적증거와 물증이 다 확보된 상태였고 화가난 나머지 그녀를 경찰서로 이송해 대가를 치르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하지만 바로 그날 밤, 승우 혼자만 남겨놓고 그녀가 죽었다! 어찌 이대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고수연이 아직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대가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대로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감히!
  • 하지만 지금, 그 신비한 여인이 나타난 후 계속 고수연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에 대한 증오심도 다시 일깨워놓았다! 바로 이 증오심이 마음을 잡아당겼고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안 그래도 심각한 불면증을 앓고 있어 증상이 점점 더 악화된 것 같은데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신경 하나하나가 큰 소리로 고함치고 있다! 그 여인의 몸에는 고수연과 동일한 익숙한 냄새와 눈빛, 그리고 이름까지! 심지어 할아버지의 기일에 묘원까지 다녀왔다!
  • 그리고 그녀의 신상에 관한 아무런 내용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게 더욱 의심스럽다! 하지만 결코 고수연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죽었으니까! 그녀는 결코 할아버지의 오랜 벗처럼 그렇게 간단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 “똑똑똑, 대표님…”
  • 멘붕에 빠졌다가 귀찮은 노크 소리가 들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간을 풀던 진태훈은 결국 화를 내며 대답했다.
  • “들어와!”
  • “방금 들려온 소식입니다. 묘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해 보니 그 당시 승우 도련님과 함께 실종된 사람 중에 또 한 명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고현수입니다.”
  • “고현수?”
  • ‘이름이 왠지 익숙하단 말이야.’
  • “네, 이 사람은 고은정의 수행비서입니다. 주변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우리가 등산할 때 고수현은 바로 고은정 씨 뒤에 따라오고 있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하지만 승우 도련님이 실종되었을 무렵 그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사람이 좀 의심스럽지만 하필 고은정 씨 부하라서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요?”
  • “조사해, 누구 사람이든, 여하튼 승우의 신변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조사해야 한다!”
  • “네!”
  • “대표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 용준이 잠깐 망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뭔데?”
  • “묘원의 CCTV 동영상에 보호용 데이터가 나타났는데 마치 누가 원격으로 조종하여 프로그램에 손을 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에 CCTV를 망가뜨린 사람이 한 짓일 겁니다. 저희가 거꾸로 추적할 때 파괴된 묘원 동영상을 복제해 간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 “그게 누군데?”
  • “비록 IP 주소 흔적은 지웠지만 그 흔적을 따라 확인해 보니 위치가 병원…”
  • “그 신비한 여자?”
  • “아직 확실치가 않지만 현재 상태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그녀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대표님이 그 여자를 엄청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보고한 것이었다.
  •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
  • “한 시간 전에 글로벌 자선협회 사무실에 나타났는데 바로 10분 전 그만 놓쳤습니다…”
  • 용준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화면에 정지되어 있던 빨간 점이 회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컹하여 진태훈을 바라보며 긴장했다.
  • ‘진 씨 가문의 최첨단 추적 기술을 사용했는데도 이렇게 쉽게 놓쳐버리다니, 역시 보통 아니야.’
  • 순식간에 서재안의 분위기가 조용해져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진태훈이 침묵하자 용준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 결국 용준이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어 진태훈의 다리라도 붙잡고 빌어보려던 찰나에 진태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 “10분 내로 그 여자의 위치를 찾아내. 안 그러면 아프리카에 보내 우물 파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