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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난잡한 인간관계

  • 하지만 그럴수록 진태훈의 낯빛은 점점 일그러져만 갔다. 그의 우람한 체격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고수연을 집어삼켰다.
  • “다시 한번 물어보지. 너 대체 누구야? 똑바로 생각하고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 고수연은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들어 진태훈을 바라봤다.
  • “나 고수연 맞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 전처는 아니지. 당신도 조사 다 해보고 얘기하는 거 아냐?”
  • 진태훈의 칠흑 같은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였다. 화를 억눌러 참는 듯 힘이 잔뜩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 “진짜 고수연이 아닌 걸 당신은 진짜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 “왜?”
  • “만약 네가 고수연이었으면 당신 1분이라도 더 살게 내가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니까.”
  • “전처를 엄청 미워했나 보네. 왜, 그래서 날 그 사람 대역으로 생각하기라도 한 거야? 그래서 지금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원망을 나한테 다 쏟아내려고 그래? 그녀를 엄청 사랑했나 봐? 미운 감정도 사랑해야 생기는 법이거든.”
  • “하, 사랑? 그 사람이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 터무니없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진태훈은 망설임 없이 반박하고 나섰다. 이미 마음속으로 다 알고 있는 대답이라 해도 5년 만에 직접 다시 들으니 고수연은 마음이 아팠다.
  • 그렇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자꾸 그의 마음을 시험하려고 들고, 또 가슴이 자꾸 아파져오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억울해서? 아니. 그녀가 유일하게 억울한 건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밖에서 자유롭게 나다니게 놔둔 것밖에 없었다.
  • 고수연이 서울로 다시 올라온 건 진태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아이를 위하여, 할아버지의 복수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억울함을 씻어내려고 서울에 올라온 것이었다.
  • 진태훈같은 남자에게 다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됐다. 그는 그럴 가치가 전혀 없는 남자였다. 더군다나 승우가 아직 여기에 있었다. 진태훈에게 아이의 위치를 들켜서는 절대 안 됐다.
  •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고수연은 차오르려던 눈물을 삼킨 채 얼굴을 굳히고 단호하게 말했다.
  • “진태훈 씨 가정사에 내가 괜한 질문을 했네. 다른 일 없으면 이제 그만 가보지 그래? 나 이만 쉬고 싶어.”
  • 말을 마친 고수연은 진태훈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려 했다. 그러나 진태훈은 그녀를 그대로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 “잠깐!”
  • 진태훈의 싸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흘러나왔다.
  • “왜, 다른 볼일이라도 있어?”
  • 고수연은 엉망진창이 된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뒤로 돌아선 그녀의 얼굴에 어느덧 담담한 표정만이 떠올랐다.
  • “묘원의 CCTV 영상은 왜 빼갔어? 그거 갖고 뭐 하려고?”
  • “뭐?”
  • “묘원의 CCTV가 고장 났더군. 그리고 누구도 영상을 확인할 수 없게 잠겨져 있었고. 그렇게 되기 전에 영상을 복제해간 게 당신이잖아! 당신이 내 아들 실종사건이랑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이렇게 한 이유가 뭔데?”
  • 진태훈은 냉랭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커다랗게 나있는 창문 밖으로 내리치는 번개에 고수연은 몸으로 전해져오는 압박감이 한 단계 더 심해짐을 느꼈다.
  • 그의 말을 들은 고수연은 눈썹을 들썩이더니 늘씬하게 뻗은 몸매를 우아하게 늘어뜨렸다. 그녀의 눈빛에 순간 매혹스러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 “그러니까 내가 묘원의 CCTV를 고장 냈다, 이 뜻이야?”
  • “안 봐도 뻔하지.”
  •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디딘 진태훈은 아예 그녀를 구석으로 힘껏 밀친 채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려는 듯 진태훈은 고수연의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 고수연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올려 진태훈의 각진 턱 선을 만졌다.
  • “그럼 당신은 내가 어쩌려고 그랬을 것 같아?”
  • “내 아들이 실종됐었던 거랑 당신이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어?”
  • 비록 승우가 무사히 돌아왔긴 하지만 이번 사건엔 이상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사라진 CCTV 영상, 그리고 갑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된 승우, 그가 얘기해 준 그를 도와줬다던 신비한 의사선생님, 이 모든 것이 다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 고수연은 어두워진 눈빛으로 진태훈을 향해 반박했다.
  • “당신이 먼저 내가 당신 아들 훔쳤다고 날 모함했잖아!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썼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겠어? 그래서 CCTV 영상을 복제했고, 내가 왜 그렇게 당신한테 의심을 샀어야만 했는지 확인하려고 했던 것뿐이야. 그런데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안타깝게도 CCTV 영상에 문제가 생겨서 볼 수가 없게 됐더라고.”
  • “고작 그 영상만으로 날 의심한 거 나 아직 당신한테 따지지도 않았거든? 근데 오히려 나를 추궁하려 드는 거야?”
  • 진태훈은 억울함에 일그러진 고수연의 연약한 모습을 바라보며 점점 얼굴을 굳혔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반대로 질타를 연신 쏟아내는 그녀의 모습에 진태훈은 예상 밖이라는 듯 속으로 놀랐다.
  • 그는 고수연의 허리를 꽉 틀어쥔 채 분노를 터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고수연의 손가락이 짙은 유혹의 향기를 풍기며 그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 “진태훈 씨, 그렇게 여자를 아낄 줄 몰라서야 되겠어? 어떻게 나한테 보상해 줄 건데?”
  • 고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태훈은 머리끝까지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화가 잔뜩 난 그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서둘러 그녀를 밀쳐냈다. 고수연은 간이 크게도 또 그를 유혹하려고 들었다.
  • 여우같은 년!
  • 온갖 수작을 부리면서 한 이 모든 짓들이 단지 그를 꼬시려고 그랬던 것일까? 진태훈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 “경고하는데 헛된 꿈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너한테 관심 없어!”
  • 고수연은 그가 고은정 이외의 여자와 몸이 닿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까 그녀가 보였던 유혹은 그의 혐오를 불러일으켜 빨리 이 자리를 뜨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 거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겨울로 들어선 것처럼 차가워졌다. 고수연은 어떻게 하면 눈앞의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그러던 그때 방안에 이상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
  • “아빠의 귀염둥이가 전화 왔떠염. 빨리 전화받아요! 아빠가 제일 사랑하는 귀염둥이에용!”
  • 자신한테서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진태훈의 손끝에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요상한 벨 소리는 그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 손에서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바라보는 진태훈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진승우는 어딘가 약간 달라져 있었다. 성격도 조금 활발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벨 소리는 좀…
  • “푸흡!”
  • 고수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진태훈 씨 벨 소리 진짜 남다르네.”
  •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으며 웃던 그녀는 짐짓 정색하며 진태훈을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 이놈 이거, 눈치가 짱인데? 고수연은 속으로 아들 시윤을 연신 칭찬했다.
  •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진태훈은 고수연에게 눈길을 한 번 준 뒤 몸을 돌려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 “아빠, 밖에 비 와요. 저 무서워서 그러는데 빨리 와서 저랑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 거절을 하려던 진태훈은 결국 아들이 걱정되는 마음에 데려왔던 무리들을 이끌고 빗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수연은 그제야 긴장으로 팽팽해졌던 신경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길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에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그때 창문 밖으로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서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 깜짝 놀란 그녀는 얼른 달려가 창문을 열었더니 특별 제작한 우비를 입은 고시윤이 등에 가방을 멘 채 괴상한 자세로 문틈을 헤집고 있었다. 아마도 문을 따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모양이다.
  • “엄마, 하이!”
  • 현장을 들킨 고시윤이 특별 제작한 우비의 버튼을 누르자 부드럽고 귀여운 작은 얼굴이 톡 튀어나왔다. 어차피 지나가는 김에 조용히 엄마를 보고 갈 생각이었던 고시윤은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다는 듯 웃음기가 가득한 두 눈으로 고수연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투명 모드를 추가했어야 됐다고 고시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 “고시윤, 비 이렇게 많이 오는데 여기서 뭐해?”
  • 고수연은 아들을 덥석 안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들이 머리카락 한올조차 젖지 않았음을 확인한 그녀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고시윤은 아들을 소파에 내려놓은 뒤 우유를 데워서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 “저 그 나쁜 아저씨 뒤를 밟았거든요. 어때요, 엄마. 제 전화 타이밍이 기가 막히지 않았나요?”
  • “그래, 기가 막혔지. 역시 내 아들이야! 잠깐만, 근데 너 진태훈 씨 뒤를 밟았다고?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