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럴수록 진태훈의 낯빛은 점점 일그러져만 갔다. 그의 우람한 체격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고수연을 집어삼켰다.
“다시 한번 물어보지. 너 대체 누구야? 똑바로 생각하고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고수연은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들어 진태훈을 바라봤다.
“나 고수연 맞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 전처는 아니지. 당신도 조사 다 해보고 얘기하는 거 아냐?”
진태훈의 칠흑 같은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였다. 화를 억눌러 참는 듯 힘이 잔뜩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고수연이 아닌 걸 당신은 진짜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왜?”
“만약 네가 고수연이었으면 당신 1분이라도 더 살게 내가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니까.”
“전처를 엄청 미워했나 보네. 왜, 그래서 날 그 사람 대역으로 생각하기라도 한 거야? 그래서 지금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원망을 나한테 다 쏟아내려고 그래? 그녀를 엄청 사랑했나 봐? 미운 감정도 사랑해야 생기는 법이거든.”
“하, 사랑? 그 사람이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터무니없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진태훈은 망설임 없이 반박하고 나섰다. 이미 마음속으로 다 알고 있는 대답이라 해도 5년 만에 직접 다시 들으니 고수연은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자꾸 그의 마음을 시험하려고 들고, 또 가슴이 자꾸 아파져오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억울해서? 아니. 그녀가 유일하게 억울한 건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밖에서 자유롭게 나다니게 놔둔 것밖에 없었다.
고수연이 서울로 다시 올라온 건 진태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아이를 위하여, 할아버지의 복수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억울함을 씻어내려고 서울에 올라온 것이었다.
진태훈같은 남자에게 다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됐다. 그는 그럴 가치가 전혀 없는 남자였다. 더군다나 승우가 아직 여기에 있었다. 진태훈에게 아이의 위치를 들켜서는 절대 안 됐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고수연은 차오르려던 눈물을 삼킨 채 얼굴을 굳히고 단호하게 말했다.
“진태훈 씨 가정사에 내가 괜한 질문을 했네. 다른 일 없으면 이제 그만 가보지 그래? 나 이만 쉬고 싶어.”
말을 마친 고수연은 진태훈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려 했다. 그러나 진태훈은 그녀를 그대로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잠깐!”
진태훈의 싸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흘러나왔다.
“왜, 다른 볼일이라도 있어?”
고수연은 엉망진창이 된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뒤로 돌아선 그녀의 얼굴에 어느덧 담담한 표정만이 떠올랐다.
“묘원의 CCTV 영상은 왜 빼갔어? 그거 갖고 뭐 하려고?”
“뭐?”
“묘원의 CCTV가 고장 났더군. 그리고 누구도 영상을 확인할 수 없게 잠겨져 있었고. 그렇게 되기 전에 영상을 복제해간 게 당신이잖아! 당신이 내 아들 실종사건이랑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이렇게 한 이유가 뭔데?”
진태훈은 냉랭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커다랗게 나있는 창문 밖으로 내리치는 번개에 고수연은 몸으로 전해져오는 압박감이 한 단계 더 심해짐을 느꼈다.
그의 말을 들은 고수연은 눈썹을 들썩이더니 늘씬하게 뻗은 몸매를 우아하게 늘어뜨렸다. 그녀의 눈빛에 순간 매혹스러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묘원의 CCTV를 고장 냈다, 이 뜻이야?”
“안 봐도 뻔하지.”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디딘 진태훈은 아예 그녀를 구석으로 힘껏 밀친 채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려는 듯 진태훈은 고수연의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고수연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올려 진태훈의 각진 턱 선을 만졌다.
“그럼 당신은 내가 어쩌려고 그랬을 것 같아?”
“내 아들이 실종됐었던 거랑 당신이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어?”
비록 승우가 무사히 돌아왔긴 하지만 이번 사건엔 이상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사라진 CCTV 영상, 그리고 갑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된 승우, 그가 얘기해 준 그를 도와줬다던 신비한 의사선생님, 이 모든 것이 다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고수연은 어두워진 눈빛으로 진태훈을 향해 반박했다.
“당신이 먼저 내가 당신 아들 훔쳤다고 날 모함했잖아!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썼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겠어? 그래서 CCTV 영상을 복제했고, 내가 왜 그렇게 당신한테 의심을 샀어야만 했는지 확인하려고 했던 것뿐이야. 그런데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안타깝게도 CCTV 영상에 문제가 생겨서 볼 수가 없게 됐더라고.”
“고작 그 영상만으로 날 의심한 거 나 아직 당신한테 따지지도 않았거든? 근데 오히려 나를 추궁하려 드는 거야?”
진태훈은 억울함에 일그러진 고수연의 연약한 모습을 바라보며 점점 얼굴을 굳혔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반대로 질타를 연신 쏟아내는 그녀의 모습에 진태훈은 예상 밖이라는 듯 속으로 놀랐다.
그는 고수연의 허리를 꽉 틀어쥔 채 분노를 터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고수연의 손가락이 짙은 유혹의 향기를 풍기며 그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진태훈 씨, 그렇게 여자를 아낄 줄 몰라서야 되겠어? 어떻게 나한테 보상해 줄 건데?”
고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태훈은 머리끝까지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화가 잔뜩 난 그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서둘러 그녀를 밀쳐냈다. 고수연은 간이 크게도 또 그를 유혹하려고 들었다.
여우같은 년!
온갖 수작을 부리면서 한 이 모든 짓들이 단지 그를 꼬시려고 그랬던 것일까? 진태훈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경고하는데 헛된 꿈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너한테 관심 없어!”
고수연은 그가 고은정 이외의 여자와 몸이 닿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까 그녀가 보였던 유혹은 그의 혐오를 불러일으켜 빨리 이 자리를 뜨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거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겨울로 들어선 것처럼 차가워졌다. 고수연은 어떻게 하면 눈앞의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그러던 그때 방안에 이상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아빠의 귀염둥이가 전화 왔떠염. 빨리 전화받아요! 아빠가 제일 사랑하는 귀염둥이에용!”
자신한테서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진태훈의 손끝에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요상한 벨 소리는 그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손에서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바라보는 진태훈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진승우는 어딘가 약간 달라져 있었다. 성격도 조금 활발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벨 소리는 좀…
“푸흡!”
고수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태훈 씨 벨 소리 진짜 남다르네.”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으며 웃던 그녀는 짐짓 정색하며 진태훈을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 이놈 이거, 눈치가 짱인데? 고수연은 속으로 아들 시윤을 연신 칭찬했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진태훈은 고수연에게 눈길을 한 번 준 뒤 몸을 돌려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아빠, 밖에 비 와요. 저 무서워서 그러는데 빨리 와서 저랑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거절을 하려던 진태훈은 결국 아들이 걱정되는 마음에 데려왔던 무리들을 이끌고 빗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수연은 그제야 긴장으로 팽팽해졌던 신경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길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에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그때 창문 밖으로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서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란 그녀는 얼른 달려가 창문을 열었더니 특별 제작한 우비를 입은 고시윤이 등에 가방을 멘 채 괴상한 자세로 문틈을 헤집고 있었다. 아마도 문을 따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모양이다.
“엄마, 하이!”
현장을 들킨 고시윤이 특별 제작한 우비의 버튼을 누르자 부드럽고 귀여운 작은 얼굴이 톡 튀어나왔다. 어차피 지나가는 김에 조용히 엄마를 보고 갈 생각이었던 고시윤은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다는 듯 웃음기가 가득한 두 눈으로 고수연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투명 모드를 추가했어야 됐다고 고시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고시윤, 비 이렇게 많이 오는데 여기서 뭐해?”
고수연은 아들을 덥석 안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들이 머리카락 한올조차 젖지 않았음을 확인한 그녀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고시윤은 아들을 소파에 내려놓은 뒤 우유를 데워서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저 그 나쁜 아저씨 뒤를 밟았거든요. 어때요, 엄마. 제 전화 타이밍이 기가 막히지 않았나요?”
“그래, 기가 막혔지. 역시 내 아들이야! 잠깐만, 근데 너 진태훈 씨 뒤를 밟았다고?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