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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무릎을 꿇고 사과하라고?

  • 고수연은 그의 손을 밟고 차분하면서도 느긋하게 고은정을 향해 걸어갔다.
  • 하이힐에 묻은 피는 그대로 바닥에 찍혀 마치 붉은 장미 같았다.
  • 고은정은 공포감에 무서워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 ‘땡’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는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멈췄고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 고은정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그들에게 달려갔다.
  • “김 팀장, 저 여자가 단체 내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어. 얼른 쫓아 내.”
  • 김 팀장은 뚱뚱하고 못생겼다. 하지만 그는 고은정의 골수 팬이었다.
  • 그는 고은정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더니 용기가 생겼는지 그 틈을 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감싸주었다.
  • “뭐라고? 누가 감히 여기서 행패를 부려? 간덩이가 부었나? 아주 죽고 싶어 환장했네.”
  • 그는 고은정을 진정시키고 흉악한 돼지 얼굴을 한 채 고수연과 마주했다.
  • “너 누군데 감히 우리 단체에서 행패를 부려? 고은정 씨는 우리한테 온 귀한 손님이야. 서울의 자선 공주라고. 알아 들어? 그런 분한테 폭행이라니 너 죽고 싶어? 얼른 고은정 씨한테 무릎 꿇고 사과 안 해?”
  • 범인의 모습을 자세히 보던 김혁규는 순간 멍해졌다. 난동을 부린 여자가 이렇게 멋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 몸매는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 그야말로 꿈속에서 그리던 고은정보다 더 멋있었다. 만약 이 여자를 정복하고 고은정을 보호해 주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었다.
  • 고은정은 비록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상황이 역겨웠지만 겁 없이 달려드는 저 년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참고 견뎌야 했다.
  • 김혁규는 자선 단체의 경영진이었다. 경영진에게 밉 보이면 겁 없이 날뛰는 그녀를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 자기 분수를 알고 덤벼야지. 어디서 감히 고은정에게 폭행을 휘두른단 말인가.
  • 고수연은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리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잠시 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남자의 가슴에 달려 있는 이름표에 멈췄다.
  • 눈가에는 찬 기운이 감돌았고 입술을 찡긋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 “김혁규, 자선 단체의 팀장? 권력이 아주 대단하네.”
  • 김혁규는 단체 내에서도 제멋대로였고 당연히 눈앞에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얼른 사과부터 해야지 어디서 감히 소란이야. 오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은정 씨한테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사과하면 없던 일로 해줄 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게 얘기할 때 얼른 끝내자고.”
  • “무릎을 꿇고 사과하라고?”
  • 고수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김혁규는 기세등등해서 말했다.
  • “그래. 반드시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돼. 아니면 오늘 여기서 한 발짝도 못 움직여.”
  • 그는 앞에 있는 이 계집애가 손이야 발이야 빌기를 기다렸다.
  • 하지만 고수연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 “놀고들 있네. 근데 어쩌지? 내가 무릎을 꿇으면 당신들의 은정 씨가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데 말이야.”
  • 김혁규는 그녀가 자신의 호의를 무시하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 “은정 씨는 서울의 자선 공주일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유명한 진 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야. 너랑은 비교도 안 돼. 그나마 너를 존중해서 은정 씨한테 무릎을 꿇고 사과하라는 거지, 다른 사람이면 어림도 없어.”
  • “그래? 그럼 김 팀장한테 고마워해야겠네. 김 팀장, 절대 후회해서는 안 돼. 알았지?”
  • “내가 후회를 왜 해? 내가 봤을 때 후회해야 할 사람은 너야. 바로 너!”
  • 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뛰쳐나왔고 그를 향해 호되게 뺨을 날렸다.
  • 순식간에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고 입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이빨도 두 개나 나갔다.
  • 고은정은 그 틈을 타 김혁규의 품을 벗어났다.
  • 위급한 상황만 아니었으면 그녀가 무턱대고 이런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할 리 없었다.
  • “누구야? 누가 감히 나를 때려?”
  • 김혁규는 부은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욕설을 퍼부으면서 고개를 들었고 배혁의 얼굴과 마주쳤다.
  • “배… 배혁 실장님?”
  • 배혁은 요 며칠 본사에서 파견 나왔고 자선 단체에 관한 업무를 직접 맡아 진행하고 있었다.
  • 고은정이 제명된 것도 모두 그가 회장님을 대신해 결정했다.
  • 김혁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배 실장님께서 오늘 나오신단 말 없으셨잖아요? 근데 왜 멀쩡한 사람을 때리고 그러세요?”
  • 배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 “여기는 자선 단체야. 후보들이 난동을 부리길래 때렸는데, 왜, 뭐가 잘못됐나?”
  • 옆에 서있던 고은정은 배혁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왠지 낯이 익었다.
  •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 그는 바로 전에 묘원에서 미스터리한 여자랑 같이 있던 그 남자였다. 이런 우연도 다 있단 말인가?
  • 그녀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그러나 김혁규는 위험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손을 내밀어 고수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 “배 실장님, 제대로 조사해 주세요. 저 여자가 자선 공주인 은정 씨한테 폭행을 가하고 난동을 부리고 있었어요. 때마침 제가 목격했고 은정 씨를 보호해 주고 있었어요. 이게 전부 저 여자 때문이에요.”
  • 배혁은 김혁규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 고수연을 보더니 시선은 다시 김혁규를 향했다.
  • “김혁규, 네가 감히 회장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죽고 싶어?”
  • 회장님이라는 말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긴장했다.
  • “네? 회장님? 배 실장님, 지금 저랑 농담하시는 거죠? 저 여자가 회장님이라니 말도 안 돼.”
  • 김혁규는 말하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 배혁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 “김 팀장,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 그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더니 고수연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 “회장님,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 그 말을 듣고 김혁규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 고은정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꼬집어 보았더니 아팠다.
  • 이건 꿈이 아니다.
  • 고은정은 이 여자가 자선 단체의 회장이고 자신이 100억을 투자하면서 만나려고 했던 사람일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
  •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일 수가 있지?
  • 그녀가 어제 영감탱이 기일에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만나자마자 사고까지 쳤다.
  • 고수연은 고은정의 창백해진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 “두 사람 모두 나한테 불만이 있는 것 같으니 회의실로 모시도록 해.”
  • 그녀는 말을 마치고 회의실로 돌아섰다.
  • 우아한 뒷모습과 차가운 얼굴의 위압감은 분위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 모두를 굴복시키는 카리스마를 가진 여왕이었다.
  • 고은정은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큰 소리를 치더니 한순간에 굽신거리는 신세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이런 모욕감은 처음이었다.
  • 하지만 귀한 훈장과 자신의 명성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었다.
  • 그녀는 서울에서 제일 유명했다.
  • 여기는 서울이다.
  • 그녀는 고은정이고 서울에서 무서울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