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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녀가 회장이다

  • 회의실 안.
  • 고수연은 회장 자리에 앉아 얼굴의 반을 가린 선글라스를 벗었다. 백옥같이 하얀 손가락을 살짝 들었다 놓기만 했을 뿐인데 무심코 하는 동작이 모두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는 충분했다.
  • 김혁규는 고은정을 챙겨줄 겨를이 없이 고수연에게 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딱 죽고 싶은 심정이다.
  •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 회장님도 몰라뵀어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 자선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글로벌 자선 단체의 회장님은 신 같은 존재라는 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와 같이 일개 직원들은 회장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 듣는 소문에 의하면 회장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예측이 불가능하고 인맥 또한 넓다고 했다. 세계 각국의 권력자들이 뒤에서 지지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거대한 자선 시스템을 장악할 수 있었다.
  • 하지만 회장이 이렇게 젊고 예쁜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고수연은 다리를 꼬고 앉아 그를 내려다보며 떠보았다.
  • “김 팀장 지금 뭐 하는 거야? 방금 전까지 큰소리치며 나더러 은정 씨한테 무릎을 꿇고 사과하라 더니 왜 갑자기 자기가 무릎을 꿇어?”
  • 김혁규는 스스로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은정 씨의 일로 회장님한테 무례하게 구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 “은정 씨? 그 서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자선 공주 말인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런 분이랑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어.”
  • 듣고 있던 김혁규는 겁에 질렸다. 그는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다만 버려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회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은정 씨는 이미 자선 공주가 아닙니다. 제가 그녀를 도와주는 게 아닌데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일개 팀장일 뿐입니다. 그녀가 한 자선사업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어도 고은정 씨에게는 고 씨 가문과 진 씨 가문이 있으니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 고은정은 거지 같은 인간이 그녀를 모함할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화가 치밀었다.
  • “김혁규, 너 지금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 김혁규는 차마 고은정을 쳐다보지 못했다.
  • “제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니잖아요. 고은정 씨, 더 이상 저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당신이 한 그 추잡한 짓들을 회장님이 모르실 것 같아요? 그리고 고 씨 가문에서 도와준 것도… 이미 저희 자선 단체에서 조사가 다 끝났어요. 더 이상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 “김혁규, 한 번만 더 지껄이면 그 입 찢어버릴 거야.”
  • 김혁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두 사람 중 그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서는 안 됐다.
  • 고은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자신이 했던 모든 일들이 전부 밝혀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 만약 이 증거들이 공개되면 그녀가 지금껏 쌓아 올린 것들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이다.
  • 만약 진태훈에게 그녀가 하던 자선 사업이 가짜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동안 쌓아온 좋은 감정들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 그녀는 여기까지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 다행히 옆에 있던 고현수가 그녀를 부축했다.
  • “아가씨, 집이나 진 대표님에게 연락해 볼까요?”
  • 고현수는 고은정이 걱정돼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 “아니야. 이 일은 태훈 씨가 알면 안 돼. 그 입 조심하란 말이야. 알겠어?”
  • 고현수는 그래도 그녀가 걱정되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아가씨한테 불리한 상황이에요.”
  • “내가 혼자 해결할 수 있어. 밖에서 기다려.”
  • “아가씨…”
  • “얼른 나가.”
  • 고현수는 어쩔 수 없이 회의실을 나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고은정은 입술을 꽉 깨물고 김혁규를 노려보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 “김 팀장,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내가 당신들 회장님이랑 할 얘기가 있어.”
  • 김혁규는 이번에 제대로 고은정의 눈밖에 났음을 직감했다. 그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수연을 바라봤다.
  • “회장님…”
  • 고은정을 건드리면 진 씨 가문과 고 씨 가문에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 하지만 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 고수연은 손을 내저으며 배혁더러 그를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 김혁규는 질질 끌려나갔다.
  • 넓은 회의실에 고수연과 고은정 두 사람만 남았다.
  • 고은정은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 “말해 봐. 얼마면 되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글로벌 자선 대사의 훈장을 가질 수 있어?”
  • “고은정 씨, 지금 나보고 뇌물을 받으라고?”
  • “여기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어. 자선 협회 회장님도 밥은 먹을 거 아니야. 돈과 원수를 질 필요는 없지. 안 그래?”
  • “그럼 고은정 씨는 자선 대사의 훈장이 얼마라고 생각해?”
  • “20억, 나는 명실상부한 사람이야. 아마 서울에서 이 단어에 걸맞은 사람은 찾기 힘들걸. 회장님은 20억을 챙기고 나는 명성을 얻고 우리 모두 윈윈인데 어때?”
  • 현재 페이스북의 부정적인 뉴스는 거의 사그라졌고 자선 파티의 주인공은 그녀였다. 이건 단지 모두 정상대로 돌아왔을 뿐이다.
  • 게다가 그녀는 곧 진 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었다.
  • 고수연은 믿지 않았고 진 씨 가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 고수연은 그녀의 말을 듣고 비웃었다. 고은정은 아주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 “이 명예는 고은정 씨가 진 씨 가문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은데 너무 적은 거 아닌가?”
  • 고은정은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 “어디 이런 날 강도가 다 있어?”
  • 고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차갑고 어두운 눈망울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고은정은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더니 소름이 끼쳤다.
  • 특히 눈앞에 있는 여자의 눈동자가 고수연과 너무 많이 닮았다. 게다가 묘원에 나타난 것도 수상하고 그녀의 꼬투리를 잡고 자선 단체에서 제명한 것도 그렇고, 일부러 그녀를 망가뜨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 설마 어르신을 위해 복수하려는 건 아니겠지?
  • 고은정은 여기까지 생각하니 순간 긴장됐다.
  • “당신 일부러 그런 거지? 묘원에서부터 왠지 수상하다고 느꼈는데, 도대체 뭔 속셈이야?”
  • “당신 정체가 뭐야? 그 죽일 영감탱이와 고수연과는 무슨 관계야?”
  • 고수연은 불안해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고은정을 보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 “고은정 씨는 본인이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봐? 난 단지 회장의 권력을 행사했을 뿐이야. 왜?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 고은정은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아직 그녀의 밑에 있다 보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 고은정은 이 여자가 어르신의 복수라도 할까 두려워 감히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 일단 그녀는 고수연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 “60억이면 충분하지 않아? 너무 터무니없이 요구하지 마.”
  • “200억을 오늘 중으로 입금해. 이게 힘들면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어.”
  • “당신 강도 야? 이건 강도나 하는 짓이야! 내가 고발할지도 모르는데 안 무서워?”
  • “미안한데 하나도 안 무서워. 얼마든지 고발해. 그때가 되면 고은정의 기부 스캔들은 아마 기정사실이 돼 있겠지.”
  • 고은정은 분노와 굴욕을 꾹 참고 말했다.
  • “그래 알았어. 200억 바로 입금할게.”
  • “고은정 씨 아주 시원시원하네.”
  • “잘난 척하지 마. 내가 이 빚을 반드시 갚게 할 테니까.”
  • 화가 잔뜩 난 고은정은 가방을 들고 회의실을 나가려 했다.
  • 그녀는 진 씨 가문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 인간 정도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었다.
  •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배혁이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