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연은 회장 자리에 앉아 얼굴의 반을 가린 선글라스를 벗었다. 백옥같이 하얀 손가락을 살짝 들었다 놓기만 했을 뿐인데 무심코 하는 동작이 모두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는 충분했다.
김혁규는 고은정을 챙겨줄 겨를이 없이 고수연에게 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딱 죽고 싶은 심정이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 회장님도 몰라뵀어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자선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글로벌 자선 단체의 회장님은 신 같은 존재라는 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와 같이 일개 직원들은 회장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듣는 소문에 의하면 회장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예측이 불가능하고 인맥 또한 넓다고 했다. 세계 각국의 권력자들이 뒤에서 지지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거대한 자선 시스템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장이 이렇게 젊고 예쁜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고수연은 다리를 꼬고 앉아 그를 내려다보며 떠보았다.
“김 팀장 지금 뭐 하는 거야? 방금 전까지 큰소리치며 나더러 은정 씨한테 무릎을 꿇고 사과하라 더니 왜 갑자기 자기가 무릎을 꿇어?”
김혁규는 스스로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은정 씨의 일로 회장님한테 무례하게 구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은정 씨? 그 서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자선 공주 말인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런 분이랑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어.”
듣고 있던 김혁규는 겁에 질렸다. 그는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다만 버려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회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은정 씨는 이미 자선 공주가 아닙니다. 제가 그녀를 도와주는 게 아닌데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일개 팀장일 뿐입니다. 그녀가 한 자선사업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어도 고은정 씨에게는 고 씨 가문과 진 씨 가문이 있으니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고은정은 거지 같은 인간이 그녀를 모함할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화가 치밀었다.
“김혁규, 너 지금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김혁규는 차마 고은정을 쳐다보지 못했다.
“제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니잖아요. 고은정 씨, 더 이상 저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당신이 한 그 추잡한 짓들을 회장님이 모르실 것 같아요? 그리고 고 씨 가문에서 도와준 것도… 이미 저희 자선 단체에서 조사가 다 끝났어요. 더 이상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김혁규, 한 번만 더 지껄이면 그 입 찢어버릴 거야.”
김혁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두 사람 중 그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서는 안 됐다.
고은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자신이 했던 모든 일들이 전부 밝혀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이 증거들이 공개되면 그녀가 지금껏 쌓아 올린 것들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이다.
만약 진태훈에게 그녀가 하던 자선 사업이 가짜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동안 쌓아온 좋은 감정들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여기까지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행히 옆에 있던 고현수가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집이나 진 대표님에게 연락해 볼까요?”
고현수는 고은정이 걱정돼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아니야. 이 일은 태훈 씨가 알면 안 돼. 그 입 조심하란 말이야. 알겠어?”
고현수는 그래도 그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가씨한테 불리한 상황이에요.”
“내가 혼자 해결할 수 있어. 밖에서 기다려.”
“아가씨…”
“얼른 나가.”
고현수는 어쩔 수 없이 회의실을 나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은정은 입술을 꽉 깨물고 김혁규를 노려보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김 팀장,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내가 당신들 회장님이랑 할 얘기가 있어.”
김혁규는 이번에 제대로 고은정의 눈밖에 났음을 직감했다. 그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수연을 바라봤다.
“회장님…”
고은정을 건드리면 진 씨 가문과 고 씨 가문에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고수연은 손을 내저으며 배혁더러 그를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김혁규는 질질 끌려나갔다.
넓은 회의실에 고수연과 고은정 두 사람만 남았다.
고은정은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말해 봐. 얼마면 되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글로벌 자선 대사의 훈장을 가질 수 있어?”
“고은정 씨, 지금 나보고 뇌물을 받으라고?”
“여기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어. 자선 협회 회장님도 밥은 먹을 거 아니야. 돈과 원수를 질 필요는 없지. 안 그래?”
“그럼 고은정 씨는 자선 대사의 훈장이 얼마라고 생각해?”
“20억, 나는 명실상부한 사람이야. 아마 서울에서 이 단어에 걸맞은 사람은 찾기 힘들걸. 회장님은 20억을 챙기고 나는 명성을 얻고 우리 모두 윈윈인데 어때?”
현재 페이스북의 부정적인 뉴스는 거의 사그라졌고 자선 파티의 주인공은 그녀였다. 이건 단지 모두 정상대로 돌아왔을 뿐이다.
게다가 그녀는 곧 진 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었다.
고수연은 믿지 않았고 진 씨 가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수연은 그녀의 말을 듣고 비웃었다. 고은정은 아주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이 명예는 고은정 씨가 진 씨 가문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은데 너무 적은 거 아닌가?”
고은정은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어디 이런 날 강도가 다 있어?”
고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차갑고 어두운 눈망울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고은정은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더니 소름이 끼쳤다.
특히 눈앞에 있는 여자의 눈동자가 고수연과 너무 많이 닮았다. 게다가 묘원에 나타난 것도 수상하고 그녀의 꼬투리를 잡고 자선 단체에서 제명한 것도 그렇고, 일부러 그녀를 망가뜨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설마 어르신을 위해 복수하려는 건 아니겠지?
고은정은 여기까지 생각하니 순간 긴장됐다.
“당신 일부러 그런 거지? 묘원에서부터 왠지 수상하다고 느꼈는데, 도대체 뭔 속셈이야?”
“당신 정체가 뭐야? 그 죽일 영감탱이와 고수연과는 무슨 관계야?”
고수연은 불안해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고은정을 보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고은정 씨는 본인이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봐? 난 단지 회장의 권력을 행사했을 뿐이야. 왜?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고은정은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밑에 있다 보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고은정은 이 여자가 어르신의 복수라도 할까 두려워 감히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일단 그녀는 고수연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60억이면 충분하지 않아? 너무 터무니없이 요구하지 마.”
“200억을 오늘 중으로 입금해. 이게 힘들면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어.”
“당신 강도 야? 이건 강도나 하는 짓이야! 내가 고발할지도 모르는데 안 무서워?”
“미안한데 하나도 안 무서워. 얼마든지 고발해. 그때가 되면 고은정의 기부 스캔들은 아마 기정사실이 돼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