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2화 하산

  • 기대했던 만큼 기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마음이 잔잔하고 고요하기만 할 뿐이었다.
  • 어쩌면 무감각해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 지난 10년간의 인내가 그토록 우습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 저녁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산속의 온도는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진 듯 한기가 감돌았다.
  • 임봉은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노인을 묻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멀리 푸른 산을 우울함에 잠긴 두 눈으로 응시했다.
  • 지금 이 순간의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또 한참이 지났다…
  • “당신이 이번엔 정말로 죽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의 육신은 서서히 사라져 영원으로 남겠죠. 마치 사막의 모래알처럼 말입니다.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영생인지도 모르겠군요. 이 이별로, 영원히 다시 볼 일 없을 겁니다!”
  • 임봉은 끝내는 사부님이라는 그 한마디를 내뱉지 못했다. 그보다는, 이제 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 그는 긴 검을 꺼내 들더니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로 사라졌다. 만약 현재 이곳에 도를 닦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깜짝 놀랐을 것이다.
  • 지금과 같은 말법 시대에 검을 타고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 ……
  • 반 시간 뒤, 임봉은 마침내 기억 속의 고향에 도착했다.
  • 그의 고향 집은 전북 전주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집은 그래봤자 단순하고 소박한 작은 단층집이었다.
  • 집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 옆에는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모든 게… 모든 게 다 그대로네!”
  • 눈앞의 익숙한 풍경에 임봉의 깊은 두 눈이 마침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무리 현재 마음가짐이 강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가슴 한편이 저릿해지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산속에 있는 동안 그는 지금 이 장면을 꿈속에서 수도 없이 보았었다. 연못에서 수영하던 어린 시절의 꿈도 꾸었고, 속세의 모습도 꿈속에서 보았으며, 젊은 시절의 꿈도 꾸었었다. 그리고 그의 꿈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 “지난 10년 동안 종적을 감추고 있었으니, 부모님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셨겠지? 그리고 여동생도. 내가 떠날 때 그 아이는 겨우 아홉 살이었는데, 지금은 대학에 갔을까? 그 영감은 도를 닦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모든 속세의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했었지. 하지만 이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면, 도를 닦는 목적은 또 뭐지?”
  • 임봉은 깊은숨을 내쉬며 어질러진 마음을 진정시켰다.
  • 그 오랜 시간 동안 그가 기다려온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 하지만 바로 그때, 갑자기 집 안에서 공포에 질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잘못했어요! 철거 보상금 필요 없어요!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흑흑흑, 안 돼요… 싫어요…”
  • 짝-!
  • “얌전히 있어!”
  • ……
  • 그 공포에 질린 목소리를 들은 임봉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다.
  • ‘유연이 목소리인가? 내 동생이 누군가에게 폭행당하고 있는 거야?’
  • “빌어먹을!!!”
  • 임봉의 표정이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더니 그는 거의 순간 이동을 하듯 집 대문을 향해 돌진했다.
  • ……
  • 같은 시각, 집 안에서는 용 문신을 한 대머리의 남자 두 명이 한 소녀를 둘러싼 채 소름 끼치게 웃고 있었다.
  • “훌륭하네!”
  • “대박이야. 이 알박이 집주인이 이렇게 예쁠 줄이야. 우리 둘한테는 좋은 일이지 뭐!”
  • “흑흑, 이거 놔요!!”
  • 임유연은 간절히 애원했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남자들에게 맞아 뺨이 빨갛게 부어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도 자신의 옷을 찢으려 드는 두 덩치 큰 남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 “저항하지 마! 우리가 다 즐기고 나면 보내줄 테니!”
  • “걱정 마. 우리가 잘 다뤄줄게. 낄낄…”
  • 두 대머리의 남자는 임유연을 눌러 내리며 연신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 이에 임유연의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오늘 밤 이 남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온몸이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 그녀는 지난 몇 년간 자신이 겪은 일들을 떠올렸다. 돈이 아까워 옷도 못 사 입었고,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다. 하다못해 밥 한 끼 먹는 것에도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 애를 썼었다.
  • 설날에도 다른 사람들은 가족끼리 모여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먹고 있을 때, 그녀는 홀로 집 침대에 웅크린 채 이 추운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그러다 겨우 동네가 재개발을 하게 되었는데, 철거 회사는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철거 보상금을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했고, 이에 그녀가 동의하지 않자, 이 두 사람이 찾아와 그녀를 폭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 그녀는 정말이지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