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넌 갓 대학교에 들어간 학생인데 결혼도 하지 않고 덜컥 임신부터 해? 네가 이 아비를 제대로 망신시킬 속셈인가 보구나!”
의사는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다급히 제지했다.
“연 대표님, 따님을 이렇게 때리시면 안 됩니다. 따님은 원체 몸이 허약한데 이렇게 폭행하시면 큰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한심한 것 같으니라고. 그 주제에 뭔 일이 벌어지겠어? 배 속의 더러운 종자를 당장 지워버려!”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연 대표님, 따님분은 태생적으로 난임입니다. 만약 이번에 아이를 지우면 앞으로 다시는 임신을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병상 위, 초점이 없던 영연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한들 이 더러운 종자를 가만히 남겨둘 수는 없어! 당장 이 아이를 지워버려, 이 년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는 지워야 해!”
연지강은 두 눈이 벌게져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미쳐 날뛰는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연영은 눈빛이 점점 흐려졌고 이내 공허함만 가득 찼다.
그녀는 뭘 기대했던 걸까?
그녀의 아버지는 비서와 바람나고, 외부인과 힘을 합쳐 그녀의 어머니를 괴롭히다가 끝내 조강지처를 버리고 내연녀를 집안에 들였다. 게다가 본처가 다 죽어가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도움의 손길조차 내밀지 않은 인간인데, 이런 인간이 무슨 짓인들 못 하랴?
그녀가 딸이라고는 하지만, 아마 연지강은 눈엣가시로 여길 것이다.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가 얼마나 더럽고 비열한 수단으로 여자를 등에 업고 상위에 올랐는지, 그리고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처자식을 집 밖으로 쫓아낸 것에 관한 기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연영은 얌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알았어요, 아빠. 아이 지울게요.”
곁에서 지켜보던 로이는 그제야 앞으로 나서서 가식적으로 말했다.
“연영이가 잘못을 뉘우치잖아. 지강 씨도 화 풀어.”
그녀는 연영이를 걱정하는 척 손을 뻗어 잔뜩 부어오른 연영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것 좀 봐, 어떻게 이토록 매정할 수 있어? 영아, 무서워하지 마. 비록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아줌마는 네 곁에 있잖아. 말 들어, 일단 아이는 지우고 이 일은 그냥 없던 일로 하자. 앞으로 아줌마가 너를 친딸처럼 여기며 예뻐해 줄게.”
로이의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촉감이 아주 부드러웠지만, 연영은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써서야 겨우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한테 로이의 혀 놀림은 그저 독사가 내뱉는 독일 뿐이었다.
연영은 고개를 들고 아주 든든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아줌마.”
“너도 참, 우린 가족인데 고맙긴 뭘.”
로이는 겉으로 웃고 있지만,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멍청해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굳이 손을 쓸 필요는 없으니까.
연영은 쭈뼛쭈뼛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줌마,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로이는 그녀가 잔뜩 겁먹은 모습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다녀오라고 했다.
연영은 천천히 병실을 벗어나 뒤돌아서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로이는 연영의 뒤를 밟아 그녀가 확실히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병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십여 분이 흐른 뒤에도 연영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로이는 그제야 불현듯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지강 씨, 연영이 혹시 도망간 거 아니야?”
연지강은 순식간에 낯빛이 변하더니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로이는 화장실 안을 꼼꼼히 수색했지만, 연영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행 두 사람은 다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멀리서 옷차림이 익숙한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발견했다.
“연영, 거기 서지 못해!”
그 여자는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고함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