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8화 조금도 물러섬이 없다

  • 깊은 밤, 연영은 대본을 덮고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 그녀는 머리맡의 가죽 지갑을 꺼내서 열었다. 틈새에 반짝거리는 단추가 눈에 들어왔다.
  • 5년 전, 그 혼란스러운 밤, 그녀의 일생에 가장 소중한 두 아이가 태어났고 더불어 이 단추도 그녀에게 남겨졌다.
  • 단추의 색은 블랙이고 세련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알파벳 N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 연영은 손의 단추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 그녀 자신도 왜 이 단추를 남겨 놓았는지 모른다.
  • 5년 전 그날 밤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 연영은 그 남자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끔 아이가 물으면 그저 아버지가 길을 잃었다고 둘러 대였다.
  • 한참 후, 연영은 정신을 차린 뒤 다시 그 단추를 지갑 안에 넣어 놓았다.
  • 내일이면 오디션을 보게 된다. 그럼 로빈도 그 자리에 나오게 된다. 그녀는 그날 밤의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 다음 날, 환성 임페리얼 호텔, 《우레 2》 출연진 오디션 현장이다.
  • 로빈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매니저와 비서 사이에 둘러싸인 채 오디션 현장에 나타났다.
  • 일찌감치 기다리던 기자들이 술렁거리더니 재빨리 모여들었다.
  • “로빈 씨, ‘우레’라는 작품 덕에 잘 나갔는데 5년 후에 다시 ‘우레 2’를 찍은 소감이 어떻습니까?”
  • “로빈 씨, ‘우레’가 개봉된 후 관객들이 로빈 씨의 연기에 대해 엇갈린 반응을 보였는데 이번엔 ‘우레 2’를 잘 찍을 자신이 있나요?”
  • 로빈은 어제 일로 밤새 잠을 설쳤다.
  • 기자들의 질문은 듣기에는 완곡해 보이나 그녀의 연기에 대해 비꼬는 흔적이 역력한 질문들이었다. 그녀는 이내 얼굴이 어두워졌다.
  • “다들 입 닥쳐! 할 수 있으면 너희가 와서 해봐!”
  • 왕소윤은 그녀의 반응에 깜짝 놀라 재빨리 손을 흔들어 호텔 경비원에게 로빈을 경호해 들어가라고 했다.
  •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기자들에게 미움을 사지 말라고, 미움을.”
  • 로빈은 비웃으며 말했다.
  • “난 오랫동안 그들을 참아왔어. 가진 것도 없는 기자 나부랭이가 감히 나를 도발해? 그들이 받는 한 달 치 월급이 내 립스틱값도 안 될 거야….”
  • 그녀가 괴팍한 기색을 하고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 “여기서 기다려, 따라오지 말고 그 누구도 나에게 다가오게 하지 마.”
  • 로빈은 왕소윤의 반응은 상관하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연영에게로 다가갔다.
  • 발소리를 들은 연영이 고개를 돌리자 앞에 험악한 얼굴을 한 로빈이 보였다.
  • 이곳은 한적한 구석이었다. 로빈은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을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 “너도 오는데 나라고 못 온다는 법이 있어?”
  • “이젠 숨기지 않는 거야? 어제까지도 네 이름이 장미라고 하지 않았니? 너 도대체 뭐하러 온 거야?”
  • 로빈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이 여우 같은 년이 도무지 그녀의 주위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 “물론 오디션 보러 왔지. 로 스타님, 잘 부탁드려요.”
  • 연영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 “너 ‘우레 2’ 에 들어올 생각 하지도 마, 지금 당장 나가, 나가라고!”
  • 연영은 왜 로빈이 그녀를 보면 이토록 긴장하는지 몰랐다. 설사 그녀가 오디션에 붙어 촬영팀에 들어간다 해도 로빈의 자리를 넘볼 수는 없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넌 감독이 아니니 네 말은 아무런 쓸데가 없어. 네가 하지 말라고 하면 난 더할 거야.”
  • 로빈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 5년 동안 안 봤더니 연영 이 계집년이 갈수록 사람을 약 올리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로빈이 조금이라도 위협하면 그녀는 그저 꾹 참고 있었다.
  • 로빈이 입을 열려고 할 때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 전화기 너머로 왕소윤은 투자자 측 대표가 곧 올 것이라며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 로빈은 살짝 긴장되었다. 이번엔 공교롭게도 남진이가 왔다.
  • 로빈은 연영을 남진 앞에 나타나게 할 수 없었다.
  • 만약 그들이 서로 얽혀 다시 남진을 닮은 아이가 나타난다면 이는 일이 크게 번질 게 뻔하다.
  • 로빈은 휴대폰을 들고 이미 떠난 연영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음흉한 웃음을 내보였다.
  • 연영이 걸어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 “안녕하세요, 오디션 보러 오신 거 맞죠?”
  • 연영은 마음속으로 경각심을 품고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목에 걸고 있는 신분증을 바라보았다. 틀림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 “저를 따라오세요.”
  • 걸어갈수록 주변 환경도 점점 고요해졌다.
  • 연영이 물어보려 하자 눈앞의 남자가 갑자기 몸을 돌려 젖은 수건으로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