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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는 질투를 안 해

  • 채원은 여전히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
  • 고은은 상대가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나서야 무슨 의도인지 알아챘다. 그녀는 조금 어색해 하면서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라 했다. 이런 헌팅은 그녀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런 장소라면 더욱더.
  • 오상은 한참 전부터 옆에서 고은을 보며 헤벌쭉 웃고 있었다. 고은은 말을 얼버무리고는 시선을 앞쪽에 옮기자 몇 발자국 뒤에 서있는 채원을 보았다. 채원은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이었다. 아마 오랫동안 서 있었을 거라고 고은은 생각했다.
  • 채원의 얼굴에서 고은은 일말의 질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채원은 자신이 다른 남자한테 헌팅을 당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이 된 고은은 어차피 앞으로 쓸 번호도 아니기 때문에 줘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하고 번호를 알려줬다.
  • 남자는 고은에게 전화를 걸며 말했다.
  • “제 번호에요. 성은 진이고요.”
  • 고은은 머리를 끄덕이며 예의상 웃으며 대답했다.
  • “네, 저장할게요.”
  • 남자는 고은의 번호를 알아내자 고은과 몇 마디를 나누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뒷자리였다.
  • 채원은 그제야 천천히 걸어왔다. 고은은 머리를 숙이고 폰만 볼 뿐 채원한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채원도 묻지 않고 계속하여 노트북으로 문서를 검토했다.
  • 아까 남자는 자리에 돌아가자마자 고은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번에 S 시티로 가서 얼마 동안 있을 건지, 앞으로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날 건지 고은한테 말했으나 그녀는 흥미가 당기지 않았지만 예의상 열심히 메시지를 읽는 척하였다.
  • 남자는 고은의 스케줄을 물었고 고은은 계획 없이 온 여행이라 만약 좋으면 오랫동안 머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금방 떠날 거라고 대답했다.
  • 그 남자는 S 시티가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고 하면서 고은더러 오래 머무르기를 권유했지만 고은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 한참 뒤 남자는 또 메시지를 보내 고은이 어느 호텔에 묵는지 물었다. 고은은 오상이 보내준 메시지를 뒤졌다. 예약한 호텔은 해변가에 있었으며 창밖으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 호텔에 관해서 고은은 그다지 남자에게 정보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 남자가 더 이상 질척대는 걸 방지하기 위서 고은은 친구가 S 시티에 있기 때문에 이따가 데리러 온다고 답했다. 문자를 보내고 고은은 폰을 내려놓았다.
  • 곁눈질로 채원을 힐끔 바라보았지만 채원은 요지부동이었다. 고은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고은은 갑자기 모든 게 재미 없어졌다.
  • 두 사람이 결혼했을 당시 고은이 만약 밖에서 헌팅을 당했어도 아무 반응 없던 채원이라 지금 반응도 정상적인 것이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은은 마음이 괴로워졌다.
  • 함께한 지난 1년간 고은은 노력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채원이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었을 뿐. 그는 빈틈이 없었다. 채원의 몸에서 일말의 희망이라도 보았다면 애초에 이혼을 꺼냈을 때 고은은 시간을 끌 수도 있었을 것이다.
  • 고은은 머리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고은과 채원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 비행기가 착륙하고 승객들이 하나둘씩 내릴 때 고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급할 것도 없을뿐더러 붐비는 사람들 속에 섞여 내려가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헌팅을 해왔던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노트북 가방을 들고는 옆에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 “이따가 시간 나면 연락할게요. 가까운 데 있으면 밥 한번 대접해 드리죠.”
  • 고은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 “그래요.”
  • 채원은 옆에서 무심하게 웃었다. 그는 일어나서 오상에게 말했다.
  • “가자.”
  • 오상은 고은을 안타까운 듯이 한번 보고는 짐을 들고 채원에게 길을 내어줬다. 고은은 채원 일행이 다 가고 나서야 짐을 들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 공항 밖으로 나오자 호텔의 공항 픽업 서비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차에 오르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 채원과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못하고 이런 상황까지 마주치다니, 그들 사이엔 좋은 시작도 없었고 원만한 과정도 없었으며 결말은 더욱 비참했다.
  • 고은은 모든 게 다 엉망이더라도 이별할 때만큼은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 사람을 떠올렸을 때 전부가 다 유감으로 남지 않도록. 하지만 지금, 그것마저 엉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