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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여인의 목소리

  • 고은이 이튿날 일어났을 때 채원은 이미 가고 없었다. 침대에 앉아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 멍했다. 어떤 일은 기억이 나지만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 전 남편과 몸을 섞었던 건 기억한다. 너무 자극적인 것 아닌가. 이혼을 하자마자 또 붙어먹다니. 이건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이다.
  • 고은은 어제 지식인에 검색했던 것을 생각했다. 어떻게 이혼이 가져다준 상처를 극복하는가. 술에 취해 헌팅, 다 했네.
  • 고은은 이불을 걷어내고 자신을 보았다. 여전히 어젯밤 격렬했던 채원을 기억한다. 합법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자 너무 자극적이었다.
  • 고은은 쑤시는 몸을 끌고 샤워를 했다. 욕실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침대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 고은은 인차 전화를 받았다. 오상이었다.
  • 오상은 고은의 티켓을 예약했다. S 시티였다. 고은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좋아요, 언제 가는데요?”
  • 오상은 답했다.
  • “내일 아침.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잖아요? 어때요?”
  • 고은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좋아요. 시간대가 좋네요. 출국 시간 나한테 보내줘요. 내일 직접 갈 테니까.”
  • 오상은 데려다준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전화를 끊고 출국 시간을 고은에게 보내줬다.
  • 고은은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며 메시지를 보았다. 받은 메시지를 다 보고는 수건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떠나면 얼마나 밖에 있을지, 돌아왔을 땐 아마 채원을 내려놓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고은은 짐을 다 싸고 나가서 밥을 먹었다. 꽃을 사서 채 씨 어르신을 뵈러 갔다. 채 씨 어르신의 무덤은 기개가 넘쳤다. 채 씨 집안사람들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 고은은 꽃을 묘비 앞에 두고는 입을 열었다.
  • “할아버지, 저 왔어요. 저와 채원 씨 이혼했어요.”
  • 고은은 또 말했다.
  • “그를 탓하지 마세요. 아마 끝까지 절 좋아할 수 없었나 봐요. 평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랑 사는 거 고통이잖아요. 나한테도 못 할 짓이고요. 지금이 좋아요. 위자료도 많이 줬거든요. 앞으로 잘 살수 있어요.”
  • 묘비 위의 채 씨 어르신은 엄숙해 보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 어르신은 채 씨 집안사람 중 고은에게 가장 다정했던 사람이었다. 고은은 눈시울을 붉혔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우는 것을 어르신이 보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생각했다.
  • 고은은 이제 가겠다고 말하며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올 때 특산품을 사가지고 오겠노라고 이것저것 이야기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 집으로 돌아와 짐을 쌌지만 별로 정리할만한 짐도 없었다. 길을 나설 때 짐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결국엔 작은 캐리어도 다 채우지 못했다.
  • 고은은 침대에 앉아 생각 끝에 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 전화를 하자마자 받은 채원의 목소리는 너무 사무적이었다.
  • “여보세요?”
  • 고은은 어젯밤 일을 꺼낼 생각이었지만 채원의 사무적인 목소리를 듣고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 잠시 멈칫하고는 입을 열었다.
  • “별거 아냐. 나 내일 떠난다고 말해주려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작별 인사라도 하려는 거야.”
  • 채원의 반응은 냉담했다.
  • “그래.”
  • 고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운했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전화기 너머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채원 씨?”
  • 고은은 놀라서 전화를 꺼버렸다. 폰을 쥐고 숨을 돌리고 나니 비참함을 느꼈다.
  • 여자가 옆에 있을 뿐인데 뭐가 찔린다고 전화를 끊었을까. 뭐가 두려워서. 고은은 화가 나 침대를 퍽 퍽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