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이 이튿날 일어났을 때 채원은 이미 가고 없었다. 침대에 앉아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 멍했다. 어떤 일은 기억이 나지만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 전 남편과 몸을 섞었던 건 기억한다. 너무 자극적인 것 아닌가. 이혼을 하자마자 또 붙어먹다니. 이건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이다.
고은은 어제 지식인에 검색했던 것을 생각했다. 어떻게 이혼이 가져다준 상처를 극복하는가. 술에 취해 헌팅, 다 했네.
고은은 이불을 걷어내고 자신을 보았다. 여전히 어젯밤 격렬했던 채원을 기억한다. 합법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자 너무 자극적이었다.
고은은 쑤시는 몸을 끌고 샤워를 했다. 욕실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침대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 고은은 인차 전화를 받았다. 오상이었다.
오상은 고은의 티켓을 예약했다. S 시티였다. 고은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좋아요, 언제 가는데요?”
오상은 답했다.
“내일 아침.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잖아요? 어때요?”
고은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요. 시간대가 좋네요. 출국 시간 나한테 보내줘요. 내일 직접 갈 테니까.”
오상은 데려다준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전화를 끊고 출국 시간을 고은에게 보내줬다.
고은은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며 메시지를 보았다. 받은 메시지를 다 보고는 수건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떠나면 얼마나 밖에 있을지, 돌아왔을 땐 아마 채원을 내려놓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고은은 짐을 다 싸고 나가서 밥을 먹었다. 꽃을 사서 채 씨 어르신을 뵈러 갔다. 채 씨 어르신의 무덤은 기개가 넘쳤다. 채 씨 집안사람들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고은은 꽃을 묘비 앞에 두고는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저와 채원 씨 이혼했어요.”
고은은 또 말했다.
“그를 탓하지 마세요. 아마 끝까지 절 좋아할 수 없었나 봐요. 평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랑 사는 거 고통이잖아요. 나한테도 못 할 짓이고요. 지금이 좋아요. 위자료도 많이 줬거든요. 앞으로 잘 살수 있어요.”
묘비 위의 채 씨 어르신은 엄숙해 보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어르신은 채 씨 집안사람 중 고은에게 가장 다정했던 사람이었다. 고은은 눈시울을 붉혔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우는 것을 어르신이 보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생각했다.
고은은 이제 가겠다고 말하며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올 때 특산품을 사가지고 오겠노라고 이것저것 이야기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쌌지만 별로 정리할만한 짐도 없었다. 길을 나설 때 짐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결국엔 작은 캐리어도 다 채우지 못했다.
고은은 침대에 앉아 생각 끝에 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전화를 하자마자 받은 채원의 목소리는 너무 사무적이었다.
“여보세요?”
고은은 어젯밤 일을 꺼낼 생각이었지만 채원의 사무적인 목소리를 듣고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 잠시 멈칫하고는 입을 열었다.
“별거 아냐. 나 내일 떠난다고 말해주려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작별 인사라도 하려는 거야.”
채원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래.”
고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운했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전화기 너머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원 씨?”
고은은 놀라서 전화를 꺼버렸다. 폰을 쥐고 숨을 돌리고 나니 비참함을 느꼈다.
여자가 옆에 있을 뿐인데 뭐가 찔린다고 전화를 끊었을까. 뭐가 두려워서. 고은은 화가 나 침대를 퍽 퍽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