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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여기가 어디라고 와

  • 사실 오늘 채원은 기분이 나지 않았고 침착할 수가 없었다. 고은과 점심을 먹은 뒤로 이런 느낌은 지속되었다. 온 오후 회사에 있었지만 서류도 몇 개 보지 못했다. 심지어 가끔 할아버지가 임종에 남기신 유언이 떠올랐다.
  • 할아버지는 채원에게 고은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 당시 채원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금은 역시나 이혼을 한 상태다. 채원은 한숨을 내쉬면서 생각했다. 이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 애초에 결혼을 할 당시에 그는 이미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 고은과의 결혼은 결코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할아버지한테 미안할 뿐.
  • 채원은 술을 몇 잔 마시고는 더욱더 심란해짐을 느꼈다. 가슴 한편에 원인 모를 불편함이 자리했다.
  • 머리가 조금 복잡함을 느끼면서 순간 고은이 생각났다. 이혼하는 순간도 아니고 함께한 수많은 밤들에 자신의 아래에 깔려있는 고은이었다.
  • 채원은 얼른 눈을 감았다.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그는 어떻게 된 건지 짐작이 갔다.
  • 왕 사장도 약효가 올라왔고 옆에 있는 아가씨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 “우리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까요.”
  • 채원은 천천히 눈을 뜨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 “그러죠.”
  • 채원은 자신의 몸이 점점 이상해짐을 느꼈지만 체면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척할 수밖에 없었다. 룸에서 나서자 밖은 시원했고 채원은 조금 편안해졌다. 룸에서 나오면서 기사한테 빨리 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 왕 사장은 앞장서 걸으며 아가씨의 허리를 감았다. 너무나 신이 났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말이다.
  • 비즈니스 구역을 지나 무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오늘 밤의 하이라이트 부분이었다. 프로 댄서들이 춤을 추면서 옷을 벗었다. 관객들은 환호를 질렀다. 왕 사장은 그 모습을 보고는 흥분하면서 말했다.
  • “의왼데, 이 정도의 퍼포먼스라니.”
  • 채원은 왕 사장의 시선을 따라 무대를 보았다. 다만 그의 시선은 무대 뒤 남자와 웃고 떠들고 있는 고은에게 향했다. 채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몇 초 동안 쳐다보고 나서야 고은인 줄 알았다.
  • 고은의 차림새는 예전과 너무 달랐다.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채원은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고은을 쳐다보았다. 고은은 채원을 발견하지 못했고 조금 많이 마신 듯 보였다. 하지만 인사불성인 상태는 아니었다.
  •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고은의 몽롱한 눈빛을 보고는 일어나서 고은의 옆자리로 옮겨 앉으며 물었다.
  • “취했어?”
  • 고은은 웃으며 답했다.
  • “아니.”
  • 어떤 일이 생각나는 걸로 봐서는 취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 남자는 손을 고은의 다리에 올리며 물었다.
  • “내가 좋은데 데려가 줄까? 술도 깰 겸.”
  • 고은은 머리를 숙여 상대방의 손을 보고는 머리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끝끝내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 “됐어.”
  • 이 사람은 어떻게 봐도 채원보다 못했다. 채원을 만난 이후로 고은은 다른 남자가 눈에 찰 지 의문이 들었다. 남자는 고은의 말을 이해 못한 채 손을 올려 고은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 “가자, 내가 좋은데 데려다줄게. 기분 좋게 해줄게.”
  • 다만 그의 손이 고은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잡혔을 뿐. 고은은 채원의 목소리를 들었다.
  • “여기가 어디라고 와.”
  • 고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이 몽롱하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앞에 있는 사람이 채원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데는 영향이 없었다. 차갑고 조소의 느낌마저 드는 얼굴을 하고 있는 채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