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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누구도 가치 없어

  • 채원은 말을 끝내고 고은을 한번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 고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속으로 채원이 너무 쪼잔하다고 생각했다. 조금도 지려고 하지 않다니.
  • 고은은 집으로 돌아갔다. 채원이 고은에게 남겨준 집이었다. 요즘 줄곧 여기에서 지냈다. 고품격의 인테리어지만 많이 허전했다. 고은은 포장해온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침실로 갔다. 침대에 누워 이혼 증명서를 꺼내들었다.
  • 결혼 증명서의 사진 속 두 사람은 아무도 웃고 있지 않았다. 짜증이 섞인 표정이었다. 오늘 이혼 증명서 위의 그녀 혼자 찍은 사진엔 누구보다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녀가 결혼할 때 얼마나 기뻤고 오늘 이혼할 때는 또 얼마나 아쉬웠는지.
  • 고은은 이혼 증명서를 얼굴에 덮었다. 빨개지는 눈시울을 증명서 아래에 감추고. 이렇게 하면 자신조차 속일 수 있다는 듯이.
  • 고은은 오후까지 누워있다가 일어났다. 핸드폰으로 오상에게 문자를 보냈다. 바쁘냐고 물은 문자에 오상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 전화를 받자마자 오상은 물었다.
  • “진짜 이혼했어요?”
  • 고은은 머리를 돌려 손에 들린 이혼 증명서를 보면서 대답했다.
  • “네. 이혼했어요. 증명서가 아직 따끈따끈한걸요. 찍어서 보여드릴까요?”
  • “됐네요.”
  • 오상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 “둘 사이에 별다른 문제도 없는데 왜 이혼한 거예요?”
  • 고은은 웃었다.
  • “내가 하자고 한 게 아니에요. 당신 사장한테 물어보세요.”
  • “제가 그럴 담이 어디 있어요”
  • 오상은 재빨리 대답했다.
  • 채원은 평소에 잘 웃지도 않았다. 비록 둘이 알고 지낸 시간은 수년이지만 오상은 아직도 채원이 조금 무서웠다.
  • 고은은 사모님으로서 채원과 동등한 지위지만 오상은 가끔 고은과 잡담하면서 장난도 치곤했다. 그는 고은을 어려워하지도 않을뿐더러 은근 먹이는 말도 하고는 했다.
  • 고은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 “용건이 있어요. 당신 사장이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당신을 찾으라고 했거든요.”
  • 이 문제는 오상의 전문이다.
  • “그래요, 뭐든 괜찮으니 말해봐요.”
  • 고은은 답했다.
  • “나가서 돌아보고 싶어요. 혹시 갈만한 곳 좀 찾아봐 줄래요? 티켓과 호텔도 예약해 주시고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네요. 기간은 얼마든지 괜찮아요. 지금 나한테 시간과 돈이 넘치니까. 당신 사장이 나랑 이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자료를 줬는지 아마 모를걸요?”
  • 오상은 잠시 멈췄다가 물었다.
  • “어디든 괜찮은 건가요?”
  • “당연히 물 좋고 미남들이 많은 곳이면 좋겠죠. 설마 날 아무도 없는 야산에서 숙박하라고는 하지 않겠죠?”
  • 고은은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오상은 웃으며 답했다.
  • “알겠어요. 그럼 잘 찾아보고 예약해 둘게요.”
  • 고은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용건을 끝내고 통화를 종료했다. 잠시 침대에 멍하니 있다가 일어났다.
  • 점심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거실에 서서 남들은 이혼하고 나서 어떻게 마음속의 고민을 해결하는지 생각했다. 반나절이나 생각했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 그녀는 친인척들이 없었으며 지지해 주는 이 하나 없었다. 고은은 조금 의기소침해서 핸드폰으로 지식인에 물었다. 들려오는 대답은 그야말로 가지각색이었다. 그중에서 거나하게 취하는 것이 다른 어떤 황당한 것보다 현실성이 있었다.
  • 비록 채원을 떠나 마음이 조금 괴로웠지만 타락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그럴 가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