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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빌면 구해주겠소

  • 내가 허덕이며 고개를 들어 보니 검은 가운을 입은 고운 남자가 한창 나른하게 가로등에 기대어 빈정대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 늘씬한 몸매, 조각상 같은 얼굴, 매서운 매와 같이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는 남자.
  • 설찬이다.
  • "누구야!"
  • 내 곁의 유도는 당장 나를 볼 겨를도 없이 재빨리 몸을 돌려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그는 설찬을 매우 기탄하는듯 했다.
  •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서워 하는것 같았다.
  • 설찬은 대답 없이 나를 보기만 했다.
  • "안소, 나를 서방님으로 모시겠다 빌면 구해주겠소."
  • 불현듯 그가 입을 열었다.
  • 설찬의 섹시하고 얇은 입술엔 시큰둥한 웃음이 걸렸고 눈빛은 세상 누구보다 더 오만하여 마치 내가 그에게 빌거라고 단정하고 있는것 같다.
  • 그가 그날 말한 대로, 반드시 내가 그에게 빌거라고.
  • 설찬의 말을 듣자 나를 잡고 있던 유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 설찬을 정말 무서워하나 보다.
  • 나 고개를 들어 설찬을 한참 동안 바라 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 “빌지 않을 겁니다.”
  • 깔끔한 한 마디를 내뱉고나니 설찬의 고운 얼굴이 굳어 지는게 보였다.
  • 순간 그의 눈동자는 분노로 가득 채워졌다.
  • “어리석은 여자로군! 차라리 강시한테 먹혀도 나를 안 따르겠다는 겐가?”
  • "맞아요."
  • 나는 더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떨구었다.
  • "나를 파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네요."
  • 설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화가 나 폭발할것 같을것이다.
  • "좋소. 그럼 나는 여기서 네가 먹히는 걸 지켜보겠소."
  • 설찬의 노여운 목소리를 듣고 나는 눈을 감고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 죽으면 죽었지.
  • 내가 죽으면 슬퍼해 주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겠네?
  • 한쪽의 유도는 흥분되어 온 몸을 떨었다.
  • "하하, 안소, 그렇게도 나한테 먹히고 싶어 하는지 몰랐네. 기왕 이렇게 된거 내가 기꺼이 도와주지. 나리,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 그의 말이 막 끝나자마자 목이 더 세게 조여왔다!
  • 불과 몇 초 사이에 나의 뇌는 산소 부족으로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 눈앞의 정경이 모호해지기 시작하고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나 죽는 거야?
  • 지난날의 추억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휙휙 지나갔고 내 의식은 조금씩 풀려갔다. 내가 의식을 잃기 전의 마지막 순간 귓가에 탄식이 들렸다.
  • “안소야, 내가 널 갖고 어쩌겠소?”
  •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생각해보기도 전에 뒤에서 가슴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 다음 순간 나는 온통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머리가 어지럽고 무겁고 너무나도 아팠다...
  • 나는 눈을 뜨려고 애를 써서 눈앞에서 누군가의 머리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 그 머리는 특이했고 긴 머리카락이 찰랑이였으며 조선시대 사람 같은 머리를 빗고 있었다.
  • 또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건가?
  • 눈앞에 보이는 그 머리를 보며 나는 볼수록 신기하다 여겼다.
  • 이 사람은 머릿결이 좋은데다가 검고 윤기가 나는데 만지면 감촉이 어떨지 모르겠네.
  • 내 마음은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손은 벌써 뻗어 그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 만지작만지작.
  • 응, 역시나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 “안소! 다시 한번 내 머리를 만진다면 널 바닥에 던져버리겠소!”
  • 이를 악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 나는 놀라서 깼다!
  • 맘마미아!
  • 이건 그 남자 귀신 설찬 목소리잖아!
  • 나는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나는 곧 알아차렸다. 난 지금 누군가에게 업혀 기숙사 앞 오솔길을 지나고 있었다.
  • 잠깐, 난 유도한테 살해 당했잖아. 어떻게 아직 살아있지?
  • 나는 얼른 자신의 목을 만졌다. 물린 상처 하나 없이 매끈매끈했다. 목을 만지는 내 동작에 따라 나의 팔꿈치가 나를 업은 사람에게 부딪쳤다.
  • "안소! 적당히 하게! 내 머리를 부딪치지 말게!"
  • 설찬의 화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나를 등에 업은 사람을 쳐다 보았다.
  • 먹처럼 긴 머리카락, 설찬 그 변태가 아니면 누구겠어?
  • "설찬?"
  • 아까보다 더 충격적이였다.
  • "그쪽이 왜 저를 업고 있으세요?"
  • "안 업으면 설마 질질 끌고 오라는 겐가?"
  • 설찬은 욕설을 퍼부으며 내가 멍청하다 여기는것 같았다.
  • 나는 한참 멍해 있다 비로소 알아차렸다.
  • "그쪽이 절 구했나요?"
  • "아니면?"
  • 설찬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 믿기 어려웠다. 이 남자 귀신이 결국 나를 구했다구?
  • 정신을 되찾기 전 설찬은 이미 기숙사에 도착했다.
  • 나를 의자에 앉힌 후 그는 자리를 뜨지 않고 소매 속에서 핸드폰를 꺼내 나왔다.
  • 나는 그것이 유도가 나에게 준 핸드폰임을 알아보았다.
  • 설찬의 손바닥에 파란 깨비불이 생기더니 불길이 순식간에 핸드폰를 삼켜버렸다.
  • 순간 핸드폰은 뒤틀리고 도깨비불을 피해 발버둥치듯 처절한 비명을 질렀는데 듣자니 여자의 비명소리 같았다.
  • 나는 등짝이 으쓱해났다.
  • 눈 깜박할 사이에 그 핸드폰은 도깨비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고 그 기괴한 울음소리도 사라졌다.
  • "이 핸드폰이 유도의 계약서일세. 이런 더러운 것은 태우는 것이 좋겠소."
  • 설찬은 망연자실한 내 모습에 입을 열어 설명해 주었다.
  • "그렇군요. 유도는 강시입니까?"
  • “그래, 여자의 정기를 빨아먹고 사는 강시일세. 그러나 도행이 너무 얕아 역식당할까봐 겁을 먹고 이런 계약에 베팅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세.”
  • 소름이 돋았다.
  • 여도가 진짜 강시 일줄이야. 하마터면 임영이처럼 그의 손 아래서 죽을 뻔 했네.
  • 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턱이 느닷없이 붙잡혔다.
  • 고개를 드니 설찬의 두 눈과 마주쳤다.
  • 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심연 같아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 “안소, 물어 볼게 있소.”
  • 설찬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말씀하세요."
  • “넌 어째서 나와 명혼을 하지 않으려 하는겐가?”
  • 설찬이 진지하게 물었다.
  • “살아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여자가 내 침대에 오르고 싶어 했고, 죽은 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여자 귀신이 내 관에 오르고 싶어했는데, 넌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게냐?”
  • “……”
  • 나의 입가가 참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전혀 할 말이 없었다.
  • "대단하고 멋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람과 귀신은 다르니 제발 절 놓아 주셨으면 합니다."
  • 이 남자 귀신이 오늘 나를 구해 주었으니 나는 그와 이야기를 잘 해 보기로 결정했다.
  • "그럴 수는 없네."
  • 설찬은 생각도 안하고 말을 내뱉었다.
  •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 했을터인데.”
  • 나는 절망하여 결국 마음속의 질문을 참을 수 없어 말했다.
  • "왜요? 왜 꼭 접니까?"
  • 설찬은 내 원망을 알아 본듯 눈을 가늘게 뜨고 손에 힘을 주어 내 얼굴이 그와 더 가까워지게 끌어 당겼다.
  • "왜서 당신인가가 아니라 당신이여야만 하는 거일세."
  •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나는 가슴이 떨렸다.
  • "무슨 소리에요. 뭐가 나여야만 하는건데요?
  • "너는 음년음월음일음시에 태어나 사주에 음기가 가득하여 이런 여자만이 귀신과 명혼을 치를 수 있는게다."
  • 나는 멍해졌다.
  • 나는 비록 고아지만 고아원에 금방 갔을 땐 목에 작은 주머니가 걸려져 있었는데 그안에는 내 사주 팔자가 쓰여져 있었다.
  • 내 팔자는 기특하게도 음년음월음일음시여서 모든 점쟁이가 나를 보면 태어날때부터 인간세상에 어울리지 못 한다고 고개를 저었다.
  • 예전엔 단지 미신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 라지만 나는 그의 답이 여전히 맘에 들지 않았다.
  • "저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동시에 태어난 여자가 많고도 많은데 왜 하필 저입니까?"
  • 나는 다시 캐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