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4화 허 씨 집안 사람들의 추악한 실체

  • 그 말에 허다은의 맑은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 ‘유하준은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잘 보여 소경운 앞에서 나에 대해 좋은 말들을 해주길 바라서라고 생각하는 거야?’
  •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저 단순히 오빠를 신경 써서 한 행동이라고요!”
  • 허다은은 긴장한 듯 작은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시선을 떨구며 나직이 말을 이어갔다.
  • “게다가 전 이제 소경운 그 자식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요.”
  • 그녀는 다시 사는 인생에서는 허 씨 집안 사람이든, 소경운이든, 더 이상은 그들의 호구 노릇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 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유하준의 눈빛이 더 깊어져갔다…
  • 퇴원하는 날, 병원 문 앞에 폭스바겐 산타나 한 대가 멈춰 섰다.
  • 허 씨 가문에서 허유라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 허영훈이 젠틀하게 허유라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고, 허영근은 그런 그들의 뒤에서 그녀의 짐들을 대신 들어주고 있었다.
  • 그렇게 세 사람은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차에 올라탔고, 차는 먼지만 한 줌 남겨둔 채 떠나갔다.
  • 그 누구도 허다은의 존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 이에 허다은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 딱히 실망할 것도 없었다.
  • 그저 문득 그 집안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 허 씨 가문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그 돈은 그녀와는 눈곱만큼도 상관이 없었다.
  • 그들의 눈에 그녀는 그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애물단지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 허 씨 가문은 의류 공장 직원 아파트 뒤쪽에 3층짜리 저택을 갖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그 저택은 직원 아파트단지 내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풍경이었다.
  • 당시 허영규는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우고 바닷길을 통한 장사에 뛰어든 몇 사람 중 하나였는데, 아주 성공한 도박이 아닐 수가 없었다.
  • 지난 몇 년간 의류회사를 경영하며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아파트 단지 내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 다들 출근했을 시간이어서인지 아파트 단지 내에는 어르신 몇 분이 장기를 두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부채를 흔들며 연신 수다를 떨고 있었다.
  • 천으로 된 크로스백을 멘 채 혼자 돌아온 허다은을 발견하고도 그녀들은 딱히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아마 이미 익숙하게 보아온 모습이었을 테니 말이다.
  • 그럼에도 그들은 평소와 같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몇 마디 안부 인사를 건네왔다.
  • “다은아, 왜 혼자 돌아오는 거야? 너희 큰오빠랑 셋째 오빠가 이른 아침부터 차를 끌고 너희 언니를 데리러 갔는데, 왜 너는 함께 데리고 오지 않은 거야?”
  • 차를 끌고 나갔다는 말을 하던 임 씨 아주머니의 두 눈에 순간 부러움이 스쳤다.
  • 허 씨 가문이 많은 돈과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은 동네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이 큰 단지 내에 이를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임 씨 아주머니는 동네의 소문난 수다쟁이에 이 집 저 집 다 오지랖을 떨어대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느 집 남편이 바람이 났는지까지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
  • 그리고 그런 임 씨 아주머니는 그녀의 집안 사정에 꽤나 ‘관심’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 ‘전에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허 씨 집안 사람들을 감싸준답시고 멀미 때문에 차에 타기만 하면 속이 울렁거려 걸어 다니는 게 더 편하다고 했었지.’
  • 하지만 허다은은 이번에는 사실을 감추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허 씨 집안 사람들에게 잘 보일 생각이 없었으니, 거짓말을 할 필요 또한 없는 것이었다.
  • “저도 차를 타고 오고 싶었죠. 하지만 언니가 저더러 더럽다면서 차에 못 타게 하는데 어쩌겠어요? 아주머니가 모르셔서 그렇지, 저 집에서는 창고방에서 지내요. 들어가면 퀴퀴한 냄새가 잔뜩 난다고요. 이 더운 날에 그런 곳에서 지내자니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 말을 하던 허다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계속해서 폭로를 이어나갔다.
  • “저는 밥 먹을 때도 겸상 같은 건 못해요. 언니가 다 먹고 나서야 제가 먹을 수 있고요. 제가 입는 옷들도 언니가 버린 걸 주워 입는 거예요. 그리고 이 가방도 언니가 쓰다가 실증 나서 버린 걸 제가 쓰는 거예요.”
  • 그녀의 말에 아주머니들은 연신 탄식하며 다들 허다은을 안타까워했다.
  • 허 씨 가문은 돈도 그렇게 많으면서 그렇게 쩨쩨하게 굴며 친딸에게는 하녀보다도 못한 대우를 하면서도 양녀는 애지중지 키우다니, 정말이지 너무하다면서 말이다.
  • 알고 보니 친딸에게 잘 대해주는 것 같이 보였던 모습들은 전부다 가식이었던 것이다.
  • 양녀를 애지중지하고 친딸은 마당에 난 풀보다도 하찮게 여기다니, 그런 짓도 허 씨 가문이라야 할 만한 짓이었다.
  • “아가, 울지 마. 그 집안에서 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 나한테 만약 너 같은 손녀가 있었다면 분명 귀하게 여기며 아껴줬을 텐데, 도대체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모르겠네. 어휴~”
  • “평소 너한테 잘해주는 것 같더니, 그게 다 가식이었던 거구나. 허 씨 집안은 돈도 그렇게나 많으면서 친딸한테 이렇게 짜게 굴 줄은 몰랐네. 정말 너무하잖아!”
  • 그들의 말에 허다은의 두 눈에 순간 만족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런 반응이었다.
  • 아마 며칠 안 가 이 일은 온 동네에 다 퍼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허 씨 집안 사람들도 더는 가식을 떨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전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아주머니들. 얼른 돌아가서 밥을 차려야 하거든요. 집에 늦게 돌아가면 또 엄마 아빠와 오빠들한테 한 소리 들을 거예요.”
  •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허다은의 요리 솜씨는 허 씨 집안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었고,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매일 하루 세 끼 식사와 디저트를 차려야 했다.
  • 오로지 허유라가 가정부 아주머니가 한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녀는 매일 같이 가장 늦게 잠들고, 가장 일찍 일어나며 온 집안 사람들의 음식 시중을 들어야만 했었다.
  •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는 그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 임 씨 아주머니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 “허 씨 집안에는 가정부가 따로 있잖아. 그런데 왜 네가 돌아가서 밥을 차려야 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