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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기회를 양소정에게 양보할 거예요

  • 다음날, 이른 아침 일어난 허다은은 아침을 먹은 뒤 바로 학교로 향했다.
  • 학교의 강의실은 오래된 건물들이라 그중 많은 건물들이 리모델링한 건물들이었고 문 옆에 붙어있는 금테로 둘러진 간판 위에는 ‘서울대학’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학교에는 학생들이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 몇 명의 여학생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그 시절 유행하던 mp3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꽤나 멋져 보였다.
  • 교실에서 잠시 책을 읽던 허다은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양소정을 발견하고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 “다은아, 상처는 다 나은 거야? 원래는 너한테 병문안 가려고 했는데 요즘 우리 집이 이사를 하고 있어서 못 갔어. 미안해.”
  • 허다은을 본 양소정은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또한 허다은을 보러 가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한 눈치였다.
  • 갸름한 얼굴에 늘씬한 몸매와 새하얀 피부를 가진 양소정은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 “난 이제 괜찮아. 가자, 나랑 이 교수님 사무실에 같이 가줘.”
  • 소경운이 나서기 전에 자신이 가진 기회를 넘겨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늦어버릴 수도 있었다.
  • 허다은은 양소정이 영어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도 무척이나 응시를 하고 싶어 했지만 한발 늦는 바람에 기회를 얻지 못해 꽤나 오랫동안 속상해했었다.
  • “그래. 이제 막 학교에 돌아왔으니 교수님한테 인사는 드려야지.”
  • 허다은을 따라 교수 사무실로 온 양소정은 예의 바르게 노크했다.
  • 곧이어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 한창 수업 준비를 하고 있던 이 교수는 코끝에 걸려있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 그리고는 두 사람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는 듯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 “이 교수님, 저 이번 영어 스피치 대회에 참가할 기회를 소정이한테 양보하려고 해요.”
  • 이에 이 교수는 이상하다는 듯 허다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허다은 학생, 잘 생각해야 해요. 명단은 일단 바꾼 뒤에는 다시 돌이키지 못해요.”
  • 양소정조차도 지금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도 허다은은 그녀에게 이에 대해 한마디 언질도 없었기에 그녀에게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 “다은아, 겨우 얻어낸 기회를 왜 나한테 주겠다는 거야? 얼른 장난이었다고 교수님한테 말씀드려.”
  • 양소정은 충격을 받은 듯 손까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허다은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서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 비록 영어를 굉장히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 허다은이 이번 시험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절친인 양소정이 모를 리가 없었다.
  • 하지만 허다은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 교수를 향해 말했다.
  • “잘 생각해 봤어요, 교수님. 제가 가진 기회를 소정이한테 줄래요.”
  • 허유라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양소정이 원하던 바를 이루어 주는 편이 나았다.
  • 지난 삶에서 그녀에게서 기회를 빼앗아 간 허유라는 160만 원의 상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나가 외국 학생들과 한국의 문화에 대해 교류할 기회까지 얻었었다.
  • 말 그대로 대단한 영광이었다.
  • 그렇기에 이번에는 절대로 허유라의 뜻대로 그 기회를 빼앗아 가게 둘 수가 없었다.
  • 허다은 본인 역시 그 후과가 어떨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 양소정은 평소에도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해오고 있었고 이번 스피치 대회에도 꽤 기대를 품고 있었기에 허다은은 그녀가 허유라보다 더 잘 해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게다가 양 씨 가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소 씨 가문에서 무슨 수를 쓴다 한들 그들의 손에서 이 기회를 다시 빼앗아 가지는 못할 것이었다.
  • 양소정이 눈을 부릅뜨고 힘껏 허다은을 잡아당기며 나직이 속삭였다.
  • “다은아, 너 무슨 충격이라도 받은 거야? 왜 갑자기 그 기회를 나한테 양보하겠다는 건데?”
  • 이에 허다은 역시 그녀를 따라 나직이 속삭였다.
  • “사실 별 이유 없어. 그냥 갑자기 깨달았을 뿐이야. 더는 호구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아.”
  • 호구 짓 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이 교수는 명단을 고친 뒤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 “명단은 이미 고쳤어요. 더 할 말 있나요?”
  • “이 교수님께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어요. 저 의대로 전공을 바꾸고 싶어요.”
  • 그 말에 이 교수는 지그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 “의대로 전공을 바꾸려면 시험을 거쳐야 해요. 바꾸고 싶다고 쉽게 바꿀 수 있는 줄 알아요?”
  • 전에도 의대로 전공을 바꾸려던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중 일부는 시험이 너무 어려워 통과하지 못했고, 일부는 시험을 준비하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안 될 것 같다고 느껴 다시 원래 전업으로 돌아왔었다.
  • 하지만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터라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순조롭게 졸업하지 못했었다.
  • ‘학교가 본인 집안 소유라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젊은 날의 패기에 대한 책임 역시 본인이 져야 할 텐데 말이야.’
  • 물론 성공적으로 의대로 전공울 바꿔 졸업 후 큰 병원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건 그저 예외일 뿐이었다.
  • 허다은은 이 교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 “이 교수님, 저한테 기회만 주신다면 전 제가 분명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 의학 쪽 지식에 대해서라면 허다은은 꽤나 자신이 있었다. 그 오랜 시간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배운 의술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 하지만 환자를 보려면 이제는 자격증이 필요했기에 공부를 해서 의사 면허증을 따는 수밖에 없었다.
  • 한편 양소정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 하지만 영어 스피치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그녀에게 넘긴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미 그녀를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한 와중에 이제는 의대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하다니, 양소정은 허다은이 입원해 있는 동안 무언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확 바뀔 리가 없었다.
  • 이 교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코끝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간곡하게 허다은을 설득했다.
  • “허다은 학생, 아무래도 돌아가서 부모님과 한번 상의해 보는 게 좋겠어요. 어쨌든 대학생을 뒷바라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나중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으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