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강의실은 오래된 건물들이라 그중 많은 건물들이 리모델링한 건물들이었고 문 옆에 붙어있는 금테로 둘러진 간판 위에는 ‘서울대학’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학교에는 학생들이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몇 명의 여학생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그 시절 유행하던 mp3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꽤나 멋져 보였다.
교실에서 잠시 책을 읽던 허다은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양소정을 발견하고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다은아, 상처는 다 나은 거야? 원래는 너한테 병문안 가려고 했는데 요즘 우리 집이 이사를 하고 있어서 못 갔어. 미안해.”
허다은을 본 양소정은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또한 허다은을 보러 가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한 눈치였다.
갸름한 얼굴에 늘씬한 몸매와 새하얀 피부를 가진 양소정은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난 이제 괜찮아. 가자, 나랑 이 교수님 사무실에 같이 가줘.”
소경운이 나서기 전에 자신이 가진 기회를 넘겨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늦어버릴 수도 있었다.
허다은은 양소정이 영어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도 무척이나 응시를 하고 싶어 했지만 한발 늦는 바람에 기회를 얻지 못해 꽤나 오랫동안 속상해했었다.
“그래. 이제 막 학교에 돌아왔으니 교수님한테 인사는 드려야지.”
허다은을 따라 교수 사무실로 온 양소정은 예의 바르게 노크했다.
곧이어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창 수업 준비를 하고 있던 이 교수는 코끝에 걸려있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는 듯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이 교수님, 저 이번 영어 스피치 대회에 참가할 기회를 소정이한테 양보하려고 해요.”
이에 이 교수는 이상하다는 듯 허다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다은 학생, 잘 생각해야 해요. 명단은 일단 바꾼 뒤에는 다시 돌이키지 못해요.”
양소정조차도 지금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도 허다은은 그녀에게 이에 대해 한마디 언질도 없었기에 그녀에게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다은아, 겨우 얻어낸 기회를 왜 나한테 주겠다는 거야? 얼른 장난이었다고 교수님한테 말씀드려.”
양소정은 충격을 받은 듯 손까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허다은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서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비록 영어를 굉장히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허다은이 이번 시험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절친인 양소정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허다은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 교수를 향해 말했다.
“잘 생각해 봤어요, 교수님. 제가 가진 기회를 소정이한테 줄래요.”
허유라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양소정이 원하던 바를 이루어 주는 편이 나았다.
지난 삶에서 그녀에게서 기회를 빼앗아 간 허유라는 160만 원의 상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나가 외국 학생들과 한국의 문화에 대해 교류할 기회까지 얻었었다.
말 그대로 대단한 영광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절대로 허유라의 뜻대로 그 기회를 빼앗아 가게 둘 수가 없었다.
허다은 본인 역시 그 후과가 어떨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양소정은 평소에도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해오고 있었고 이번 스피치 대회에도 꽤 기대를 품고 있었기에 허다은은 그녀가 허유라보다 더 잘 해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양 씨 가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소 씨 가문에서 무슨 수를 쓴다 한들 그들의 손에서 이 기회를 다시 빼앗아 가지는 못할 것이었다.
양소정이 눈을 부릅뜨고 힘껏 허다은을 잡아당기며 나직이 속삭였다.
“다은아, 너 무슨 충격이라도 받은 거야? 왜 갑자기 그 기회를 나한테 양보하겠다는 건데?”
이에 허다은 역시 그녀를 따라 나직이 속삭였다.
“사실 별 이유 없어. 그냥 갑자기 깨달았을 뿐이야. 더는 호구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아.”
호구 짓 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교수는 명단을 고친 뒤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명단은 이미 고쳤어요. 더 할 말 있나요?”
“이 교수님께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어요. 저 의대로 전공을 바꾸고 싶어요.”
그 말에 이 교수는 지그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의대로 전공을 바꾸려면 시험을 거쳐야 해요. 바꾸고 싶다고 쉽게 바꿀 수 있는 줄 알아요?”
전에도 의대로 전공을 바꾸려던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중 일부는 시험이 너무 어려워 통과하지 못했고, 일부는 시험을 준비하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안 될 것 같다고 느껴 다시 원래 전업으로 돌아왔었다.
하지만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터라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순조롭게 졸업하지 못했었다.
‘학교가 본인 집안 소유라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젊은 날의 패기에 대한 책임 역시 본인이 져야 할 텐데 말이야.’
물론 성공적으로 의대로 전공울 바꿔 졸업 후 큰 병원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건 그저 예외일 뿐이었다.
허다은은 이 교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이 교수님, 저한테 기회만 주신다면 전 제가 분명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의학 쪽 지식에 대해서라면 허다은은 꽤나 자신이 있었다. 그 오랜 시간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배운 의술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환자를 보려면 이제는 자격증이 필요했기에 공부를 해서 의사 면허증을 따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양소정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영어 스피치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그녀에게 넘긴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미 그녀를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한 와중에 이제는 의대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하다니, 양소정은 허다은이 입원해 있는 동안 무언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확 바뀔 리가 없었다.
이 교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코끝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간곡하게 허다은을 설득했다.
“허다은 학생, 아무래도 돌아가서 부모님과 한번 상의해 보는 게 좋겠어요. 어쨌든 대학생을 뒷바라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나중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으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