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파혼
- 소경운이 앞으로 걸어 나와 허다은을 향해 차가운 경고를 날렸다.
- “이번 일에 대해 유라한테 사과하지 않으면 돌아가서 파혼 얘기를 꺼낼 거야.”
- 그는 이 한마디면 허다은이 급히 달려와 사과하며 예전처럼 비굴하게 자신에게 잘 보이려 온갖 변명들을 늘어놓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 하지만 소경운이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허다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미동도 없었다. 마치 이 일이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 허다은은 소경운의 면상을 바라보며 약간의 역겨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 허유라를 좋아하고 있는 거였으면 애초에 두 집안에서 약혼 얘기가 나왔을 때 왜 싫다고 하지 않은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그러니까 이 약혼이 내가 기를 쓰고 원해서 성사된 것 같잖아.’
- 허유라가 눈시울을 붉힌 채 손을 뻗어 소경운의 팔을 잡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다 내 탓이야. 그러니까 싸우지 마. 다은이가 화가 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다은이한테 화내지 마.”
- 허영훈은 허유라가 이럴 때마다 굉장히 싫어했다. 분명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나서서 허다은을 감싸주는 모습이 마음이 아팠던 그는 허다은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 “허다은 넌 양심도 없어? 유라가 이렇게까지 널 감싸주는데 아직도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단 말이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 얼른 사과해!”
- 허영근은 속상한 듯 허유라를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며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허다은을 노려보았다.
- “허다은, 유라가 네 편을 들어준다고 해서 네 잘못이 덮어질 거라 생각하지 마. 오늘 이 자리에서 사과하지 않으면 이 일은 그냥 안 넘어갈 줄 알아.”
- 허유라의 얼굴에 순간 이상하게 여기는 듯한 낌새가 비쳤다.
- 허다은이 달라졌다.
- 예전에는 오빠들이 모진 말 한마디만 하면 곧바로 당황해서는 시키는 대로 하던 그녀가 이번에는 무슨 약을 잘못 먹기라도 한 것인지 오빠들이 무슨 말을 하든 꼬리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 그쯤 되니 허영규 역시 그들 쪽으로 다가와 허다은을 향해 호통쳤다.
- “너희 언니가 얼마나 철이 들었는지 봐. 그런데 너는 어떠냐. 다른 사람을 시켜 유라를 괴롭히게 해 놓고도 이렇게 염치없이 굴다니. 허다은, 우리 허 씨 가문의 체면은 네가 다 깎아 먹는구나!”
- 역시나 누군가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이 숨을 쉬는 것조차도 잘못으로 느껴진다는 말이 딱 맞았다.
- 허다은은 그들의 얼굴을 한 번씩 눈으로 훑었다.
- 그들의 심한 말에도 그 어떤 마음의 동요도 없을 줄 알았지만 그녀는 눈가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 한때 이들의 사랑을 얼마나 갈망했던가. 하지만 온 힘을 다해 이들에게 잘 보이려 애썼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또 무엇이었던가?
- 사실 허유라보다도 그녀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허 씨 집안 사람들이었다.
- 허다은은 시선을 떨구고 두 눈 가득 담겨있는 한기를 감춘 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 “조금 전에 이미 말했잖아요.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사과할 수 없다고.”
- “너…”
- 허영규가 분노에 찬 채 허다은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항상 얌전하고 고분고분하던 딸이 무슨 충격을 받은 것인지 이렇게 변해버리다니, 그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 “아빠, 난 이제 괜찮아. 다은이는 동생이잖아. 그러니까 난 다은이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
- 허유라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허다은을 향해 다시 말을 이어갔다.
- “다은아, 얼른 이리 와서 아빠한테 사과드려. 그리고 맛있는 거 만들어 줘. 이 일은 그냥 그렇게 넘어가자.”
- 허유라는 계속해서 허다은을 감쌌다. 마치 자신이 설움 좀 당하더라도 허다은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 그리고는 또 고개를 돌려 사과하라며 허다은을 설득하는 그 모습은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 이에 허다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럼 언니가 한번 말해봐.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만약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 언니가 확실하게 말해주면 나도 사과할게.”
- 예전에만 해도 허다은은 그런 허유라를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 매번 자신이 허 씨 집안 사람들에게 질책당할 때마다 항상 가장 먼저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어주던 허유라였기에, 그녀가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허유라의 실체를 알고 있었고, 더는 그녀에게 속지 않았다.
- 그런 그녀의 말은 허유라를 말문이 막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그녀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얼굴을 찌푸렸다.
- 그녀는 단지 허다은에게 고집을 굽힐 구실을 만들어주려 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는 허다은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 예전에는 매번 허다은이 오빠들에게 혼이 날 때마다 허유라는 항상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어주곤 했었다. 이는 거의 일상에 가까운 일이었다.
- 하지만 지금의 허다은은 이를 고맙게 여기지도 않고 있을뿐더러 더욱이는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 “다은아, 난 다름이 아니라 그저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거야. 그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거잖아?”
- 허유라는 무력한 모습으로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힌 채 그렁그렁한 눈으로 허다은을 바라보았다.
- 그 주눅 든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 소경운은 더 이상 그 모습을 보고 있지 못하겠는지 품 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두말없이 허다은의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
- “허다은, 자기 언니를 해치려고 자기 몸도 쉽게 내다 파는 너 같은 여자, 정말이지 역겨워. 파혼해, 지금 당장!”
- 아무도 그의 결정을 막을 수 없었다. 두툼한 혼인 서약서에 얼굴을 맞은 허다은은 얼얼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차가운 시선으로 소경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좋아!”
- “경운 오빠, 그게…”
- “유라야, 자꾸 허다은 쟤 편을 들어주지 마. 넌 너무 착해. 그러니까 쟤가 그렇게 널 괴롭히는 거잖아.”
-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소경운에 의해 말이 끊긴 허유라는 시선을 떨구고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서러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허다은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숙여 혼인 서약서를 주워 들고는 찬찬히 훑어보았다.
- ‘오, 확실히 혼인 서약서가 맞네.’
- 곧이어, 허다은은 아무런 표정도 담겨있지 않은 얼굴로 서약서를 갈가리 찢어 소경운을 향해 집어던졌다.
- “어차피 소경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허유라잖아. 이제 혼인 서약서도 이미 파기됐으니, 앞으로는 서로 간섭하지 말자. 내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얼른 허유라랑 만나.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주지 말고.”
- 그 말을 내뱉던 순간, 허다은은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꼈다.
- ‘끼리끼리 만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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